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71화
제44장. 수상한 움직임(2)
새벽 2시가 되었음에도 혜정의 집안은 여전히 불이 들어와 있었다.
일정이 있어서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혜정의 부모님은 현재 여행 중. 이 집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혜정과 예나, 단 둘뿐이었다.
“과일 깎아왔어. 먹을래?”
편안한 츄리닝 차림으로 갈아입은 혜정이 사과를 가득 담은 접시를 내밀었다.
뉴스 화면에 집중하던 예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을게요.”
“응. 근데 뭘 보기에 그리 심각하게 반응해?”
혜정이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장공비 관련 소식이었다.
“이 꼭두새벽에 무장공비? 세상 무섭네.”
“그러게요.”
레디너스에 있을 때에는 이것보다 더 많은 위협이 있었다.
특히나 에리나의 포지션은 그 위험한 일의 최전선에 위치했었기에 이렇게 무장공비 관련 소식을 뉴스로 접하는 건 평화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무장공비들의 정체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드리무어 쪽에선 벌써 싸움이 발생했나 보네.’
그럼에도 아직까지 진수로부터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
이미 무장공비 관련 소식이 전파를 탈 정도였다. 언론에 특보가 전달되기 이전부터 군부대는 진작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을 터.
그런데 왜 진수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까.
‘혹시 마일더 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갔다.
차라리 먼저 진수에게 연락이라도 해볼까 했었다. 통신석을 몰래 꺼내 들어 자리를 비키려던 찰나였다.
우우우우웅!
통신석이 가볍게 울렸다. 동시에 예나의 얼굴도 확 밝아졌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린 혜정이 곧장 물어왔다.
“무슨 일이야? 뉴스 보다 말고 어디 가게?”
“그…… 자, 잠깐 편의점 좀 들렀다 올게요.”
“편의점? 왜?”
“그게……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당겨서요! 언니도 하나 어때요?”
“나는 패스. 다이어트 중이야.”
“그럼 빨리 다녀올게요.”
“밤길 조심하고. 아니면 나도 같이 나갈까?”
“아니예요. 바로 앞인데요. 걱정 마세요.”
오히려 혜정이 따라오는 건 예나에게 민폐다. 통신석을 사용하는 모습을 그녀에게 들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 바깥으로 나온 예나가 통신석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찾았다.
-아아, 들리나.
‘예, 마일더 님. 잘 들립니다. 그보다 무사하셨군요!’
-우리 부대는 아직 출동 전이니까.
‘뉴스 보고 분명 흑마법사 조직과 접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
-아니, 맞다. 실제로 서수오가 놈들과 일전을 벌이는 중이다.
‘그런데 어째서…….’
왜 진수는 영내에 대기하고 있는가. 이게 궁금했다.
‘혹시 드리무어도 그 서수오라는 자와 같이 싸우는 중입니까?’
-아니. 놈도 나와 같이 부대 내에 대기 중이다.
‘예?’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아니, 흑마법사 조직원이 스스로 싸움을 걸어왔는데, 왜 가만히 있는 걸까.
이해 안 간다는 예나의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진수가 그간의 사정을 압축해서 설명했다.
-카잔이 등장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이제야 필두의 진의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부하를 사지로 내몰고 본인은 안전하게 대기하다니.
‘역시 드리무어. 변함없군요.’
-글쎄. 정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드리무어의 판단이 맞을지도 모르지.
‘마일더 님이시라면 분명 부하를 위해 움직이셨을 겁니다!’
-하하, 그렇겠지. 하지만 이번 작전은 드리무어의 판단에 맡긴다고 내 쪽에서 먼저 말을 했으니, 녀석의 의견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 점은 너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예, 알고 있습니다.’
드리무어의 행동에 따라 처신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마일더의 명령이라면 크게 상관없었다.
-아무튼 이쪽은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 그리 알아둬라. 그리고 놈들이 먼저 선공을 가했으니 너도 경계를 강화하는 편이 좋을 거 같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다.
‘마일더 님도 조심하시길.’
서로 안부를 물으며 텔레파시를 종료했다.
통신석을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고 다시 혜정의 집으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
예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예나가 집 바깥으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5분? 그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주변 환경은 5분 전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특히나 그림자의 방향이 다르다.
가로수 등 불빛과 정 반대로 그림자가 형성된 채였다.
둔한 사람이라면 눈치채는 게 늦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예나는 꽤 예민한 축이었다.
이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예나의 발언은 호전적이었다. 그녀의 발언에 그림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춤을 추듯 움직였다.
쏴아아악!
바닥에 깔렸던 그림자 군단이 일제히 예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예나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바닥에 오른손을 짚은 채 자세를 낮춘 예나. 그 위로 그림자 군단이 그녀를 덮쳤다.
“컷팅(Cutting)!”
예나에게 닿기도 전에 그림자가 두 동강으로, 네 동강으로, 여덟 동강으로, 눈으로 확인하기 힘든 정도의 조각으로 갈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임에도 수많은 칼날이 그림자들을 유린하는 듯한 장관을 펼쳤다.
조각으로 분리된 그림자들이 뒤로 후퇴하더니 사람의 형상으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고우라 불린 남자였다.
“실력이 제법이군. 상상했던 것 이상이야.”
“흑마법사한테 칭찬받아봤자 하나도 안 기쁜데.”
예나의 반응은 살가웠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흑마법사를 증오한다. 악인을 처단하기 위해 마일더의 밑으로 들어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였다.
한편, 고우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직접 말로 하긴 했지만, 예나의 실력은 상당하다. 고우가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쪽이 편할 줄 알고 왔는데…… 어쩌면 가장 어려운 파트를 맡은 것일지도 모르겠군.’
고우의 이마에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계속되는 폭발음. 그 한가운데에 우뚝 선 수오가 두 사람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쳤다.
소모전이 계속되어 펼쳐졌다.
‘장기전은 내가 불리한데.’
수오가 속으로 짧게 탄식했다. 수적으로 유리하다는 건 그만큼 싸움이 장기전이 되어갈수록 많은 이점이 생긴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이쪽은 서수오 단 한 명뿐이다. 반면, 저쪽은 한조와 봉수가 팀을 이뤄 번갈아 공격을 했다.
수오는 쉴 틈이 없었다. 숨 고를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저쪽은 달랐다. 한 명이 공격을 할 때 다른 한 명은 떨어진 마나를 실시간으로 재보충했다.
‘성가신 놈들이군!’
비책을 꺼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슬슬 시작해 볼까.’
자리를 이동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호기롭게 두 사람의 공격을 정면에서 맞받아친 수오였으나, 이후에 보여준 행동은 너무나도 방어적이었다.
“결국 꽁무니를 빼려는 건가.”
활시위를 건 한조에게 봉수가 물었다.
“쫓겠습니까?”
“당연하지.”
두 사람의 임무는 수오를 사살하는 것이다. 수오를 죽이면 자연스레 필두가 알아서 나올 터. 그게 이들이 노리는 점이다.
수오는 반드시 없애야 하는 사냥감이다. 설령 도망친다 해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
“내가 놈을 유인하마. 틈 봐서 마무리 지어.”
“예, 한조 님.”
고개를 끄덕인 봉수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한편, 다수의 화살을 쏘아대며 수오의 도주 루트를 자신의 의도대로 만들어대는 한조.
수오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산속이라는 점도 그렇고, 가급적이면 민가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했기에 도주 루트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막다른 길목에 몰렸을 때였다.
“뒈져라, 서수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김봉수. 그의 주먹이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빗발쳤다.
“젠장!”
너무 방심했다.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거늘. 수오가 성장한 만큼 놈들도 성장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그 속에서 의외의 존재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타앙!
한 발의 총성. 빠른 속도로 날아든 탄환이 봉수를 방해했다.
“어떤 놈이……!”
총으로 봉수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긴 힘들다. 실제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갔을 뿐이다.
그러나 봉수의 기세를 멈추기엔 충분했다.
발포한 주인공이 수오에게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괜찮냐!”
“전도혁 상병님? 여긴 어떻게…….”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너 혼자 놔두고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냐! 그보다 저 새끼들이 무장공비 놈들이냐?”
“일단은 맞습니다.”
“일단은?”
“그보다 설명할 틈 없습니다. 저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야, 자, 잠깐만?”
수오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도혁의 허가를 구하기도 전에 수오가 그의 뒷덜미를 잡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악?”
전도혁은 한 덩치 하는 병사다. 그런 남자를 고작 한 손으로 잡고 달리다니.
게다가 달리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마치 시속 80㎞ 이상 달리는 차에 매달린 것 같았다.
실제로 매달려본 적은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이쯤일 텐데!’
목표 지점에 거의 다 도착했다!
한편, 도혁의 참전에 잠시 당황한 두 사람이었으나 이내 다시 추격을 재개했다.
야밤에 발생한 추격전. 흑마법사들의 내전에 끼게 된 도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멘탈이 승천하기 일보 직전, 드디어 수오가 걸음을 멈췄다.
“다 왔습니다.”
“다, 다 왔어? 그보다 여기가 어디냐!”
“승부의 분수령이 될 장소입니다.”
“뭐어?”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봉수, 한조가 이들의 앞까지 도달했다.
“이제 도망칠 여력도 안 남아 있나 보군.”
“천만에.”
수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도망친 게 아니라 너희를 이곳으로 ‘유인’한 거다.”
수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남자의 발밑에서 강하게 빛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아차!”
“빌어먹을!”
두 사람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사정없이 튀어나왔다.
바닥에 새겨지는 수많은 마법진. 필두가 열과 성을 다해 마련한 함정 장치였다.
마법진 트랩이 있다는 건 사전에 이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오를 쫓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마법진의 존재 여부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잘 가라, 새끼들아.”
수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붉은 불기둥이 사방에서 빗발쳤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지옥의 불길. 제아무리 한조, 봉수라 하더라도 저 일격에 살아남지는 못할 터.
그러나 수오가 계산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휘우우우웅!
흑풍(黑風)이 등장해 불기둥의 씨를 깡그리 말려 버렸다.
조금의 불씨조차 살아남지 못했다.
흑풍을 일으킨 주인, 카잔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랜만이군, 서수오. 못 본 사이에 아주 많이 건방져졌어. 교육이 필요하겠는걸.”
“……!”
용의 형상으로 변모한 흑풍이 수오와 도혁에게 쏘아졌다.
그러나 바로 그때.
“교육이 필요한 건 네놈이다.”
퍼어엉!
용의 머리가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가운데에 우뚝 강림한 남자.
그를 보자마자 카잔의 미간이 일그러들었다.
“드리무어…….”
“네놈이 카잔이군.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악인과 악인의 만남이 드디어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