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62화 (162/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62화

제41장. 수상한 움직임(2)

진수의 지시를 받고 사건 현장으로 향한 예나.

근처에는 경찰들이 접근 금지를 알리듯 배치되어 있었다.

민간인 통제 지역이었기에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사건 현장으로 향할 순 없었다.

게다가 아직 흑마법사 잔당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된다.

은신 마법을 건 채 조심스럽게 사건 현장으로 잠입했다.

현장은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박살이 난 모니터 조각들. 그중 하나를 집어든 예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수오라는 흑마법사가 벌인 짓이겠지.’

이곳이 수오가 머물던 집이었단 정보는 진수에게 이미 건네 들었다.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되었다.

낯선 방문자가 이곳을 방문했고, 때마침 수오가 미리 설치한 마법형 부비트랩이 발동한 것이다.

이것으로 폭발의 원인, 과정은 밝혀냈다.

문제는 그 낯선 방문자가 나머지 흑마법사 조직원들과 일치하느냐, 마느냐다.

“…….”

눈을 감은 상태에서 최대한 집중하기 시작했다.

차원 이동 이후, 예나도 본래의 힘을 되찾기 위해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마일더보다는 못 미치는 실력이지만, 그래도 예나의 강함은 레디너스 대륙 내 최상위권에 손꼽힐 정도였다.

그저 드리무어, 마일더라는 독보적인 존재들 때문에 그늘에 가려졌을 뿐. 에리나도 결코 약한 존재는 아니다.

여기저기 느껴지는 마나의 흔적.

순수한 마나가 아닌 탁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흑마법의 흔적이야.’

이곳에서 흑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증거들이 여기저기에 포착되었다.

게다가 하나가 아닌 다수였다.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었다.

‘마일더 님에게 알려야겠어!’

빠르게 움직이는 예나.

머지않아 그녀가 있던 자리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카잔 님의 생각이 옳았어. 설마 쥐새끼 하나가 더 숨어 있을 줄이야.”

그림자가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 * *

저녁 점호 시간을 앞둔 상황에서 당직병이 1생활관을 방문했다.

“진수야, 전화 왔다. 여자 친구한테서 온 거 같은데?”

“일병 황진수. 예, 바로 나가겠습니다.”

점호가 시작되려면 아직 10분가량 남은 상황이었다.

분과별 간담회 시간에도 전화는 가능하다. 단,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만 가능할 뿐, 부대에서 외부로 전화를 거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행정반으로 향했을 때, 진수가 행보관실을 응시했다.

현재 저곳에는 필두와 수오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점호 전에 필두가 수오를 따로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안 봐도 뻔했다.

‘흑마법사 조직 관련 일인가.’

마일더가 눈치챈 걸 저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을 터.

우선은 예나의 보고를 받는 게 먼저다.

“여보세요.”

-마일더 님, 접니다.

“결과는?”

간결하게 물었다. 긴 대화는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마일더 님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역시 그랬군.”

-어떻게 할까요?

“아까 내가 말했던 대로 이행해라. 그리고 드리무어의 부모님 쪽도 신경 쓰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전화가 아니라 돌로 대화를 주고받자. 그러는 게 훨씬 더 편할 테니까.”

-네. 아, 그리고 여쭤볼 게 있습니다만…….

“뭐지?”

잠시 말을 망설이던 예나가 어렵사리 운을 뗐다.

-드리무어에게 이토록 신경 쓰는 이유가 뭡니까?

최악의 적이었던 자와 가까운 이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자연스레 이런 물음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추가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재앙…….

“자세한 건 이후에 따로 말해주마.”

-예, 알겠습니다.

마일더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했다. 그러나 마일더라면 분명 무슨 생각이 있으리란 믿음이 들었다.

통화를 마쳤을 때, 당직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자 친구랑 대화한 거, 맞지?”

“예, 그렇습니다.”

“무슨 게임 이야기하는 줄 알았네.”

“그보다 행보관님, 안에 계시지 말입니다.”

“어. 있긴 한데.”

행보관실을 향해 거침없는 걸음을 유지한 진수가 이내 노크를 했다.

“일병 황진수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오늘따라 행보관실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필두의 허가가 떨어졌다.

“들어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진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수오와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문을 닫자마자 필두가 미리 새겨놓은 마법진이 저절로 발동했다.

“무슨 일이지.”

필두가 먼저 진수에게 방문 목적을 물었다.

여기서는 진수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도 될 것 같았다.

“오늘 발생한 폭발 사건, 그 조직과 연관이 있더군.”

“어떻게 알았지.”

“너희가 주고받는 대화를 몰래 염탐했다.”

거짓이었다.

안에서 한 대화 내용은 절대로 바깥에 새어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진수가 구태여 이런 거짓말을 한 건 이유가 있었다.

예나의 흔적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수는 아직까지 예나의 정체를 잘 숨기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나 필두는 이미 예나가 진수의 최측근이라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진수의 말이 거짓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네 수족이 현장 검증을 끝냈나 보군.”

“……!”

순간 진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수는 필두와 다르게 포커페이스에 소질이 없다. 아닌 척을 했지만, 필두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모른 척해도 소용없어.”

“그렇다면 이야기가 빨라지겠군.”

위기는 곧 기회가 된다.

진수는 당황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너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웬만한 정보는 공유하는 편이 좋을 거 같다.”

“정보를 공유해서 내가 얻는 이득이 뭐지?”

필두의 눈이 진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드리무어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건 마일더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흑마법사 조직을 타도할 때까지 너에게 힘을 빌려주마.”

“그런 거라면 거절하지.”

“이유가 뭐지?”

“놈들은 내가 해결할 수 있다. 수오가 내게 합류한 시점에서 이미 충분한 전력을 갖췄어. 굳이 네놈들의 손을 빌릴 이유가 없어졌다.”

“과연 그럴까.”

진수는 알고 있다.

드리무어의 유일한 약점을.

“네 작전은 완벽하지 않다. 예를 들어보지. 만약 놈들이 널 공격하는 게 아니라 혜정 씨나 가족들을 노린다면?”

“…….”

“너와 조직이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승산은 있겠지. 하지만 저들이 정말로 하르만 학살 사건의 주범이라면, 분명 너와 정면 대결을 하지 않으려 들 것이다. 제2의, 제3의 하르만 학살 사건을 일으키겠지.”

설득력이 있었다.

필두의 작전은 완벽하다. 저들을 이곳으로 꾀어내는 데까지 빈틈없는 설계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작전에 유일한 빈틈이 하나 있었다.

민혜정과 필두의 가족들의 존재였다.

“그들을 인질로 잡았을 때, 넌 지금처럼 냉정해질 수 있나.”

드리무어가 레디너스 대륙에서 악인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던 이유는 거침없는 그의 행보가 가장 컸다.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었던 데에는 드리무어가 독불장군처럼 혼자만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두는 드리무어 때와 상황이 정반대다.

이미 지켜야 할 이들이 생겨버렸다.

소중한 연인. 소중한 가족.

이들을 다시 잃을 수는 없다.

흑마법사 조직은 필두 측보다 숫자가 많다. 수적 이득은 유동적인 플레이를 가능하게 만든다.

인질을 붙잡는다. 이것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혜정과 필두의 가족들을 영내에 계속 머물게 할 수도 없다.

둘러댈 핑계도 없을뿐더러, 행보관으로서의 생활도 있기 때문에 좋은 방책이 되기 힘들다.

지켜줘야 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내가 보호해 주지 나라면 가능하다.”

진수가 다시금 자신의 역할을 어필했다.

“네 말대로 이 차원까지 나를 따라온 부하가 한 명 있다. 믿을 만한 녀석이니, 안심하고 맡겨도 된다.”

“그자가 누구지?”

필두가 확인하고 싶은 게 이거였다.

흑마법사 조직원은 한 명 한 명이 일기당천이라 불릴 만큼 강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직접 맞붙어본 필두였기에 알 수 있었다.

그저 필두가 너무 강했기에 기존의 흑마법사 조직원들이 무기력하게 당했을 뿐. 어지간한 실력자는 그들에게 상대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누가 혜정과 필두의 가족들을 지켜줄지. 그것도 관건이었다.

하나 진수도 바보는 아니다.

“내가 지닌 패를 상대방에게 전부 다 보여주는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안 그런가, 드리무어.”

“…….”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줘라. 그럼 나 또한 네가 원하는 것들을 오픈하마.”

딜이었다.

드리무어와 마일더. 마일더와 드리무어. 두 사람의 심리전을 실시간으로 관람하게 된 수오는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솔직한 심정 같으면 이 자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뜨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필두가 진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넌 믿을 만한 인간인가.”

“네가 보기엔 어떻지?”

“난 누군가에게 믿음, 신뢰라는 걸 줘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잘 모르겠군.”

“그럼 난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진수가 필두에게 다가갔다.

두 남자의 시선이 서로를 마주 봤을 때, 진수가 답변을 들려줬다.

“네가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니까 자신을 속이든, 설득하든, 최면 마법을 걸든 어떤 방식을 사용해서라도 억지로 날 믿게 해라. 그게 네가…… 아니,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협력. 그게 이 사태의 돌파구가 될 것이다.

진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 *

저녁 점호를 끝낸 필두는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좀처럼 퇴근길에 오를 수 없었다.

진수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믿는 게 불가능하다면 스스로 속여라. 억지로 믿게끔 하라. 그것이 진수의 요구였다.

드리무어는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때 수많은 배신을 맛봤다. 소중한 이들을 잃어버린 경험도 해봤다.

믿음과 신뢰는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감정이라 여겼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강필두라는 남자가 되고 나서부터 그 마음가짐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깨뜨릴 수 없는 두꺼운 벽이 존재했다. 그 벽 안에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다.

오로지 강필두만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금을 만든 건 민혜정이라는 여성이었다.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던 필두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내게 했다. 그만큼 혜정의 활약은 대단했다.

잔소리가 많지만, 그래도 필두를 걱정하고 사랑해 주는 새로운 부모님도 늘 눈에 밟혔다.

그리고 필두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9090대대 제1포대 부하들.

힘든 작업을 시킬 때에는 죽을상을 했지만, 그래도 필두가 시키는 일이라면 군말 없이 따르는 착한 녀석들이다.

“누군가를 믿는다…….”

어쩌면 진수의 말대로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열쇠는 협력일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 필두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벽으로 둘러싸인 드리무어만의 세계에서 나와 넓은 곳을 향한다.

혼자만의 세계가 아닌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계로.

“어려운 문제군.”

지금의 필두에게 필요한 건 바깥으로 나갈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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