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61화
제41장. 수상한 움직임(1)
작은 원룸 안.
대낮임에도 햇빛을 차단하기 위함인지 커튼이 잔뜩 쳐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방 안에는 수많은 모니터들이 수를 놓았다.
낯선 이의 출입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던 이곳에 어두운 그림자들이 발을 들였다.
“여기가 베르틴…… 아니, 서수오가 머물렀던 장소인가.”
“예.”
“기척이 안 느껴지는군. 자리를 비운 지 꽤 되는 거 같은데.”
“드리무어 암살 실패 이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죽진 않은 거 같은데.”
남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시체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뭔가 자꾸 걸리는 게 있는 듯했다.
서수오. 그는 조직 내에서도 상당히 약삭빠르기로 소문이 난 남자다. 그런 그가 드리무어에게 고이 죽었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벽 여기저기에 걸려 있던 모니터들이 번쩍! 하며 켜졌다.
분명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돌아다니며 모니터 버튼을 일일이 누른 적도 없었다.
그때, 남자가 짧게 읊조렸다.
“함정이군.”
말이 끝나자마자 모니터 위에 마법진들이 빛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이후.
퍼어어어어엉!
굉음을 동반한 폭발이 이어졌다.
주변에 들려오는 다수의 비명.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도 들려왔다.
건물 한 채를 날려 버릴 만큼 강한 폭발이 발생했음에도 남자들은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옷깃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
베리어를 걷어낸 남자가 그제야 확신이 선 모양인지 자신의 생각을 부하들에게 들려줬다.
“녀석은 살아 있다. 보아하니 드리무어에게 붙었나 보군.”
“배신했단 말입니까?”
“그 녀석……!”
서수오의 배신은 이미 예정된 순서였다.
살기 위한 배신. 하지만 그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 * *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일 일과 시간.
점심 식사 시간 때마다 병사들은 막사 바닥에 누워 부족한 기력을 채우기 위해 강제 수면 모드에 들어가곤 한다.
살기 위한 수면. 이 말이 딱 어울렸다.
그러는 동안, 유일하게 제정신을 차리고 있던 수오가 행정반을 찾았다.
“충성! 이병 서수오,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무슨 용무인데? 근무냐?”
당직병의 물음에 수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행보관님한테 드릴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행보관실에 계시긴 하는데. 그보다 행보관님한테 뭘 말하려…….”
“감사합니다. 충성!”
당직병의 말을 끊은 채 행보관실로 향했다.
대화를 질질 끌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무의미한 이야기만 이어질 테니까.
똑똑.
가벼운 노크와 함께 관등성명을 댔다.
“이병 서수오입니다. 보고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도록.”
“예.”
문을 열고 행보관실 안으로 들어가는 서수오. 그의 뒷모습을 예사롭지 않게 바라보던 당직병과 당직사병이 목소리를 낮춘 채 수군거렸다.
“수오 녀석, 왜 저러지?”
“혹시 뭐 이실직고할 거라도 있는 거 아닙니까?”
“이등병이 행보관님을 따로 찾는 건 언제 봐도 불안하단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이들의 걱정은 선임병으로 지극히 당연했다.
이등병이 왜 행보관을 따로 만나려 하겠는가. 내무생활 고충을 토로한다든지 하는 그런 용무일 가능성이 꽤 크다.
하나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내용이 수오의 입에서 쏟아졌다.
“녀석들이 제가 머물던 자취방을 급습했습니다.”
“조직 놈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미리 설치해둔 함정이 발동되었다. 그것 때문에 수오는 흑마법사 조직원들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수오가 미리 설치해둔 마법 부비트랩에 쓰러질 일은 없었다. 수오는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함정은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설치해놓은 게 아니었으니까.
위치 파악. 그것이 중요했다.
“아마 녀석들은 제가 드리무어 님 쪽으로 붙었다는 걸 알아냈을 겁니다. 조만간 이곳으로 올지도 모릅니다.”
“내 쪽에선 환영할 만한 일이군.”
흑마법사 조직 전원이 덤빈다 하더라도 필두는 두렵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전의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아직 그의 힘을 온전히 회복한 건 아니었다. 드리무어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몇 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악조건은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대등한 패널티를 안고 시작하니, 필두는 스스로 불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차하면.
‘내가 놈들에게 쓰러진다 하더라도 마일더가 뒷일은 알아서 책임져줄 거다.’
필두는 알고 있었다.
마일더가 레디너스 측과 통신을 주고받을 수단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작은 차원석의 존재를 필두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게다가 진수의 여자 친구인 소예나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도 사전에 다 파악했다.
소예나의 정체가 에리나라는 점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필두는 그녀가 레디너스에서 넘어왔다는 점, 그리고 마일더의 측근이라는 점 정도는 이미 눈치챈 지 오래였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주 간단한 일이다.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때에도 여자 보기를 엄하게 하던 마일더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여자 친구를 사귄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분명 무슨 뒷이야기가 있을 터.
필두와 수오처럼 마일더도 조력자가 최소 한 명 이상은 붙어 있다. 게다가 그들의 사이는 필두와 수오 같은 겉치레 관계와 다르게 돈독하다.
그 정도면 필두가 잘못된다 하더라도 마일더 선에서 충분히 정리 가능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흑마법사 조직은 아직 마일더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과정에는 필두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무슨 일이 발생할 때마다 필두는 마일더에게 나서지 말고 나 혼자 해결하겠다는 주장을 해왔었다. 유격 사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일더의 존재를 철저하게 감췄기에 보다 선택지가 많아졌다.
‘처음에는 마일더 녀석 때문에 신경 쓰이던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믿음직한 보험 수단이 되었다.
‘이것 또한 기구한 운명이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동안, 수오가 말을 이었다.
“동선을 따진다면 머지않은 시일 내에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순간이동을 사용해서 지금 당장에라도 올 수 있을 거 같지만, 그러진 않을 겁니다.”
“근거는 있나.”
“드리무어 님도 아실 겁니다. 제가 그 우두머리라는 자의 밑에서 일을 해봤었다는 사실을.”
“경험에서 우러나온 건가.”
“예, 그렇습니다.”
수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놈은 철두철미합니다. 감정을 앞세워 드리무어 님을 무작정 공격하진 않을 겁니다. 남한으로 넘어왔으니, 더욱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뒤를 칠 겁니다. 그게 놈의 무서운 점입니다.”
소름 끼치도록 냉정하다. 그것이 서수오의 의견이었다.
“녀석의 정체는 모르는가.”
“예. 조직원들끼리 부르는 방식도 제각각입니다.”
“그건 일전에 들어서 알고 있다.”
“대신, 최측근들은 그자를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수오가 또박또박 발음했다.
“카잔. 그게 우두머리 되는 자의 별칭입니다.”
“카잔이라…….”
들어본 적 없는 별칭이다.
하기야. 조금이라도 들어봤었더라면, 놈들을 찾는 데에 차원이동이라는 극단적인 수단까지 동원하진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정체를 감추고 활동했던 흑마법사의 존재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던 우두머리, 카잔.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필두답지 않은 약한 모습이었다.
흑마법사들과의 일전을 치르면, 필두가 무사히 생환할 확률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지지 않을 자신감은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선 확신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건 필두의…… 아니, 드리무어의 일이다.
‘레디너스에서 매듭짓지 못했던 일을 여기서 마무리하게 될 줄이야.’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복수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니까.
‘자, 와라!’
다시금 결심을 굳혔다.
* * *
개인정비 시간.
운동 이후 생활관으로 돌아온 진수의 시선이 TV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정말 별나게도 연예계 관련 프로그램이 아닌 뉴스로 채널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내용이 진수의 눈과 귀를 자극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시내 한복판에서 커다란 폭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경찰이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소득은 없습니다.
-또한, 사건이 발생한 뒤에 특이한 목격담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이 공중에 떠 있었다고 하던데요. 이런 목격담을 주장하는 주민이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폭발로 인해 발생한 연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폭발 장소에 의문의 화학용품이 다수 보관되어 있기래도 했던 걸까요. 이 때문에 단체로 환각을 본 게 아니냐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입니다.
‘사람이 떠다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말이 안 되는 걸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었다.
마법이다.
‘설마.’
진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후, 관물대에서 전화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전도혁 상병님. 저, 전화 한 통화만 하고 오겠습니다.”
“뭐야. 여자 친구한테 아양 떨러 가냐.”
“예, 그렇습니다.”
“……진짜냐.”
그 무뚝뚝한 진수가 아양 떠는 생각을 하니, 닭살이 절로 돋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 대화를 마친 진수가 예나에게 빠르게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신호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여보세요.
주변에서 엄청 큰 소음이 들려왔다.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주변이 너무 시끄럽군.”
-마, 마일더 님이십니까?
“어딘가, 거기.”
-죄, 죄송합니다. 대학 동기들과 술자리가 있어서 잠시 동석했습니다.
“죄송할 게 있나.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귀찮겠지만, 부탁 하나만 좀 해야겠다.”
-귀, 귀찮다니요! 전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나가 정색을 하며 부정했다. 그러나 그녀와 이런 사소한 실랑이 벌일 시간조차 아까웠다.
“뉴스를 검색해 보면 폭발 사건 하나가 검색될 거다. 목격자들이 사람의 형체 넷이 둥둥 떠다닌 걸 단체로 목격했다는 기이한 사건이니 금방 나오겠지. 그곳으로 가서 조사 좀 해줘야겠다.”
-어떤 조사입니까?
“나머지 흑마법사들의 소행인지, 아닌지에 관한 것만 알아내면 된다.”
-……!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예나였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 놈들의 목적은 이곳이겠지. 드리무어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으니까 난 당분간 계속 부대에 머물면서 사태를 지켜볼 것이다. 넌 현장 조사 이후에 한동안은 민혜정이라는 여자 곁에 붙어 있어라.”
-혜정 언니요?
“흑마법사 놈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이쪽에선 알 방법이 없지만, 현재 드리무어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게 민혜정이다. 만약 드리무어가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면…… 놈은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질 거야.”
두 번의 타락은 악인 이상의 것을 만들어낸다.
마일더는 더 이상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비극은 한 번이면 족하다.
두 번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