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58화
제40장. 탄피 찾기의 달인(1)
“결혼이라…….”
일단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저지르고 나니 금세 귀찮아졌다.
아직 혜정에겐 이렇다 할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필두는 그의 어머니에게도 혜정에게 괜히 오해 살 만한 발언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뒀다.
어머니도 필두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본래 청혼이라는 건 당사자가 직접 해야 하는 게 올바른 순서다.
제3자가 나서봤자 도움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일부러 방치를 택했다.
필두가 무엇을 선택하든, 어떤 방식을 택하든 믿기로 했다. 어차피 혜정은 필두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까.
미친 짓만 안 한다면, 웬만하면 두 사람의 결혼식은 성사될 것이다.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다.
“나중에 천천히 준비해야겠군.”
어차피 지금 당장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기에도 무리가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차근차근히 준비를 해두면 된다. 서두를 거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내가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면, 혜정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긴 한데.”
아마 깜짝 놀라지 않을까. 여성은 남성보다 감정이 풍부한 축에 속한다.
청혼을 보는 순간, 혜정이 펑펑 울면 어찌해야 할까. 그런 걱정도 내심 들었다.
여자의 눈물은 남자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제아무리 필두라 하더라도 연인이 눈물을 보이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문제는 참으로 복잡하다. 특히나 연애 관계라는 건 더더욱.
“머리 아프군.”
의자에 몸을 묻고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행보관실 바깥에선 간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격 준비, 다 끝났지?”
“예, 통제관님.”
“실탄 챙기고. 삼포 반장이 병사들 생활관에 대기시켜뒀다가 무전 오면 2개조씩 해서 사격장으로 올려보네.”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영내 사격이 있는 날이다.
실탄이 남아도는 덕분에 본의 아니게 한꺼번에 몰아 실사격 훈련을 진행해야 했다.
병사들 입장에선 오히려 땡큐였다. 하루 종일 뜨거운 무더위와 씨름하며 제초를 하느니, 그냥 사격 한 번 하고 쉬는 게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야간 사격도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사격만 주야장천 하다가 끝날 예정이었다.
그래서 필두는 병사들에게 오늘에 한해서 작업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부대 근처 진지를 좀 더 보수하고 싶었지만, 작업이라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이다. 훈련 일정과 맞물리게 되면 원하는 작업도 제때 시행하지 못하게 된다.
작업보다 훈련이 더 중요하다. 군인이니까.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행보관실을 나선 필두가 통제관을 불렀다.
“사격 언제 시작하나.”
“이제 곧 시작될 예정입니다. 본부 포대 사격 끝나면 바로 저희 시작할 겁니다.”
“아직 안 끝났나 보군.”
“예, 그렇습니다. 사격장 근처에 풀이 너무 많이 자라서 제초부터 먼저 하고 시작한다고 합니다.”
“미리미리 해뒀으면 좋았을 거늘.”
만약 사격장이 제1포대 담당 구역이었다면, 필두는 완벽하게 제초를 미리 해뒀을 것이다. 물론 그 반작용으로 예초병들은 거의 초주검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30분이 지난 후, 본부포대로부터 키가 걸려왔다.
“통신보안, 제1포대 병장 김조항입니다.”
당직병을 맡게 된 김조항이 대신 키를 받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키를 내려놓자, 통제관이 통화 내용을 들은 모양인지 먼저 말을 건넸다.
“본부포대 다 끝났대?”
“예. 이제 와도 좋다고 합니다.”
“1, 2조 방송으로 호출해서 사열대 앞으로 집합시켜.”
“예.”
제1포대가 끝난 이후에 제2포대까지 사격을 진행해야 하기에 가급적이면 빨리빨리 턴을 넘기는 편이 좋다.
안 그래도 제2포대 행보관은 필두를 라이벌로 의식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트집 잡을 만한 것이 생긴다면, 그는 끝까지 필두를 물고 늘어질 것이다.
사열대에 속속들이 모여드는 1, 2조. 명단을 확인한 통제관이 부사관들과 함께 이동 준비를 서둘렀다.
그 와중에 필두가 사열대에 등장했다.
“지금 출발하나.”
“예, 그렇습니다.”
“나도 같이 가자.”
“행보관님도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어차피 안전 통제하는 간부는 있어야 하니까.”
필두가 통제를 해준다면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훈련들은 그냥저냥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사격 훈련은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포병에게 가장 위험한 훈련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곡사포 실제 사격. 그리고 두 번째가 K-2 실제 사격 훈련이다.
가장 위험한 건 역시 포 실사격이지만, 후자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사상자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두는 스스로 안전 통제 역할을 자처했다.
괜히 방심하고 있다가 인명 피해라도 발생한다면 큰일이니까.
* * *
영내 사격장은 본부포대 뒤쪽에 있다. 산을 타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오르막길이 있어서 병사들의 숨을 헐떡이게 했다.
게다가 이 무더운 날씨에 방탄모, 탄띠까지 갖추고 가려니 땀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군대 날씨라는 말이 있는 만큼 이곳의 날씨는 좀 독특하다.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다. 유독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지에 대해선 병사들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군대에 있으면 그렇게 느껴진다. 마치 예비군이 전투복을 입었을 때, 기력이 빨리는 기분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이론이 아닐까.
“사격장 안전수칙 한 번 읽고서 사로 별로 입장한다. 알겠나.”
“예!”
넷포 반장의 말에 따라 병사 중 한 명이 사격장 안전수칙을 선창하고, 나머지가 후창을 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후 사로에 들어서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긴장감보다 ‘빨리 쉬고 들어가자’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1사로!”
“2사로!”
“3사로!”
병사들이 각자 자신의 사로를 외치며 사격장에 입장했다.
영내 사격장은 총 1사로부터 10사로까지 마련되어 있다. 휴가를 떠난 병력들을 제외하고 오늘 사격 훈련을 받기로 예정된 병사들의 숫자는 총 78명.
즉, 이 과정을 8번 반복하면 제1포대 주간 사격 일정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격은 무난히 진행되었다. 자대 전입한 지 100일조차 안 된 신병들도 꽤 많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미 훈련소에서 사격을 다 해봤기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훈련을 소화할 수 있었다.
필두가 우려했던 안전사고는 없었다.
주간 사격이 다 끝나자, 통제관이 마지막 7, 8조 인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각자 생활관으로 돌아가서 저녁 식사 집합 전까지 총기수입하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이 말을 듣고 싶었다.
총기수입 하라는 말은 곧, 시원한 에어컨 나오는 생활관으로 들어가서 얌전히 앉아 쉬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총기수입, 까짓것 대충 하면 그만이다. 손에 막 기름 묻혀가면서 정성 어린 손길로 총기수입을 하는 병사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야간에 또 사격이 있다는 점이다.
어차피 야간 사격 한 번 더 할 텐데, 굳이 여기서 열심히 총기수입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또 더러워질 텐데 말이다.
사격을 마친 뒤에 생활관으로 돌아온 병사들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하! 살 거 같다!”
“역시 여름은 에어컨이지!”
제초에 시달리던 병사들이 간만에 사격 훈련이라는 일정 덕분에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 이후 개인정비 시간이 없어진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일과 시간에 생활관에 앉아 쉰다는 것만으로도 어디인가.
두 발을 쭉 뻗은 채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 총기수입은 뒷전이었다.
전도혁이 기지개를 켜며 아쉬운 소리를 입에 담았다.
“이대로 샤워 한 번 딱! 하고 잤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행보관님이 난리 치실걸.”
“그게 무섭단 말이야.”
전도혁이 가장 무서워하는 간부가 강필두 아니겠는가.
안 그래도 필두한테 찍힌 마당에 그런 짓을 자행하면, 또 나무 아래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릴지도 모른다.
* * *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났음에도 병사들은 여전히 전투복 차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유는 야간 사격 때문이었다.
활동복 입고 사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병사들은 여전히 환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격 대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오대기가 된 기분이네.”
조연도가 한 말에 모두가 공감하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개인정비 시간에 전투복을 입고 있는 병사는 오대기나 외곽 근무 준비자 빼고는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전투복을 벗고 싶어 하는 병사들이었지만, 야간 사격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본부 포대, 제1포대, 제2포대 순으로 야간 사격이 진행된다. 제3포대의 경우에는 독립 포대이기 때문에 알아서 자체적으로 사격을 거행한다.
제3포대는 9090대대 본대처럼 순차적으로 차례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기에 사격 훈련이 있을 때에도 금방 끝이 난다. 한편으로는 그 점이 부럽기도 했다.
오전 7시가 되어도 해는 저물지 않는다. 본래 여름이라는 게 그럴 때니까 말이다.
8시 반 정도가 되어서야 병사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 2조부터 출발한다. 앞으로 갓!”
통제관의 말에 따라 병사들이 힘찬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필두가 동행할 예정이었다.
영내 사격장은 수풀에 둘러싸여 있었다. 덕분에 밤이 되니 벌레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나 모기! 앵앵거리는 소리만으로도 병사들을 괴롭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격 후딱 하고 들어가자.”
“예!”
통제관도 병사들의 고충을 잘 아는지 빠른 진행을 요구했다.
“준비된 사수로부터 사격 개시.”
타아앙!
병사들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어차피 표적은 보이지도 않는다. 어떤 병사는 연발로 놓고 막 갈겨대기도 했다.
총알만 소비하면 된다. 그래서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사격이 진행되었다.
마지막 7, 8조가 사로에 들어서 방아쇠를 당겼다.
“전 사로 사격 끝.”
이로써 제1포대 사격은 끝났다.
“아, 빨리 샤워나 하러 가야겠다.”
“몸이 엄청 찐득거립니다.”
“땀났으니까 그렇지.”
총을 놓고 잠시 뒤로 물러선 병사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찬물 샤워다. 온몸으로 흠뻑 젖은 지금의 이 상태가 영 찝찝했다.
빨리 막사로 내려가서 샤워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러나 그 소망은 갑작스레 발생한 사건 때문에 이뤄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통제관님!”
1사로 측에서 번쩍 손을 들었다.
“뭐야. 왜 그래.”
“크, 큰일 났습니다!”
하나포 반장이 말을 더듬었다.
이번에 또 무슨 일이 발생했기에 그러는 걸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렸을 때, 하나포 반장이 기절초풍할 만한 발언을 들려줬다.
“탄피 하나가 모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