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50화 (150/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50화

제36장. 제초의 계절(3)

위이이이이잉!

오늘도 마음 편히 제초 작업에 돌입하는 나정상 병장.

땡볕 아래임에도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멀쩡했다.

웬만한 병사들은 이 더위는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정상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위에 굉장히 강한 체질이다. 그래서 동복 긴팔, 긴바지 활동복을 입고 있음에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나, 나정상 병장니이이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도혁의 비명소리에 나정상이 잠시 예초기를 껐다.

“뭐야. 왜 그……!”

물어보고 자시고도 없었다.

전도혁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바로 상황 파악이 됐다.

수많은 벌이 도혁을 쫓아오고 있었다!

“너, 너너너! 벌집 건드렸냐?”

“버, 벌집 같은 건 안 보였습니다!”

하기야. 저 정도 숫자의 벌들이 모여 있는 벌집이라면 분명 눈에 확 띠였을 터. 그럼에도 포상을 자주 들락날락하는 병사들조차도 벌집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

여하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애들아! 튀어라!”

나정상이 헐레벌떡 포상 아래로 내려와 외쳤다. 처음에는 왜 나정상이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이내, 전도혁의 뒤를 바짝 따라오는 벌들을 보자마자 상황 파악이 완료되었다.

“저 미친 자식! 이쪽으로 오지 마!”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

벌떼 앞에서 전우애고 뭐고 없었다. 그러나 전도혁의 도망치는 방향은 병사들이 있는 쪽이었다.

“왜 이쪽으로 와!”

“도망갈 곳이 여기밖에 없지 않습니까!”

졸지에 다 같이 쫓기게 된 하나포 병사들과 예초병 3인방. 무더위에도 땀을 흘리지 않기로 유명한 나정상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한편, 하나포 포상에서 발생한 소란을 듣고 병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니, 근처에 접근 불가였다.

“버, 벌 떼?”

“행정반에 가서 알려!”

“예, 알겠습니다!”

불행하게도 부대 근처에는 우물이라든지 그런 게 없었다. 있기라도 했다면 그곳으로 바로 다이빙을 했을 테지만,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막사 안으로 들어가면 더 큰일이다. 마땅히 도망칠 곳도 보이지 않아 그저 시간 벌이용으로 도망만 다닐 뿐이었다.

하나포 인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초기를 든 예초병 3인방은 죽을 맛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진수가 있었더라면 벌떼 정도는 우습게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진수는 현재 외곽 근무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들에게는 정말 운이 지지리도 없는 셈이었다.

한편, 둘포 병사의 보고로 행정반에 있던 간부들이 하나포 포상 쪽으로 달려 나왔다.

“우왓, 저게 뭐야?”

하나포 반장이 기겁을 했다. 부하들이 벌떼에 쫓기고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마땅한 조치는 없었다.

점점 떨어지는 체력. 그들의 운도 여기까지인 걸까.

하나 이들에게 구세주가 강림했다.

“너희들, 멀리 떨어져 있어라.”

주변에서 대기 중인 간부와 병사들에게 경고를 날린 행보관, 강필두가 하나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운이 좋게도 필두가 행정반에 있었다. 벌떼에 쫓기는 이들에겐 천운이었다.

뒤늦게 필두의 등장을 확인한 병사들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해, 행보관님! 어찌해야 합니까?”

“계속 도망 다니기도 힘듭니다!”

“그러니까 왜 벌집을 건드렸냐.”

쓴소리를 들려주기보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편이 더 좋아 보였다.

‘뒷수습하는 건 맨날 내 일이군.’

그게 행보관의 운명 아닐까.

호흡을 내쉰 필두가 재빠르게 움직이며 벌떼들 앞에 섰다.

작은 벌들이라 할지라도 다수가 한꺼번에 뭉쳐 있으면 상당히 위협적이다.

그러나 필두에게 두려움이란 없었다.

모아뒀던 마나를 한꺼번에 방출시켰다. 매서운 기세로 병사들을 쫓던 벌떼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곤충이라 그런 걸까. 필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기운을 쉽사리 감지했다.

그에게 접근하면 안 된다! 위험한 생물체다!

본능이 그렇게 경고했다.

위이이이잉!

벌들이 뒤를 돌아 그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향했다. 하나포 포상으로 향한 벌들이 조금 전, 도혁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나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벌집이라 부를 만큼 눈에 확 띄는 것도 안 보였다.

천천히 포상 쪽으로 걸어간 필두가 이내 벌들의 소재지를 파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여기였군.”

땅 속에 파묻혀 있었다.

이제야 벌의 정체가 땅벌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도혁이가 예초할 때 벌들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거군.”

그래도 여기서 벌집이 무럭무럭 크는 걸 방치시킬 순 없었다. 하나포 포상은 병사들의 출입 빈도가 잦은 곳이다. 가만히 놔두게 되면 분명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땅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곳 근처에 오른손을 올려놓은 필두가 작은 기합을 내질렀다.

“흡!”

그의 외침에 바로 아래의 땅이 움푹 가라앉았다.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벌들도 잠잠해졌다. 필두의 일격 한 방에 벌들이 그대로 운명을 달리했다.

다시 포상 아래로 내려온 필두가 병사들의 안위를 살폈다.

“다친 사람들 있나.”

“어, 없습니다.”

“멀쩡합니다!”

“그보다 벌은…….”

아직도 벌 공포에 시달리는 모양인지 병사 몇몇이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해결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벌집하고 벌들은 다 제거했으니 조금 쉬었다가 다시 예초 작업 들어가라.”

“예, 알겠습니다!”

필두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렇게 벌떼 소동은 필두의 활약으로 순식간에 정리될 수 있었다.

* * *

오전, 그리고 오후 내내 여섯 개의 포상을 돌며 제초 작업을 진행한 예초병들.

이미 체력은 방전되었다.

“아, 죽겠다.”

제1포대에서 체력, 근력 면에선 나름 한 가닥 한다는 전도혁조차도 예초병 생활에는 GG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섯포 포상 위에 누워 대(大) 자로 뻗은 전도혁과 한정욱. 이들 곁에 나정상이 다가왔다.

“자, 이거 한 잔씩 마셔라.”

“이게 뭡니까?”

“오렌지 주스. 땀 흘렸을 때 주스만 한게 없지.”

“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이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나정상은 PX에 들려서 음료수들을 조달해 왔다.

현재 시각, 17시 10분. 식사 시간까지 채 1시간도 남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리 막사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일 같은 건 예초병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일과 시간 꽉 채워서까지 제초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선 할당된 작업량을 채울 수가 없다.

이건 필두가 일을 막 시켜서 그런 게 아니다. 제1포대 주변을 고작해야 단 3명의 예초병이 돌면서 제초를 해야 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라도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제대로 된 제초를 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군대에서 자라는 잡초들의 생명력은 말도 못하게 강한 덕분에 제초하고 제초해도 비 한 번만 오면 다시 원상복구가 된다. 그래서 더더욱 힘들다.

“어떠냐. 오늘 첫 제초한 소감이.”

“죽을 맛입니다.”

“처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전도혁의 소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기야. 그라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아까 땅벌 무리를 잘못 건드린 덕분에 정말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발생했다. 만약 필두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전도혁은 군 병원에서 이번 여름을 보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전도혁에게 나정상이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아, 아닙니다. 그보다 예초병이 진짜 힘든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작년에 봤을 때에는 망고 작업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지.”

나정상도 도혁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남들 고된 작업할 때, 우리 예초병들은 예초기 들고서 슥슥 할 뿐이니까. 근데 보기와는 다르게 힘들지. 다른 녀석들은 그걸 몰라준다니까.”

그대로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원샷했다.

“푸하! 주스 맛 죽이네!”

“나정상 병장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응? 뭐가.”

“남들이 망고 빤다는 시선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도혁은 나정상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서로 다른 분과였기에 자주 마주칠 일도 없었다. 기껏해야 외곽, 불침번 근무를 설 때에나 둘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별로 기회가 없었다.

“딱히. 남들에게 내 고충을 알아달라고 하는 짓도 구질구질한 거 같고. 그리고 군대 법칙이 있지 않냐.”

“법칙?”

“만사 다 재치고 내가 나온 부대, 내가 했던 일이 무조건 가장 힘들고 괴롭다는 거 말이야.”

“하하! 그건 저도 공감합니다.”

대화에 직접 참가하진 않았지만, 한정욱도 정상의 말에 공감하는 모양인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무튼 그런 거지. 그리고 예초병이 딱히 나쁘진 않아. 작업 빨리 끝내면 그만큼 쉴 수도 있고. 오늘은 벌떼 사건 때문에 작업이 많이 지체돼서 그렇지, 너희가 좀 숙달되면 오늘처럼 고생하는 일도 사실 드물어.”

상반신을 일으킨 한정욱이 도혁을 대신해 물었다.

“그날이 언제쯤 올 거 같습니까?”

“최소 한 달?”

“너무 멀지 않습니까?”

“정욱아. 우리의 여름은 이제 막 시작된 거나 다를 바 없어. 아직 여름은 길다고.”

그의 말대로 여름은 길다.

아직 제대로 된 여름은 시작도 안 됐다.

* * *

정상이 예고했던 대로 한 달이 넘어갈 때 즈음이 되니 두 신입 예초병은 이제 1인분은 확실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포상 정리 이후에 막사 주변, 이제는 탄약고 근처까지 도달한 예초병들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탄약고로 올라온 정상이 도혁과 정욱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산이니까 저번처럼 벌 건드리지 말고. 그리고 뱀 나올 수 있으니까 신경 잘 써라.”

“예, 알겠습니다!”

선임답게 딱딱 알아서 지시를 내렸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필두가 손 그늘을 만들어 탄약고 초소 주변을 훑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초록색밖에 없군.’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때의 시절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그땐 그랬지’라는 감상에 젖을 무렵, 전투복 상의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진동 주기로 보아선, 문자 메시지가 아닌 전화 통화로 보였다.

통화를 걸어온 상대방을 확인하자마자 필두의 얼굴이 굳었다.

서수오였다.

“무슨 일이지?”

곧장 용무부터 물었다. 통화는 짧고 간결하게. 괜히 길게 이야기를 끌었다가 흑마법사 조직에게 서수오의 소재지가 탄로 날 가능성이 있다.

그 위험성을 알고서도 전화를 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성공했습니다.

“성공? 무엇을 말이냐.”

-설마 잊었습니까. 예전에 저한테 지시 내린 그거 있지 않습니까.

“아, 그거군.”

이제야 떠오른 모양인지 아는 척을 해왔다.

짧은 한숨을 내쉰 수오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입대 날짜가 결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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