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48화 (148/175)
  •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48화

    제36장. 제초의 계절(1)

    먼저 손을 든 전도혁. 그의 적극성에 다시금 병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예초병이 힘들다고는 하나, 장점도 분명 있다.

    다른 거 필요 없이 그냥 제초만 하면 된다.

    제초 자체가 힘든 일이지만, 여름에는 제초 작업보다 더 힘든 작업이 가끔 발생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진지공사다.

    여름에는 무너진 호를 보수한다고 땅을 까고, 모래주머니를 만들고, 쌓고. 이 작업을 계속 반복한다.

    한 마디로 그냥 쌩 노가다라고 보면 된다.

    그거 한 번 거치면 땀으로 인해 상의뿐만 아니라 바지 끝자락까지 다 젖을 정도였다. 그만큼 빡센 작업이라 할 수 있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그냥 제초기 들고 제초 작업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아니, 실제로 그런 의견이 대다수였다.

    게다가 제1포대 행보관이 누구인가. 지금은 국민 행보관이라 불리지만, 한때는 악마 행보관이라 불렸던 강필두 아닌가.

    지금도 작업에 대해선 그의 악마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한여름의 진지공사는 이미 지옥으로 낙인찍혔다. 뿐만 아니라 예정된 대작업들이 몇 개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것들을 피하려면 예초병이 답일지도 몰랐다.

    전도혁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어느 게 더 빡센지 이미 계산을 끝냈다. 잔머리의 황태자, 전도혁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 힘들다는 예초병을 일부러 지원했을 리가 없다.

    전도혁이 먼저 스타트를 끊자, 다른 병사들도 우후죽순 손을 들기 시작했다.

    “상병 김태오!”

    “일병 서진태!”

    “병장 한우리!”

    이들을 포함해 대략 20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예초병을 지원했다.

    상당히 포대 인원의 5분의 1가량이 지원한 셈이었다. 상당히 많은 양이다.

    그러나 예초병은 고작해야 단 두 자리! 10대 1의 경쟁률을 뚫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원이 너무 많군.”

    필두가 생각했던 기준을 훨씬 넘었다.

    “분대장들이 예초병 하고 싶은 병사들 이름 적어서 취침시간 전까지 행정반으로 가져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점호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할 말을 끝낸 뒤에 곧장 행정반으로 돌아갔다. 이후, 분대장들이 순서대로 행정반을 방문하며 당직에게 종이를 전달했다.

    “행보관님. 예초병 지원자들 명단 뽑아봤습니다.”

    “수고했다.”

    명단을 건네받은 필두가 이들의 이름과 소속을 쭉 훑었다.

    분과 중에서 가장 적은 지원자 숫자는 하나포. 전도혁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하나포는 이번 사건 덕분에 4박 5일 포상휴가증을 두 장이나 챙겼다. 그러니 휴가에 대해선 딱히 미련이 없을 터.

    ‘전도혁이 예초병을 지원했다는 건, 이 녀석은 휴가를 분배 못 받았다는 뜻이군.’

    아니면 본인이 알아서 양보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건 하나포 내부 사정이었기 때문에 필두로선 섣부른 추측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머지 분과들은 최소 2명 이상의 지원자 숫자를 기록했다.

    도합 22명. 상당히 많은 숫자다.

    ‘11대 1이라. 빡세군.’

    몇 없으면 그냥 필두가 ‘너, 예초병 해라.’라고 강제 지목하면서 끝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22명이나 되다 보니 멋대로 그렇게 하기도 힘들었다.

    ‘귀찮지만 어쩔 수 없군. 확실한 수단을 거치는 게 좋겠지.’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귀찮을 뿐.

    * * *

    다음 날 오전.

    작업을 배정받기 위해 병사들이 사열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집합을 완료한 이들 앞에 마주 선 필두가 작업 분배 이전에 별도의 전파사항을 들려줬다.

    “어제 예초병 하고 싶다던 병사들, 거수.”

    21명의 병사가 손을 들었다. 한 명은 현재 외곽 근무 중. 근무자까지 포함하면 22명, 딱 맞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원자가 너무 많다. 2명 뽑겠다고 나머지를 이유 없이 쳐내는 것도 외관상 안 좋을 거 같아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필두가 꺼내든 필살의 카드. 그것은 병사들을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금부터 22명을 대상으로 면접을 볼 거다.”

    이름하야 예초병 오디션이다.

    “행정반에서 이름을 호명할 거다. 본인의 이름이 나왔다 하면 하던 작업을 마치고 바로 행정반으로 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면접관은 나와 전포대장님, 이렇게 둘이서 참가할 거다. 각자 ‘내가 반드시 예초병이 되어야 하는 이유’ 같은 걸 머릿속으로 구상해놓고 있어라.”

    면접을 보겠다는 선언을 마친 뒤에 다시 행정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루, 행보관실은 필두가 언급한 대로 일일 면접실로 사용될 것이다.

    자리를 잡은 전포대장이 22명의 개인 신상명세서를 살폈다.

    “엄청 많네요. 예초병이 원래 이렇게까지 인기 있는 작업병은 아닌데.”

    “아마 저 때문에 그럴 겁니다.”

    “행보관님 때문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지공사 시즌도 껴 있고, 해야 할 작업들이 산더미지 않습니까. 제가 작업 빡세게 시킨다는 건 이미 병사들도 다 알 테고. 한 여름에 고생하기 싫으니까 일부러 제초 쪽을 노리는 거 같습니다.”

    “아, 생각해 보니 말 되네요.”

    전포대장이 봐도 필두의 작업 지시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병사들이 작업하는 걸 볼 때마다 전포대장은 본인이 병사가 아닌 간부라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매번 가졌다.

    만약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입대했다면, 지금쯤 필두의 밑에서 굴렀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절로 소름이 끼쳤다.

    잠시 다른 생각을 품는 사이에 행보관실의 문이 열렸다.

    “충성!”

    행보관실을 찾아온 반가운 손님.

    첫 번째 면접자, 전도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앉아라.”

    “예!”

    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얌전히 착석했다.

    동시에 필두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예초병을 하고 싶은 이유가 뭐지?”

    “휴가 얻고 싶어서입니다!”

    참으로 솔직한 발언이었다. 너무 솔직해서 그런지 전포대장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했다.

    “얌마. 아닌 척이라도 좀 하지 그러냐.”

    “솔직함이 제일이라 배웠습니다!”

    전포대장의 말에도 도혁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필두는 오히려 이런 태도가 더 좋았다. 제초에 큰 뜻을 품고 있다든지, 병사들의 고충을 대신 떠안고 싶다든지 하는 그런 사탕발림 같은 발언보다 도혁의 사이다 발언이 더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필두도 다 알고 있다. 병사들이 무엇 때문에 예초병을 하고 싶다는 것을.

    그래서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내가 행보관인 이상, 날로 먹는 예초병이라는 말은 없을 거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필두가 이렇게 말해도 내심 도혁은 이런 생각을 했다.

    다른 작업보다야 쉽지 않겠나.

    도혁은 예초병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예초병들이 하는 걸 어깨너머로 본 게 고작이다.

    떡볶이라 불리는 옛 활동복을 입고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예초기를 들고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예초병들의 모습은 제3자가 보기엔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 여름에 두터운 긴팔과 긴바지를 입은 채 무거운 예초기를 들고 다녀야 하는 것만으로도 고충이다. 그것이 예초병의 힘든 점 중 하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런 단점들이 4박 5일 포상휴가와 필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메리트를 앞서진 못했다.

    이득과 손해를 따져봤을 때, 22명의 병사는 예초병을 하는 게 좋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는 전도혁에게 필두가 마지막 발언의 기회를 줬다.

    “끝내기 전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라.”

    “예초병! 꼭 하고 싶습니다!”

    예전의 모 CF 광고가 떠오르는 발언이었다.

    짧고 강한 이미지를 심어준 채 퇴장하는 전도혁. 그가 행보관실을 나서자 전포대장이 미처 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도혁이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걸 보여주는 게 참 오랜만입니다.”

    “그렇습니까.”

    “이것도 다 행보관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냥 본인의 노력이죠.”

    정확히 따지자면 멧돼지 덕분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았다.

    * * *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면접은 필두 입장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가장 짜증이 나는 건 이것 때문이었다.

    “별로 큰 성과는 없군요.”

    22명의 모든 병사를 면접한 결과가 이거였다.

    예초병에 특화된 병사는 찾기 힘들어 보였다. 좋게 말하자면 누굴 시켜도 잘할 거 같다. 나쁘게 말하자면 그놈이 그놈이다.

    하기야. 사회 생활할 때 누가 예초 경험을 해봤겠는가. 애초에 뭔가 좀 건질 줄 알고 기대했던 필두의 잘못이 컸다.

    “그래도 골라야지요. 행보관님은 누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까?”

    “좀처럼 떠오르지 않습니다.”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그냥 22명 이름 적은 종이를 박스에 넣은 다음에 제비뽑기 식으로 골라도 괜찮을 듯해 보였다.

    그때 전포대장이 사견을 보탰다.

    “그러면 한 자리는 하나포 주는 게 어떻습니까.”

    “이유가 있습니까?”

    “이번에 하나포 애들이 공 많이 세우지 않았습니까. 시민의 영웅들이라고 하던데. 포상이라 생각하시고 2명 중 한 명은 하나포로 고르시는 게 어떨까요.”

    하나포에서 고른다면, 전도혁밖에 없었다.

    전도혁은 체력도 좋고 근력도 괜찮은 편이다. 무거운 예초기를 들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녀도 별 무리 없어 보였다.

    그리고 명분도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명은 도혁이로 고르겠습니다.”

    “다른 한 명은 행보관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냥 무작위로 뽑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사실 저도 딱히 누굴 뽑고 싶다든지 하는 느낌은 거의 못 받았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하겠습니다.”

    제초와의 전쟁에서 대활약을 펼칠 에이스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 * *

    예초병으로 선정된 두 명의 인원.

    한 명은 전도혁,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한정욱 일병이었다.

    행정반으로 불려 온 두 사람은 통제관으로부터 예초병이 되었음을 직접 구두로 통보를 받았다.

    “행보관님이 신중에 신중을 기해 임명한 거니까 잘해라.”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중을 기해 선별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한 명은 하나포의 공로를 인정받아 뽑은 거고, 나머지 한 명은 정말로 제비뽑기를 해 뽑았다.

    전자가 전도혁, 후자가 한정욱이었다.

    그렇다고 ‘너희, 제비뽑기로 뽑았으니까 잘해라.’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형식상으로나마 이렇게 말을 해두는 편이 이들에게 책임감을 가지게 해준다.

    “어디 보자. 다른 한 명은 누구였지.”

    통제관이 또 다른 예초병을 찾았다.

    예초병 3인방 중 유일하게 경력자 취급을 받는 예초병.

    “충성! 병장 나정상.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아, 맞다. 너였지.”

    통제관이 나정상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도혁이하고 정욱이가 이번에 새로 선별된 예초병들이다.”

    “그렇습니까.”

    “잘 가르쳐라. 특히 정욱이는 내년에도 예초병 해야 하니까 인수인계 잘하고.”

    “예, 알겠습니다.”

    나정상의 눈이 두 사람의 전신을 훑었다.

    예초병의 포스가 마구 품겨지는 그. 바로 근처에만 가도 풀냄새가 절로 났다.

    ‘이것이…….’

    ‘……예초병의 삶이구나!’

    긴장감에 못 이겨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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