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43화
제35장. 분과 외박(1)
지옥 같았던 유격 복귀 행군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의 얼굴은 피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벽 6시. 이미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시간임에도 이들은 아직까지 잠들지 못했다.
강단 위에 올라선 대대장이 병사들을 한 명 한 명 훑었다.
“피곤한가?”
“아닙니다!”
“목소리에 힘이 없는 거 보니 피곤한 거 맡나 보군.”
“아닙니다!”
병사들이 더 큰 목소리를 냈다.
유격 훈련의 효과 때문일까.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커진 느낌이다.
그제야 대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도를 표했다.
“복귀 행군, 정말 수고 많았다!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전원 무사히 유격 훈련을 마쳤다는 점에 이 대대장은 참으로 기쁘다!”
입소 행군부터 시작해서 유격 훈련, 그리고 복귀 행군까지.
대대장의 말마따나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다. 이 통계가 대대장을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오늘 하루는 확실하게 휴식 보장해 줄 터이니 들어가서 샤워하고 푹 쉴 수 있도록!”
“예!”
“감사합니다!”
“각 포대장들은 병사들 인솔해서 막사로 복귀해.”
“네!”
드디어 휴식이다!
이 얼마나 기쁜 순간이란 말인가.
전방 포대인 제3포대를 제외하고 본부포대와 제1포대, 제2포대는 각각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집 왔다!”
“와, 진짜 개 힘드네.”
“보일러 틀었으니까 샤워하실 분은 샤워하시기 바랍니다.”
공병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사들이 곧장 샤워 준비를 서둘렀다.
야간 행군 이후라 그런지 전투복 상의에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게다가 유격 훈련 동안 제대로 된 샤워를 하지 못했다. 온몸에 좔좔 흐르는 땟물이 최악의 위생 상태를 나타내는 듯했다.
샤워실로 우르르 몰려가는 병사들. 그 와중에 고명전과의 샤워 시간은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포대장은 전포대장과 부사관들을 모아 따로 대대장의 말을 전달했다.
“대대장님께서 오늘 하루는 별다른 지침사항 없을 거라고 했으니, 당직사관하고 오대기 소대장 뺀 나머지 간부들은 퇴근해도 좋다.”
“아놔, 왜 하필이면 이때 오대기지…….”
하나포 반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는 유독 오대기 운이 없기로 소문이 자자한 간부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모두가 공평한 상황에서 로테이션을 돌렸는데, 하나포 반장이 지정되었으니 말이다.
“당직사관은 누구지?”
포대장의 물음에 통제관이 대표로 답했다.
“아직 안 정해졌습니다.”
“그런가.”
당직사관을 따로 뽑기도 전에 필두가 먼저 자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행보관님이요?”
“행보관님 피곤하실 텐데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제가 하겠습니다. 행군도 동참하셨는데 어떻게 당직사관까지 떠넘길 수 있겠습니까.”
통제관을 비롯해 전포대장, 통신반장 등 간부들이 나서서 당직사관을 자처했다.
그러나 필두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안 그래도 밀린 업무도 있고 하니까요. 그거 처리할 겸해서 제가 남아 있는 게 더 효율적일 거 같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포대장이 재차 필두의 의사를 확인했다.
번복할 이유는 없었다.
“예. 괜찮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기도 하니, 그때 푹 쉬면 될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행보관님만 믿겠습니다.”
훈련이 끝난 뒤가 부대가 가장 어수선하다. 하필이면 오늘, 포대장은 오늘 당직사령을 맡아야 했기에 포대를 지킬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 상황에서 넘버 2라 할 수 있는 필두가 부대에 남아 중심을 지켜준다면, 이만큼 든든한 일도 없을 것이다.
필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가 당직을 맡아준다면야 포대장은 땡큐였다.
이렇게 해서 필두가 당직사관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간부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올랐다.
필두도 잠시 샤워를 하기 위해 관사에 들리기로 했다.
이동하던 도중에 그의 스마트폰이 매섭게 울렸다.
“또 그 녀석인가.”
필두가 말하는 ‘그 녀석’의 정체는 한 명밖에 없다.
서수오. 얼마 전에 필두를 습격했던 흑마법사다.
그러나 액정 화면에 새겨진 이름은 수오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여보세요, 필두 씨? 훈련 다 끝났어?
필두의 연인, 민혜정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여인의 고운 음성에 필두의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어. 이제 끝났어.”
-고생했어. 유격 훈련, 엄청 힘든 거라며?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
“당직사관 때문에 지금 당장은 좀 힘들 거 같군.”
-당직? 필두 씨도 참…… 운 없네. 왜 하필이면 훈련 끝나자마자 당직에 걸리고.
만약 필두가 자처해서 당직사관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면 혜정이 분명 쓴소리를 할 것이다.
나이도 가장 많으면서 왜 일부러 힘든 일을 자처 하냐고 말이다.
너무나도 예상 가능한 반응이었기에 이런 건 빼놓기로 했다.
“그보다 무슨 일이지? 급한 용무라도 있나.”
-아니. 그런 건 없고, 그냥 필두 씨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훈련 동안 통화도 못했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혜정한테 웬만하면 훈련 기간 때에는 전화하지 말라고 했었다.
혜정도 남자친구가 일하는데 괜히 자신이 방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필두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듣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유격 훈련 때 일부러 통화를 먼저 걸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필두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이다.
-필두 씨, 내일 시간 돼?
“시간이야 되긴 하지만, 근무 휴식해야 하는데.”
-맞다, 그랬지…….
혜정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남자친구가 유격 훈련을 마치고, 그 이후에 밤을 지새우며 당직까지 섰는데 데이트를 하자고 조를 수도 없었다. 그건 염치없는 일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러나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스마트폰을 통해서 전달되는 아쉬움이 필두의 마음을 움직였다.
“알았어. 내일 당직사관한테 좀 더 일찍 나와 달라고 할 테니까 저녁 즈음에 만나기로 하자.”
-아, 아니야. 괜찮아. 필두 씨 많이 피곤할 텐데 무리 안 해도 돼.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
점점 혜정의 존재감을 인정해가기라도 하는 걸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혜정뿐만이 아니었다.
필두도 미약하게나마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먼저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필두의 모습에 혜정이 다시금 정말로 괜찮겠냐는 질문을 해왔다. 그녀에게 들려줄 대답은 오로지 오케이밖에 없었다.
-그럼…… 알았어. 같이 만나서 저녁 먹자. 필두 씨 피곤해할 테니까 내가 차로 마중 나갈게.
운전은 자신이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혜정도 나름 괜찮은 운전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녀에게 맡겨도 충분할 정도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그럼 내일 봐, 필두 씨.
예전에는 혜정과 만나는 일을 시간 낭비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뭐랄까. 필두가 악인이긴 하나, 그도 결국은 사람이다. 필두를 좋아해 주는 사람과 같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면 필두도 절로 마음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혜정의 활기참은 필두에게 많은 활력을 전달해 준다. 내일 혜정과의 만남이 자연스레 기대되었다.
‘그전에 할 일은 해야지.’
행보관으로서 주어진 업무에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제아무리 훈련 이후의 어수선한 때라 하더라도 괜히 업무 가지고 트집잡히는 건 원치 않기 때문이다.
파견을 나온 타 부대 병사들이 외곽 근무를 대신 서주는 시간은 오후 3시까지다. 그 이후부터는 다시 9090대대 병사들이 근무를 나서야 한다.
“당직. 근무자들 잊지 말고 깨워서 근무 보내라.”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취침에 들고 나서야 끝나게 된 유격 훈련.
큰 훈련이 끝난 덕분일까. 필두에겐 아쉬움이 많이 남는 훈련이기도 했다.
그가 아쉬워할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다음에는 내가 직접 뛰고 싶군.’
행보관이라는 지위 때문에 직접 유격 조교도 못해봤다.
유격 훈련을 받는 동안 진수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일더처럼 병사로 환생하고 싶진 않았다.
이래나 저래나 결국 간부가 더 좋다. 괜히 마일더와 입장이 뒤바뀌었다가 무슨 낭패를 볼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하다못해 하사 정도만 되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 * *
퇴소식이 진행될 때, 유격 훈련에 관련해 여러 가지 포상 내역이 있었다.
유격에서 최우수 성적을 거둔 병사, 그리고 분과에게 포상이 주어졌다.
최우수 성적을 거둔 병사, 즉 유격왕이라는 별칭을 받게 된 병사에겐 4박 5일 포상휴가를. 그리고 최우수 성적을 거둔 분과에게는 분과 외박이 수여될 예정이었다.
퇴소식에서 유격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병사는 제1포대의 고명전이었다.
휴가를 받자마자 한 말이 꽤 인상적이었다.
이성준을 만나러 가겠다. 그 말은 곧, 필두의 소환수인 인큐버스를 만나고 싶다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이는 필두밖에 없었다. 인큐버스의 고생을 알아주는 이도 필두밖에 없을 것이다.
최우수 분과를 차지한 곳 역시 제1포대였다.
김조항이 이끄는 하나포가 분과 외박 포상을 얻게 되었다.
오침 시간이 끝난 이후, 필두는 조항을 따로 호출했다.
“병장 김조항!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잠은 잘 잤냐.”
“예.”
“다름이 아니라, 너희 분과 외박 때문에 불렀다.”
조항도 대충 그럴 거라 예상했었다.
펜대를 굴리던 필두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분과 외박, 내일 바로 나가게 해주마.”
“내일 말씀이십니까?”
“원하는 날짜라도 있나?”
“아닙니다. 내일이 좋을 거 같습니다.”
유격훈련 끝나자마자 바로 분과 외박을 나가는 꼴이었다.
그러나 조항은 이만한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주에는 진수가 조교로 받은 포상 휴가를 쓸 예정이고, 그다음 주에는 도혁이, 그 바로 다음 주에는 정성태가 부대를 비우게 된다.
이후에는 연도의 일병 정기 휴가도 있고, 두 신병의 위로 휴가도 기다리고 있다. 하나같이 전부 다 4박 5일 이상의 휴가들뿐이었기 때문에 거의 주말은 다 끼고 나간다 봐도 무방했다.
이번 주를 놓치면 분과 외박 타이밍을 잡을 수 없게 된다. 미루고 미루다 보면 짬 처리 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기왕 사용할 거, 빠른 시일 내에 사용하는 것이 좋았다.
필두도 그게 나아 보였다.
“하나포 이번에 면회 일정 잡혀 있는 병사는 없겠지.”
“예. 보고받은 건 없습니다.”
“포대장님한테는 내가 말해놓을 테니 내일 아침에 분과 외박 준비하도록. 아침 땡 하자마자 바로 보내주마.”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안 그래도 유격 때문에 병사들의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바깥 공기도 좀 마시면서 피로도 풀고, 그리고 분과 단합력도 높이고. 얼마나 좋은가.
‘가서 계획 좀 짜야겠는걸.’
놀 계획을 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한정된 시간 내에서 최대한 효율적인 즐거움을 뽑아내는 일 아니겠는가.
모처럼 접하기 힘든 기회인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