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40화
제34장. 공포의 유격(7)
취침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
유격 조교들이 머무는 막사 생활관을 순찰하던 불침번이 하품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졸려 뒈지겠네.”
낮에는 유격 조교로, 밤에는 불침번으로 활동하려니 피곤이 몰려왔다.
어차피 당직사관도 코까지 골며 자고 있지 않은가.
“나도 좀 앉아 있을까.”
제3포대 병사들이 머무는 생활관으로 돌아와 마룻바닥에 걸터앉았다.
본래 인간이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게 마련이다.
점점 감기는 눈. 오늘따라 유독 눈꺼풀이 무겁다.
“이상하네. 아까는 이렇게 안 졸렸는…….”
말을 하는 도중에 매트리스 위로 털썩 쓰러졌다.
동시에 두 사람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인혁과 서환이었다.
“잠들었어?”
서환의 물음에 인혁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대로 재웠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실력 안 죽었네.”
“이 정도는 기본이지.”
애초에 마나를 감지할 줄 모르는 일반인을 상대로 수면 마법을 거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웠다.
활동복 차림의 인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투복으로 환복하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웬 전투복이냐.”
“한번 입어보고 싶었다.”
이상한 쪽으로 호기심이 발동했다.
겉모습은 이인혁이지만, 속내는 장호일이다.
서환도 마찬가지다. 호일과 같이 수오가 서환으로 변장을 했다.
본래의 이인혁과 서환은 지금, 산 뒤쪽에서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다. 아마 내일쯤이면 이들이 걸어놓은 수면 마법이 풀릴 것이다.
그전까지 드리무어를 암살한다! 이것이 호일이 생각한 작전이었다.
물론 수오의 입장에선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으나, 괜히 호일의 자존심을 자극해 봤자 이득 보는 게 없었기에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대신, 이런 불만은 있었다.
“너 때문에 나도 전투복 입어보고 싶어졌잖아.”
서환도 주섬주섬 전투복을 입기 시작했다.
오전에 군복을 입어보긴 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군복이 아닌 유격 조교 차림이었다.
하의는 전투복. 그리고 상의는 유격 조교 티셔츠. 모자도 베레모가 아닌 붉은 모자였다.
평소에도 한국의 전투복을 남몰래 동경해 왔던 호일이었기에 꼭 한번 입어보고 싶었다.
여름임에도 야상까지 전부 다 착용한 장호일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멋있어!”
“이게 멋있냐.”
수오는 호일과 다르게 군복에 대한 로망이 없었다.
그냥 멋없다. 그게 다였다.
그래도 호기심이라는 게 들어서 따라는 해봤으나, 만족감보다는 후회가 더 많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몸이 축 늘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여하튼 이것으로 준비 완료.
“가자.”
“오케이.”
호일이 먼저 앞장섰다.
당직사관뿐만 아니라 불침번, 그리고 외곽 근무자까지 전부 수면 마법을 통해 재워뒀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죽이는 거였지만,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 일부러 귀찮은 방법을 선택했다.
목표로 삼은 곳은 제1포대 막사 쪽이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군.”
9090대대에 비해서 경계가 더 허술하다.
유격 훈련으로 습격일자를 잡은 게 정답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신했다.
“드리무어는 어디 있지?”
“저쪽.”
서수오가 제1포대 CP텐트를 가리켰다.
혹시 몰라 변장도 계속 유지했다. 필두가 이들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마음을 다잡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무장공비 신분으로서 남한을 넘을 때 같이 받은 개인화기도 있었으나, 이건 오히려 이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 총을 발사할 때 발생하는 소음 때문에 병사들이 전부 잠에서 깰 것이다. 기습에 어울리지 않은 아이템이었기에 총은 과감히 포기했다.
어차피 드리무어를 상대하려면 마법밖에 없다.
물론 두 사람이 드리무어를 죽일 수 있을 만한 실력이 되는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명령을 받은 이상, 수행해야 하는 게 이들의 임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CP텐트 천막을 들추는 장호일. 서수오는 혹시 몰라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사실 수오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습격해 올 거란 사실을 드리무어가 모를 리가 없지.’
처음부터 장호일의 작전은 실패다. 그걸 직감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정확했음을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CP텐트 천막이 열리는 순간.
장호일의 눈에 들어온 건 그를 향해 오른손을 내뻗은 필두의 모습이었다.
“늦었군. 기다리다 잠들 뻔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필두의 오른손에 거대한 덩어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퍼어어엉!
엄청난 폭음과 함께 장호일이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호일도 만만한 상대는 아닌 모양인지 곧장 자세를 취해 반격을 가했다.
2미터 길이의 창 하나를 소환한 장호일이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그러나 그의 투창 공격은 CP텐트에 닿기도 전에 소멸되었다.
보이지 않는 방어막에 가로막힌 듯했다.
강렬한 소음이 발생했음에도 여전히 텐트 주변은 조용했다.
이 사실을 감지한 수오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이미 우리는 드리무어의 결계진 안에 있다는 소리인가. 역시 대단해.’
장호일도 이 사실을 대략 눈치챘다.
텐트에서 태연하게 걸어 나온 필두가 여유를 부렸다.
“내 기대치가 너무 컸나. 생각보다 쉽군. 하는 행동들이 눈에 빤히 보여.”
“어떻게 알았지?”
“날 죽이겠다는 오라를 풀풀 뿜어대면서 오는데, 어찌 모르겠나. 안 그래?”
이들은 분명 최대한 기척을 감춘 채 이곳까지 왔다. 그러나 필두는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대응했다.
장호일에게 선공을 가한 건 둘째 치고, 이미 소음 차단 결계까지 해둔 것으로 보아선 드리무어 쪽이 더 준비를 철저히 한 셈이었다.
그래도 드리무어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임에 틀림이 없다.
장호일은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레디너스에 있을 때에 비해선 힘이 약해졌을지 모르지만, 그건 드리무어도 마찬가지다.
불리한 점은 서로가 같다. 그렇다면 수적인 우세로 밀어붙이면 되지 않겠나.
“서수오! 협공한다!”
“혀, 협공?”
“그래! 이때 아니면 언제 드리무어를 죽이겠나!”
“…….”
그러나 수오 입장도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나머지 세 명째가 안 보여.’
그 세 번째 흑마법사 때문에 수오도 본격적으로 정체를 드러낼 수 없었다.
‘어쩐다.’
만약 여기서 드리무어의 편을 들어주고 장호일을 역으로 공격하면, 아직 숨어 있을지 모르는 세 번째 흑마법사에게 수오의 배신 여부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적어도 세 번째 흑마법사까지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모두를 한꺼번에 제압하고 싶었다. 그래야 수오의 배신 사실이 상부에 보고될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세 번째 흑마법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호일의 말마따나 드리무어를 죽이기 위해 움직인다면, 그에게 제안한 동맹 건수도 날아가게 된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필두의 시선은 수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서환으로 변장했어도 필두는 이미 그가 수오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지 오래였다.
수오도 그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하는 동안, 필두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상승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수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날 시험하는 건가!’
수오의 예상은 정확했다.
드리무어는 일부러 수오를 시험하기 위해 이 같은 대치 상황을 유도했다.
여기서 수오가 드리무어의 편을 든다면 그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만약 반대라면, 드리무어는 수오가 동맹 건은 간을 보기 위한 것으로 여기고 호일과 함께 수오까지 없애려 들 것이다.
드리무어는 수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자, 너의 의지를 보여라!
지금 이 자리에서!
마치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듯햇다.
“한 방 먹었네.”
결국 드리무어의 손아귀에 놀아난 셈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가자!”
수오가 먼저 드리무어에게 달려들었다.
극한의 선택지에서 수오가 택한 건 드리무어가 아닌 흑마법사 조직이었다.
드리무어에게 제안했던 동맹 건은 진심이었다. 드리무어를 택하지 않은 건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리무어가 괘씸하기도 했다.
‘감히 나를 물 먹이려고 하다니!’
양손을 전방으로 뻗었다. 동시에 2차원의 마법진이 공중에 새겨졌다.
“뒈져라! 드리무어!”
마법진에서 암흑의 불길이 드리무어를 집어삼키기 위해 뿜어져 나왔다.
장호일도 이번에는 두 개의 창을 연달아 던졌다.
이들이 가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 수단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드리무어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기량을 눈으로 직접 파악하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기대를 너무 많이 한 건가.”
그저 왼손을 한 번 휘저었을 뿐이다. 그 동작만으로 서수오와 장호일이 선보인 필살의 한수를 전부 무효화시켰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암흑 불길과 두 자루의 창. 시전자로선 그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내 차례인가.”
필두가 손가락을 튕겼다.
마치 이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이 지면에 수십 개의 마법진들이 빛을 뿜어댔다.
“함정인가!”
“젠장!”
이들이 습격해 올 거란 정보를 이미 접한 필두는 만반의 대비를 갖춘 상태였다.
이미 이곳은 필두만의 공간이다.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무대에 오르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꺼져라.”
엄청난 중력이 이들의 몸을 짓눌렀다.
쿵! 소리가 나며 바닥에 밀착한 두 남자. 이후에 작은 마법진들 위로 쇠사슬 형상을 한 것들이 이들의 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크윽!”
“이건 또 뭐야……!”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바동거렸지만,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었다.
“괜히 힘 빼지 마라.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네 녀석들의 기력만 빼앗길 테니까.”
필두가 시전한 건 상대방의 마나를 빼앗아 가는 스틸 체인이었다.
구속당한 상대방이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거기에 반작용을 해 더 많은 능력을 빨아들인다. 그것이 스틸 체인의 무서운 점이다.
두 사람도 그제야 필두가 사용한 마법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모양인지 반항하기를 멈췄다.
“그래.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죽여라.”
장호일이 비장함을 담아 말했다.
이미 그는 드리무어를 죽이지 못한 시점부터 죽음을 각오했다.
그러나 수오는 아니었다.
‘망했네.’
이럴 줄 알았으면 필두의 편을 들걸.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설마 드리무어가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다. 그의 강함은 수오의 상상을 초월했다.
한편, 우위를 점한 드리무어가 수어 쪽을 바라봤다.
마치 수오에게 새겨들으라는 식으로 말하는 듯했다.
“설마 세 명이나 덤벼들 줄은 몰랐군. 내가 이렇게 인기 있을 줄이야.”
“세 명째라고……?”
순간 드리무어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선보였다.
그때, 수오는 깨달았다.
장호일과 서수오, 두 사람이 필두를 습격하기 전에 이미 그는 세 명째 흑마법사를 포획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필두는 일부러 수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만약 세 번째를 잡았다는 걸 알려줬더라면, 수오는 주저하지 않고 필두의 편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필두는 의도적으로 입을 닫았다.
목적은 단 하나.
‘설마 날 시험한 거였어?’
필두의 손바닥 위에 놀아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