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39화
제34장. 공포의 유격(6)
유격 조교들이 머무르는 막사 안.
불침번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장호일과 서수오가 몰래 제3포대 병사들이 머물고 있는 생활관에 잠입했다.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6명의 병사들을 쭉 훑던 수오가 호일에게 물었다.
“누구로 변장하게. 기준이라도 있어?”
“아니, 딱히 없다.”
“그럴 줄 알았어.”
상세한 계획은 없으리라 예상했던 수오의 생각이 딱 들어맞았다.
“그나저나 나머지 한 명은 어디 갔어. 왜 안 와.”
수오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번 습격 작전에는 3명의 흑마법사가 동원된다고 했었다.
그러나 약속된 장소에 제시간 내에 모인 인원은 서수오와 장호일, 단 둘뿐이었다.
수오는 나머지 한 명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른다. 장호일은 알고 있는지 없는지 확인 불가능하다.
물어봤을 때에는 모른다고 했지만, 혹시 또 모르지 않은가.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을지도.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 애초에 흑마법사 조직은 단합력이 그리 좋지 않다.
장호일 같은 예외도 있지만, 기본적으론 김한 같이 개인플레이가 위주인 흑마법사들이 많은 추세였다.
물론 서수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흑마법사 조직의 우두머리는 정보 공유에도 많은 차등을 둔다.
충신인 장호일은 수오에 비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터.
세 번째 멤버의 정체. 그리고 위치. 이것을 알아내는 게 수오의 1차 목적이었다.
그러나 호일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수오가 원하던 부류가 아니었다.
“글쎄. 어딘가에 있겠지.”
“너도 몰라?”
“모른다.”
“누군지는 알 거 아니야.”
“누군지도 몰라. 들은 바 없어.”
“흠, 그러냐.”
장호일은 조직 내에서도 우두머리를 향한 충성심이 높은 편이다. 그런 그에게도 정보 공유를 하지 않았다는 건.
‘버리는 카드란 뜻인가.’
수오의 뇌리를 스치는 불안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다.
우두머리는 이 세 명을 버리는 카드로 활용하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
하기야. 아직 드리무어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적의 정보를 모르는 상태로 드리무어를 제거하려 든다는 건 웃긴 일이다.
드리무어는 혼자이긴 하나 레디너스 대륙에서 최악의 악인이라 불리던 존재다. 일당백의 능력을 지닌 것뿐만 아니라 두뇌 회전도 빠르다. 그를 상대하려면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수오가 눈치챈 걸 호일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인지 변장을 시도할 병사들을 물색하기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두 녀석이라면 괜찮을 거 같은데.”
“누군데.”
수오가 다가와 두 병사의 정체를 확인했다.
관물대 위에 적힌 주기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인혁 일병과 서환 일병.
“뭐, 나쁘지 않겠지.”
희생양이 결정되었다.
* * *
유격 3일차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도 변함없이 오전에는 유격 체조가 이어진다.
지옥 같은 현장이 펼쳐지는 동안, 조교들은 병사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똑바로 하라는 식으로 윽박을 지른다. 그것이 이들의 몫이었다.
제3포대 쪽으로 향한 이인혁이 190번 올빼미 쪽으로 다가갔다.
“다리 똑바로 안 듭니까!”
인혁의 외침에 190번 올빼미가 흠칫 놀랐다.
그는 제3포대 내에서도 왕고라 불리는 말년병장이었다. 덧붙여 이인혁이 두려워하는 선임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말년에 유격 끌려온 것 때문에 열이 받은 탓에 병사들도 웬만하면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고작 일병 나부랭이가 다가와 조교 행세를 하다니.
“너, 지금 뭐라고 했냐.”
그가 노골적으로 인혁에게 정색했다. 그러나 인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를 내려다봤다.
“지금 조교한테 반말하는 겁니까.”
“조교? X발 네가 지금 조교 하고 있다고 내가 봐줄 거 같냐? 안 그래도 기분 더러워 죽겠…….”
“190번 올빼미, 뒤로 열외 합니다.”
“뭐, 뭐어? 열외라고?”
“귀 막혔습니까! 열외 합니다!”
인혁의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그의 패기에 놀란 탓일까 황당한 얼굴을 하던 190번 올빼미가 허둥지둥 뒤쪽으로 향했다.
근처에서 인혁의 달라진 태도를 바라보던 진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진수에게 같은 부대 선임들한테는 쫄아서 조교 행세도 못하겠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던 인혁 아닌가.
그런데 고작 진수가 몇 마디 했다고 하루 만에 태도가 달라지는 건 좀 이상했다.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고 말이다.
“환아.”
진수가 서환을 찾았다.
마침 근처에 있던 서환이 진수의 말에 반응했다.
“엉? 왜?”
“……?”
“무슨 일인데 그래? 말을 걸어놓고 왜 묵묵부답이야?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서환의 태도도 이상했다.
본래 그는 말이 이렇게까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오늘따라 수다쟁이가 된 듯했다.
어투도 뭐랄까. 너무 가볍다. 한 마디 한 마디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것이 지금까지 보여준 서환의 이미지와 영 안 어울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말하기를 포기했다. 그러자 서환이 진수를 책망하듯 구시렁거렸다.
“말 좀 해주지. 궁금증만 잔뜩 들게 하고 초를 치네.”
“…….”
역시 뭔가 좀 이상하다.
말투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분위기도 진수가 기존에 알던 두 사람과 많이 다르다.
‘이상한데.’
본래는 유격 조교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기로 소문이 났던 진수였으나, 오늘 오전 훈련은 이인혁과 서환 때문에 도무지 훈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 * *
유격 체조가 끝났을 때 즈음 텐트로 돌아온 병사들은 거의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유격 체조 경험만 오늘로 두 번째임에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마 유격 훈련이 끝날 때까지도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그건 확신한다.
점심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어차피 밥 먹고 나서 또 열심히 굴러야 했기에 병사들은 씻는 것보다 쉬는 것을 택했다.
필두도 딱히 이들의 결정에 뭐라 말을 하진 않았다.
대신, 쉴 때 쉬더라도 대대장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다 풀어헤친 채 쉬면 안 된다.
“쉬려면 옷 제대로 입고 쉬어라.”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에게 가벼운 경고 한 마디만 날려준 채 식당으로 향하는 필두.
취사 진행 상황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유격장 취사 시설을 이용하기 때문에 대대에 있을 때에 비해 준비하는 속도가 비교적 느린 편이었다. 게다가 대대장 지침에 따라 취사병도 최소 인원만 남겨두고 유격 훈련을 받으라고 한 덕분에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필두가 식당에 모습을 드러내지 취사병 중 한 명이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밥 언제쯤 다 되냐.”
“이제 곧 있으면 끝납니다.”
“알았다. 병사들 올려보낼 테니까 알파 포대 거 챙겨둬라.”
“예, 알겠습니다!”
훈련이 고달픈 만큼 밥은 확실히 먹여야 한다. 그 생각 때문에 다른 간부들보다도 필두가 먼저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행보관이 직접 식당까지 행차하면 타 부대보다 필두의 부대를 더 신경 써줄 수밖에 없다. 그걸 노리고 일부러 식당까지 온 것이다.
다시 식당으로 내려가려던 찰나였다.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 소위 말해서 짬통이 있는 쪽에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덩치가 상당히 큰 얼룩무늬의 고양이가 설렁설렁 짬통 근처로 다가갔다.
때마침 바깥으로 나온 취사병 중 한 명이 웃음을 토했다.
“야, 짬타이거. 벌써 밥 먹으러 왔냐.”
“여기도 짬타이거가 있나.”
“예, 행보관님. 저희도 어제 알았는데, 여기 짬타이거 말입니다. 먹성이 장난이 아닙니다. 저 덩치만 봐도 알 것 같지 않습니까?”
“흠, 그렇군.”
9090대대에도 짬타이거라 불리는 길고양이는 있다. 그러나 덩치가 저렇게 크진 않았다.
보통 고양이의 2배 몸짓 정도는 되는 듯했다. 돼지와 고양이의 합쳐 소위 말하는 돼냥이었다.
그럼에도 몸놀림은 상당히 날렵했다.
짬통 높이는 일반 성인의 허리춤까지 올 정도로 높다.
그럼에도 유격장의 짬타이거는 그 높이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훌쩍 뛰어넘었다.
비대해 보이는 몸집에 비해 가벼운 몸동작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했다.
“그리고 은근히 귀여운 면도 있습니다.”
취사병이 주머니 안에서 건빵을 하나 꺼냈다. 이후 잘게 부슨 뒤에 자신의 앞에 쏟아 보였다.
“타이! 여기 먹을 거 있다.”
“타이? 저 짬타이거 이름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름은 딱히 없다고 하기에 저희가 임시로 이름 붙였습니다.”
“짬타이거의 가운데 글자만 따서 ‘타이’라고 붙인 건가.”
“역시 행보관님!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단하십니다!”
사탕발림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놀람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타이가 건빵 가루 앞으로 다가와 혀를 날름날름 내밀었다.
순식간에 건빵 가루를 먹어치운 타이가 마치 더 달라는 듯이 취사병을 올려다봤다.
“그래, 그래. 귀여운 녀석. 알았다. 더 주마.”
취사병이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타이는 얌전히 대기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군.”
“여기 근처 주민들도 그렇고 저희처럼 유격 훈련받으러 올 때마다 오는 병사들도 그렇고. 사람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그런 거 같습니다.”
“일리가 있군.”
환경이 이러하다 보니 인간의 손길이 익숙해질 만도 할 터.
“그래도 너무 많이 먹이지 마라. 그러다가 건강 나빠질 테니까.”
“저희가 먹이 안 줘도 짬통에 있는 거 알아서 먹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하긴, 그렇지.”
고양이 본인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게다가 고양이 인생까지 신경을 써주기엔 필두의 입장이 그리 한가하지 않다.
안 그래도 언제 있을지 모르는 흑마법사들의 습격에 대비를 해야 한다.
“먼저 가보마.”
“예! 충성!”
취사병의 거수경례를 뒤로하고 텐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유격 훈련 때문에 대대에 만들어놓은 마법진들이 전혀 쓸모없어졌군. 새로 만들어야겠어.’
주간에는 보는 눈이 많기에 작업을 하더라도 야간에 해둬야 한다.
병사들이 유격 훈련에 고통받을 때, 필두는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놈들의 습격에 대비하느라 스트레스만 쌓여갔다.
‘우선은 1포대 텐트 근처부터 새겨넣어 둘까.’
울타리처럼 빙 둘러 작업해두면 되지 않을까. 대략적인 청사진을 그릴 때에 멀리서 병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수 아니야?”
“유격 조교가 여긴 무슨 일이냐.”
병사들의 얼굴에는 반가움 반, 두려움 반이 섞여 있었다.
유격장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황진수. 그가 빨간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필두에게 다가왔다.
“행보관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뭐지?”
“조용히 이야기해야 할 건수입니다.”
“그렇군.”
필두와 진수가 아닌 드리무어와 마일더로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진수의 말에서 숨겨진 진의를 눈치챈 필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인적이 드문 장소로 이동했다.
“무슨 볼일이지.”
듣는 귀가 없음을 확인한 필두가 진수에게 곧장 물었다.
진수 역시 시간을 질질 끌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이 분기점이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