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38화
제34장. 공포의 유격(5)
열외된 자들은 유격 체조 이후 다시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진다.
어느 정도 요령이 붙은 병사들, 혹은 거의 성공에 근접했지만 벌 때문에 떨어진 도혁 같은 케이스는 재도전에서 당당히 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연도라든지 의성, 대박의 경우에는 재도전에도 계속해서 실패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기와는 다르게 어려운 코스다. 사실 성공하는 인원 비율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이들의 실패는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겨우겨우 진수가 담당하는 코스를 통과하는 데에 성공한 8조. 마지막 코스를 마무리하고 오후 5시 즈음이 되어서야 임시 막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8조가 거의 마지막에 돌아온 모양인지 이미 제1포대 대다수의 분과는 옷을 갈아입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어, 이제 왔냐. 조항아.”
타 분과 동기가 조항을 반겼다. 지친 기색을 보이던 조항이 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너희는 언제 왔냐. 환복까지 다 한 거 보니까 일찍 왔나 보네.”
“30분 정도? 우리는 코스 겁나 빠르게 돌았거든. 조교가 통제 잘 따르고 코스 빨리빨리 돌면 일찍 내려보내 준다고 하니까 애들 단합력이 장난이 아니더라. 우리 분과 단합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말만 들어도 대단하네.”
“너희는 꽤 늦었다? 중간에 문제 있었어?”
“진수 있는 코스에서 시간 낭비 좀 했어.”
“아…… 거기? 몇 번이었더라. 5번 코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오늘 안 돌았네. 내일 돌려나.”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듣자 하니 진수네 코스가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다고 하더라. 우리도 내일 너희 조랑 같은 꼴 되겠다.”
“하하, 조심해라. 진수 녀석, 피도 눈물도 없는 조교 그 자체다.”
“네가 말 안 해도 충분히 조심하려 했어. 하, 벌써부터 머리 아프네.”
진수의 악명은 이미 퍼질 만큼 퍼졌다.
철저한 FM. 봐주는 거 그런 것조차 없다.
몇몇 겁 없는 병사들이 진수를 일부러 웃기게 하려는 시도를 해봤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
진수는 철저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고, 오히려 조교를 능멸하려고 시도한 병사들에게 온몸 비틀기라는 복수의 철퇴를 가했다.
이러니 진수의 악명이 안 퍼지려야 안 퍼질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를 몰래 엿듣던 필두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마일더. 그놈이 나처럼 악인 역할을 했었더라면, 오히려 나보다 더 잘했을지도 모르겠군.’
물론 어디까지나 가상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8조의 복귀로 인해 제1포대 인원들이 전원 다 집합했다.
이제 행보관이 나설 차례다.
“전체 주목한다, 주목!”
“주목!”
병사들의 시선이 필두 쪽으로 향했다.
“훈련 잘 마쳤나.”
“예!”
“오늘 하루 고생했다. 조금 있다가 식사 도착할 테니까 밥 먹기 전에 우선 샤워부터 해라.”
“알겠습니다!”
유격장에선 1일 1샤워도 부족할 정도였다.
진흙탕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괜히 유격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오늘만큼은 샤워를 기피하려 했던 선임들도 어쩔 수 없이 샤워장으로 향해야 했다.
하나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속옷 차림으로 야외를 돌아다니니 뭔가 기분이 색달랐다.
뭐랄까. 마치 자신이 변태가 된 느낌이랄까.
물론 좋은 느낌은 결코 아니다.
샤워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혁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무슨 가축도 아니고.”
조항과 도혁, 성태. 이 세 명은 작년에 유격장 샤워실을 이용해 본 적 있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오고 싶지 않았다.
하나 어쩔 수 없었다. 강제로 샤워를 하게 만드는 유격 훈련 덕분에 결국 이곳에 다시 오게 되었다.
샤워실을 피하고 싶은 건 하나포뿐만이 아니다.
제1포대 전원이. 아니, 9090대대 전원이 샤워실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명만 빼고 말이다.
“역시 샤워실은 유격장 샤워실이 짱이지! 안 그러냐!”
고명전이 어깨를 당당히 펴며 샤워실로 들어섰다.
그가 가는 길마다 마치 모세의 기적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는 한때 성추행의 왕이라 불렸던 남자다.
지금은 필두의 계략 때문에 한층 그 성욕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가끔은 폭주할 때가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
게다가 지금은 고명전의 의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환경이다.
다 큰 성인 남성들이 알몸 상태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유격장의 샤워실. 고명전에겐 다른 이들과 다르게 천국으로 보였다.
샤워실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도혁에게 다가와 그의 등을 강하게 파악! 때렸다.
“뭐하냐, 도혁아. 샤워하러 온 거 아니야?”
“사, 상병 전도혁! 마, 맞습니다!”
“그럼 샤워해야지. 안 그래?”
“지금은 좀…….”
“등 때리는 건 좀 약했나. 엉덩이라도 때려줄까?”
“아, 아닙니다아앗!”
지금 샤워하러 들어갔다간 고명전의 먹잇감이 될 것 같았다.
불타오르는 그의 시선이 도혁을 닭살 돋게 했기 때문이다.
도혁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겁에 질린 표정을 했다.
웬만하면 고명전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나 샤워를 피할 수도 없었다.
“다 같이 즐겁게 샤워해 보자고, 애기들아.”
고명전이 씩 웃을 때마다 병사들의 공포심은 급격히 샘솟았다.
* * *
유격 2일차를 마치고 돌아온 조교들은 일반 병사들과 다른 막사를 사용한다.
이곳은 제대로 된 건물 형태를 갖춘 막사다. 취침이라든지 이런 건 확실히 보장되어 있었기에 이거 하나는 확실히 좋았다.
물론, 2주간의 조교 훈련은 지옥 같았지만 말이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조교들도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누적된 피로의 양이 적지 않았다.
훈련을 뛰진 않았지만, 병사들 앞에서 시선 처리하고, 목소리 높이고, 시범 보이고.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꽤 많은 피로를 야기하는 것들뿐이었다.
비가 그쳤을 때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바깥으로 나온 진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세계에선 맡기 힘든 맑은 공기군.’
도심만 나가도 금방 공기가 탁해진다.
공기뿐만이 아니라 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나 양도 풍부하지 않고, 심지어 탁하기까지 하다.
마나를 다루는 사람으로선 별로 살고 싶지 않은 세계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진수는 이곳이 좋다.
공기도 맑고 경관도 보기 좋고.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마음 같으면 정말로 전문 유격 조교를 지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드리무어 때문이다.
마일더는 드리무어를 찾아내기 위해 이 세계로 건너왔다. 겨우 드리무어를 감시할 수 있을 만한 포지션을 굳혔는데, 여기서 스스로 이 포지션을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언제 그가 또 악인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동안, 두 명의 병사가 진수에게 다가왔다.
“야, 진수야. 무슨 생각하기에 넋 놓고 있냐.”
“그러게. 같은 부대 사람들 마주하는 게 꽤 힘들었나 보네. 이해한다.”
9090대대 제3포대에 소속되어 있는 이인혁 일병과 서환 일병. 진수와 같은 날에 전입한 동기들이다.
얼굴만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훈련소에 있을 때에는 그리 자주 마주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유격 훈련을 계기로 모였을 때 두 사람이 진수와 동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교가 되기 위해 모인 이 중에서 이 세 명만이 유일한 동기였다. 게다가 막내 라인이라 그런지 유독 유대감이 두터웠다.
“나 말이다. 아까 이등병 때부터 나 졸라 괴롭히던 선임 있거든. 그 새끼 딱 열외 되었을 때 온몸 비틀기만 시키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그냥 쉬운 것만 시켰어.”
“쫄았냐?”
“뭐, 그렇지. 나중에 보복당하면 어쩌려고. 그냥 눈치껏 할 수밖에 없더라.”
“조교가 조교가 아니구먼.”
“그러게 말이야. 어휴.”
조교가 후임이라고 마음껏 멸시하고 무시하면 제대로 된 유격 훈련이 진행될 수가 없다.
그래서 인사장교는 조교들을 모아두고 그런 거 없이 FM대로 하라고 늘 강조했다.
유격 입소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인사장교의 말을 가장 충실히 이행하는 조교는 단연 황진수였다.
“진수, 너 진짜 독하더라.”
“그러게. 보통은 선임 있으면 쫄게 마련인데.”
“요령이 뭐냐?”
두 사람이 진수에게 비결을 물어왔다.
그러나 진수로선 이들에게 딱히 알려줄 만한 비법 같은 건 없었다.
“그냥 교관님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뭐야. 특별한 비결 같은 거 없어?”
“그런 거 없다.”
“없다는 게 더 무섭네.”
만약 이들이 진수 밑에서 올빼미 신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을지도 모른다.
유격 조교를 지원해서 천만다행이다. 설마 진수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시 진수에게 말을 걸어왔던 두 남자가 이내 흡연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린 담배 좀 피우다가 들어갈게.”
“좀 있다가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알았다.”
같은 부대에서 온 선임들과 밥을 먹는 것도 좋긴 하지만, 동기들과 먹는 밥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유격 훈련이라.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왜 사람들은 싫어하는 건지 모르겠군.’
진수로선 이해 불가였다.
* * *
모두가 잠든 늦은 저녁.
두 명의 낯선 남자가 유격장을 찾았다.
한 명은 서수오. 필두에게 동맹을 제안했던 흑마법사다.
다른 한 명은 장호일로, 서수오와 임시 팀을 맺은 남자다. 조직 내에서 행동대장으로 불리는 만큼, 그가 먼저 선두에 섰다.
“아무도 없군.”
유격장 근처에 도달한 호일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물었다. 반면, 수오는 당연하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군인들은 10시가 취침 시간이거든.”
“꽤 일찍 잠드는군.”
“당직하고 불침번, 근무자 빼고는 다 자고 있을 거야.”
“허술하기 짝이 없군.”
그래도 이들에겐 오히려 이 허술함이 많은 도움이 된다.
더 손쉽게 습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려고.”
수오는 일단 무작정 호일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아직까지 마땅한 작전은 없다.
두뇌파인 수오라면 금세 좋은 작전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호일이 먼저 자신의 계획을 주장했다.
“잠입한다.”
“잠입이라고? 레알?”
“또 이상한 통신 언어 쓰는군. 왜. 불만인가.”
“아니, 너답지 않아서.”
호일이라면 분명 정면 돌파라는 수를 택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수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잠입할 건데. 작전 내용이 뭐야?”
“간단하다.”
그의 오른손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조교들이 머무르는 막사였다.
“저거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드리무어는 저기 없어. 텐트 지역에 있지.”
“알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이대로 녀석을 습격하면 승산 없다는 것도 잘 알지. 기왕이면 제대로 된 기습을 하는 거다.”
“혼자서 왈가왈부하는 거 그만두고 그냥 빨리 말이나 해.”
수오가 불만을 드러냈다. 그제야 호일이 본래의 계획을 짧게 압축했다.
“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