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37화
제34장. 공포의 유격(4)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유격 체조.
필두가 들었던 바로는, 오전 훈련은 유격 체조로 고정되어 있다고 한다.
‘녀석들도 간만에 고생 좀 하겠군.’
그간 이런저런 일 때문에 한동안 병사들의 체력 단련, 군 기강 바로잡기에 소홀했던 필두에겐 유격 체조가 마음에 쏙 드는 훈련이었다.
유격은 짬이 높아서 덜 일한다든지 덜 고생한다든지 하는 그런 게 거의 없었다. 오로지 올빼미와 번호로 통일된 관등성명으로 유격 훈련 기간을 보낼 것이다.
‘마음에 드는 훈련이야.’
아마 필두의 마음을 훔친 훈련은 유격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필두뿐만 아니라 그간 몸 굴리기에 목말라 있던 진수도 꽤 흡족해하고 있었다.
사실 필두는 이렇게 조교 신분으로 병사들 앞에 서서 지시를 하는 것보다 본인이 직접 조교 훈련을 받는 게 더 좋았다.
같이 훈련받던 병사들은 거의 초주검이 되었지만, 유일하게 진수만 모든 장애물을 통과하고 모든 훈련을 퍼펙트로 클리어했다.
최우수 조교! 그것이 진수에게 붙은 새로운 별칭이었다.
진수도 조교라는 직책이 꽤 마음에 들었다.
욕심 같았으면 포병 같은 거 때려치우고 조교로 전직하고픈 기분이었다.
그러나 군대라는 곳은 융통성과 거리가 먼 조직이다. 마음대로 보직이 변경되는 곳이었다면 고생하는 사람들도 덜했을 것이다.
여하튼 한정된 기간이긴 하지만,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된다.
물론 다른 병사들에겐 즐긴다는 감정보다 고통, 괴로움이라는 감정이 더 크게 자리매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전 내내 유격 체조로 고생길의 문을 연 병사들에게 희망의 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름 하야 빗줄기.
뚝, 뚝.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던 빗줄기가 이내 보슬비 수준으로까지 번졌다.
‘이건…… 비잖아!’
‘비 내린다! 아싸!’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비가 오면 훈련을 중단한다. 물론 100% 전부 다 그렇진 않지만, 대게 그러했다.
특히나 포병은 포가 비에 젖으면 녹슬기 때문에 포 커버를 씌우고 비가 그칠 때까지 훈련을 일시 중지한다. 그런 경우가 많았기에 병사들은 내심 이 비에 희망을 걸었다.
유격 훈련이 중단되기를 바라는 희망이다.
하나 유격은 일반 포병 훈련과는 달랐다.
“똑바로 안 합니까!”
“비 온다고 지금 설렁설렁합니까!”
“어차피 유격복 아닙니까! 옷 더러워져도 상관없으니 마음껏 구릅니다!”
조교들의 목소리는 더더욱 상승했다.
비 오는데 훈련을 멈춘다? 그딴 거 없다. 무조건 훈련은 계속 속행한다. 그것이 유격의 법칙이다.
* * *
유격 체조가 끝난 후에 부여된 점심 시간은 이들에게 꿀맛 같은 휴식을 부여했다.
배도 채우고, 쉬기도 하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식사를 하던 도중에 도혁이 취사병들이 일하는 쪽을 응시했다.
“하, 젠장.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취사병 지원이나 할걸.”
현재 이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보직이 있었다.
첫 번째가 의무병. 두 번째가 취사병. 그리고 세 번째가 PX병.
특히나 의무병은 노골적으로 꿀 빨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병사들이 유격으로 고통받는 동안, 의무병은 뒤에서 시원한 그늘 밑에 대기하며 힘들어하는 병사들에게 약 몇 개 건네주기만 하면 된다. 유격 체조로 고통 받는 병사들에겐 천국처럼 보였다.
조항이 도혁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유격 때나 편하지, 평소에는 고생 엄청 하잖아. 그리고 부러워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쉬어둬라. 좀 있다가 산 타야 하니까.”
“갑자기 산은 왜 탑니까?”
연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중간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직 이들은 유격에 대한 경험이 없다.
유격 체조는 유격 훈련의 시작을 알리는 포문에 불과하다. 고작 유격 체조 한 번 했다고 유격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장애물 코스가 다 산에 있거든.”
담담하게 말하는 조항이었으나, 후임병들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다.
가뜩이나 체력도 방전된 상태인데, 여기에 산까지 타다니.
이런 후임병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던 걸까. 조항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이들에게 겁을 줬다.
“긴장 바짝 하라고, 애들아.”
* * *
조항이 경고한 그대로 유격 코스들은 죄다 산 위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입소 행군 때와는 다르게 완전군장 차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산행이라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군장과 총, 그리고 방탄모 없이 산행한다는 점 때문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더 큰 일을 겪으면 작은 일에도 만족감을 느끼는 원리와 같았다.
하기야. 이런 것에서라도 기쁨을 누려야지, 안 그러면 보통의 마음가짐으론 유격 훈련을 소화하기 힘들다.
산 정상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꽤 높은 위치까지 도달한 하나포와 둘포.
이 두 분과는 같은 8조다. 유격 훈련이 끝날 때에는 이 두 분과가 같이 행동할 예정이었다.
장애물 코스는 그래도 유격 체조보다 한결 쉬웠다. 타이어 통과하기. 장애물 오르기. 통나무 건너기 등등.
사람에 따라 오히려 이런 장애물 코스에 재미를 느끼는 때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정성태 같은 경우 말이다.
“54번 올빼미, 도하준비 끝!”
“도하!”
“도하!”
촤라라라락!
밧줄을 잡은 채 밑으로 수직 하강하는 정성태. 그의 얼굴에는 공포심이라든지 두려움보다 재미있다는 감정이 많이 묻어나왔다.
“진성 군인이구먼.”
도혁이 ‘노답 녀석’이라는 추임새를 붙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서 유쾌하게 장애물 코스를 소화하는 정성태의 모습에 조교들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몰랐다.
심지어 54번 올빼미는 혹시 마조히스트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돌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여하튼 정성태만의 유격 즐기기 방법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물론 따라 하기에는 다소 부담이 있어 보였다.
다섯 번째 장애물 코스에 도착한 8조.
이들을 기다리는 조교는 너무나도 익숙한 병사였다.
“화, 황진수?”
“망했다, X발.”
“하필 걸려도…….”
8조 인원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황진수. 그는 제1포대를 넘어 본부포대, 제2포대, 제3포대까지. 악독한 조교라는 이미지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
올빼미들이 가장 싫어하는 조교. 그가 바로 황진수다.
“5번 코스에 온 걸 환영합니다.”
이 말조차 섬뜩하게 다가왔다.
진수가 담당하는 5번 코스는 다른 코스에 비해 난이도가 제법 있었다.
밧줄을 잡고 매달린 채 바닥에 있는 진흙탕을 건너면 된다.
“숙달된 조교의 시범부터 먼저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수가 몸소 시범에 임했다.
밧줄을 잡고서 그대로 도하했다. 몸과 다리의 각도는 직각으로. 발이 진흙탕 물에 닿지 않게끔 하는 것이 주 포인트였다.
봤을 때에는 쉬워 보인다. 그러나 다리와 몸을 직각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어렵다.
상병장급들은 작년에 해봐서 잘 안다. 그러나 패기만 넘치는 연도와 의성, 대박은 진수의 시범을 보자마자 ‘쉬운 코스’라는 생각을 절로 품었다.
“그럼 자원해서 먼저 해볼 올빼미 있습니까.”
“47번 올빼미!”
연도가 먼저 자원을 나섰다.
훈련을 가장 기피할 것 같은 병사가 오히려 역으로 나서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가장 먼저 코스 체험에 나서게 되었다.
두꺼운 밧줄을 잡은 조연도가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47번 올빼미! 도하준비 끝!”
“도하!”
“도하!”
진수의 말에 복명복창하며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풍덩! 소리와 함께 그대로 급속 진흙탕 행을 타고 말았다.
“어푸!”
그대로 흙탕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연도가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진수는 냉담하게 말할 뿐이었다.
“물 안 깊습니다. 무릎까지밖에 안 오니 똑바로 섭니다.”
“지, 진짜네.”
괜히 민망해진 모양인지 후다닥 호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통과하지 못한 올빼미는 따로 열외합니다. 47번 올빼미. 좌측에 섭니다.”
“예, 알겠습니다!”
열외. 유격장에 오고 난 이후가 장 듣기 싫은 단어 중 하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호기롭게 나섰다가 괜히 망신만 당했으니. 순전히 연도의 책임이다.
그의 실패 덕분에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올빼미들. 당연한 순서였다.
“가장 앞에 선 올빼미부터 차례로 도전합니다.”
결국 진수가 알아서 차례를 정해줬다.
공교롭게도 다음 차례로 선정된 이는 김조항이었다.
“후우.”
위치에 선 조항이 힘을 다해 밧줄을 잡았다.
FM 자세를 취하려면 복부의 힘이 필요하다.
‘작년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성공한다! 반드시!’
악으로, 깡으로! 그것이 유격 정신이다.
“도하!”
과거, 선임들에게 들었던 팁을 새기며 다리를 들어 올렸다.
전투화 때문에 천근만근 무거운 두 다리였으나, 그동안 조항도 나름 체력을 길러오며 성장했다.
복부에 힘을 주며 두 다리를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덕분에 진흙탕 물에 조금도 스치지 않고 코스를 통과할 수 있었다.
“68번 올빼미! 도하 끝!”
“68번 올빼미는 우측에 섭니다. 이후 교육이 끝날 때까지 휴식 취하도록 합니다.”
“예!”
성공한 자에게는 달콤한 휴식이 보장된다. 그리고 실패한 자들에게는 얼차려가 부여된다.
유격장의 기본 법칙이다.
그러나 성공한 이보다 실패한 이가 더 많았다.
대다수는 경험이 없는 후임급들이 이에 해당됐다.
전의성, 박대박을 비롯해 다수의 일, 이등병들이 좌측에 섰다.
마지막 차례를 차지하게 된 도혁이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내가 성공하는 모습 보고 잘 배워라, 사랑스러운 후임들아.”
도혁이라면 무난히 성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체력, 근력하면 전도혁 아니겠는가. 요령이 없어도 그는 힘이 있다.
부족한 건 전부 힘으로 극복하는 게 전도혁의 방식이다.
“흐읍!”
있는 힘을 다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정확히 90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아름다운 각도다!
하나 도혁이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다.
위이잉!
“버, 벌?”
바로 코앞에 꿀벌 하나가 앵앵거리며 다가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빠졌다.
동시에 그의 몸이 수직 낙하했다.
풍덩!
엄청난 소리와 함께 도혁의 거대한 몸뚱이가 그대로 진흙탕에 빠졌다.
“푸하!”
입에 들어간 흙탕물을 내뱉느라 정신이 없었다.
겨우 한숨 돌란 도혁이 아쉬움을 토로하듯 외쳤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67번 올빼미. 좌측으로 열외합니다.”
“아니, 방금 벌 때문에 놀라가지고 떨어진 거라니까? 벌만 없었더라면 성공이었다고!”
진수에게 애걸복걸하며 따졌지만, 진수에게 그런 변명이 통하겠는가.
천만에.
열외 앞에 예외란 있을 수 없다.
“진흙탕에서 교육 받고 싶습니까.”
“……쳇!”
결과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불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열외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간 도혁이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진수 녀석, 좀 봐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러나 진수를 잘 아는 연도로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아마 유격 훈련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수 녀석, 조교로 간다는 걸 억지로라도 말렸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