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35화
제34장. 공포의 유격(2)
오전에 시작된 주간 행군도 이제는 거의 얼마 남지 않았다.
거리상으로는 이제 8㎞ 남짓 남은 상황.
아직까진 아무도 낙오하지 않았다. 주간이라는 점이 톡톡하게 한몫했지만, 문제는 이 행군이 끝난 이후, 내일 바로 유격 훈련이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행군 이후 체력이 방전된 상태에서 어떻게 유격 훈련까지 소화할까.
병사들의 머릿속엔 그런 걱정이 가득했다.
하나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지금 당장이 문제다.
“허미, 이게 뭐 시다냐…….”
의성이 입을 쩍 벌렸다.
병사들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시련.
45도 각도에 달하는 비탈길.
바닥도 비포장이었기에 걷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조항이 멍하니 서 있는 의성에게 다가와 설명했다.
“잘 기억해 둬라. 이게 바로 ‘지옥 길’이라는 거다.”
“지, 지옥 길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비탈길을 넘으면, 바로 유격장이다.”
“유격장이 산속에 있습니까?”
“그렇지, 뭐.”
산에 있다는 건, 다시 말해서 산행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 아닌가.
이제 행군도 거의 끝났겠거니 생각했건만, 설마 지옥 길이라는 이명이 붙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정보 수집가, 박대박도 이건 미처 예상 못 했다.
도혁과 성태는 조항과 함께 작년에 유격을 뛰어봤기에 지옥 길의 존재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의성과 대박, 연도와 다르게 덜 절망할 수 있었다.
“저거, 올라갈 수는 있습니까?”
의성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슬슬 다시 행군을 재개하기 위해 군장을 짊어진 도혁이 간결하게 대답해 줬다.
“올라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군인인 이상, 무조건 올라가야지.”
“…….”
군인에게 선택지는 없다.
의성도 이제는 이병 생활 두 달째에 접어든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지만, 영 적응하기 힘들었다.
* * *
지옥 길을 올라가는 9090대대 병력들의 입에선 거친 호흡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는 동안, 필두는 좌우를 연신 번갈아 보며 혹시 모를 흑마법사들의 습격 여부를 주기적으로 확인했다.
‘아직까지는 조용하군.’
기습의 기본은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선 낮보단 밤이 더 좋다. 해가 떨어진 시기만큼 기습하기 좋은 환경도 없기 때문이다.
필두가 흑마법사 조직원들이라면 낮보다는 밤을 택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다.
여름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감에도 아직까지도 해는 하늘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중이었다.
게다가 병사들도 전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행군에 임하고 있다.
지켜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습격을 감행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흑마법사 조직원들, 특히나 그중에서도 우두머리라 불리는 자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다.
몇 없는 부하를 함부로 필두의 밥이 되게 놔두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계 태세는 갖추는 게 좋다.
어디까지나 대낮에 기습당할 확률이 적다는 이야기지, 없다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럴 때는 마일더 녀석이 부럽군.’
흑마법사 조직원의 타깃이 아닌 진수의 위치가 한편으로는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위기는 필두가 자처한 셈이다.
차원 이동을 할 때, 그들을 강제적으로 같이 이동시켰으니까.
그래도 한 점 후회는 없다.
오히려 잘됐다.
복수의 기회를 잡았으니까.
‘언제든 덤벼라. 잔인하게 없애줄 테니까!’
병사들이 지옥 길 위에서 부족한 체력과 싸울 때.
필두는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적과 보이지 않는 심리전을 진행했다.
* * *
지옥 길 꼭대기에 올라서는 데에 성공했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몇몇 병사들은 풀린 다리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지옥 길 덕분에 그나마 남아 있던 체력이 모두 방전되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근 1시간가량 비탈길을 올랐는데, 쌩쌩한 병사가 있을 리가 있겠나.
터질 것 같은 허벅지.
턱밑까지 차오른 호흡.
띵한 머리.
삼박자가 고루 갖춰져 병사들을 괴롭혔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타이밍 좋게 휴식 타임이 주어졌다.
“잠깐 쉬었다 간다. 제자리에 앉아서 10분간 휴식하도록.”
“10분간 휴식!”
선발대를 시작으로 행렬 맨 끝 인원까지 전원 다 착석했다.
산 정상에서 맛보는 공기는 참으로 신선했다. 게다가 바로 옆에는 계곡이 있어 경치까지 좋았다.
군인 신분만 아니면 신선놀음하기 딱 좋았을 텐데. 이런 아쉬움이 들었다.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힌 후.
“다시 출발한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 악물고 끝까지 버텨!”
“알파 포대, 파이팅!”
지옥 같은 행군이 재개되었다.
그래도 이제는 정말 얼마 안 남았다는 희망이 병사들의 부담감을 덜어줬다.
지옥 길을 통과한 시점부터 난이도 있는 행군 코스는 없었다.
선두에 선 행렬이 유격장 입구에 도달했다. 그곳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짝짝짝짝짝!
규칙적인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각각 좌측, 우측 사이드에 1열로 나란히 서 9090대대 병사를 환영해 주는 조교들의 모습은 반갑기보다는 무서웠다.
전부 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병사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진수를 비롯해 아는 얼굴이 보이는 데에도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그 시선들을 무시했다.
이들은 2주간의 지옥 훈련을 끝낸 조교들이다. 이들이 당한 만큼 병사들에게 그대로 되돌려 줄 것이다.
조교들을 지나치고 나서야 연도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진수 녀석. 나 본 척도 안 하더라.”
연도의 말을 들었는지, 성태가 당연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조교들은 그래. 같은 부대 병사라고 해서 막 친하게 지내거나 그러면 오히려 우리만 욕먹으니까 여기서는 그냥 모른 척해.”
“예, 알겠습니다.”
평소에도 쓸데없이 진지함을 발휘하는 진수였는데, 여기서 조교로 만나보니 이제는 그 진지함이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진수라면 제아무리 선임이라 하더라도 유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얼차려를 부여할 것이다.
그게 진수의 본래 모습이다.
한편, 유격장 입구를 통과한 이들의 다음 목적지는 유격 훈련을 받을 동안 생활하게 될 임시 막사였다.
임시 막사라고 하지만, 사실 그 정체는 야외 훈련을 할 때 매번 신세 지는 텐트들이다.
유격장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얼추 보이는 유격 코스들이 병사들을 잔뜩 긴장하게 했다.
‘내일부터 저걸 한단 말이지.’
‘와, X발! 절벽 위를 걷는다고?’
‘저건 화생방 아니야?’
‘X됐네.’
벌써부터 근심과 걱정이 몰려왔다.
겨우 행군을 끝냈으나, 유격 훈련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 * *
통신반장과 주간 행군에 열외 된 병사들이 병력들을 대신해 텐트를 쳐뒀기 때문에 별도의 텐트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힘들어 죽겠는데 여기서 텐트까지 치라고 하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하나포 텐트는 가장 바깥쪽에 있었다.
“웃차!”
도혁이 군장과 더블백을 텐트 안에 던져 넣었다.
그의 뒤를 따라 후임들도 각자의 짐을 놓아두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포 반장도 짐을 들고 텐트를 방문했다.
“고생했다, 애들아.”
“하나포 반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근데 내 자리는 어디냐?”
“하나포 반장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정하시면 됩니다.”
조항이 먼저 하나포 반장에게 선택권을 부여했다.
“난 입구 쪽으로 할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안쪽에 들어가셔도 됩니다.”
“아니. 어차피 난 너희보다 취침 시간이 늦으니까. 중간에 내가 왔다 갔다 하면 잠 깨는 애들도 있을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바깥에서 잘게.”
“그렇다면야…… 예, 알겠습니다.”
합리적인 자리 선정이었다.
하나포 반장의 자리가 정해짐에 따라 짬 순서대로 각자 원하는 자리를 정했다.
“진수 녀석이 없으니까 자리가 좀 여유로운 거 같습니다.”
“그러게.”
한 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나 클 줄이야.
하나 기뻐하긴 아직 일렀다.
“김조항 병장니이이임!”
저 멀리서 군장과 더블백을 짊어진 채 걸어오는 한 남자.
하나포 운전병, 소중한 상병이었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행보관님이 수송부는 각 담당 분과 텐트에 가서 자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뭐어?”
자리 넓다고 좋아한 게 불과 5분 전의 일인데. 이래서 군대는 방심할 수 없는 곳이다.
불만이 있긴 해도 소중한을 매몰차게 쫓아낼 수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짐 옮기는 걸 마무리한 분과는 바로 저녁 식사에 들어갔다.
식당이라 부를 만한 공간도 없었기에 식판을 들고 땅바닥에서 양반다리를 한 채 밥을 먹어야 했다.
그래도 병사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자세는 불편할지 몰라도, 본래 훈련 때 먹는 밥이 꿀맛이다.
게다가 행군하고 나서 그런지 유독 더 맛있게 느껴졌다.
똥국이라 불리는 메뉴가 나왔음에도 숟가락과 젓가락은 멈출 줄 몰랐다.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 시간은 이미 8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해도 저물어 이제는 어둠이 유격장을 가득 덮었다.
막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났을 때, 필두가 텐트가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 외쳤다.
“밥 다 먹었으면 샤워해라. 조기 취침할 테니까 샤워 끝난 인원은 바로 잘 준비하고.”
“예, 알겠습니다!”
유격장의 샤워실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이런 호기심이 후임들을 자극했다.
그러나 유격을 이미 한번 뛰어본 상병장급 병사들은 오히려 샤워하기를 꺼렸다.
이들은 알고 있었다.
유격장 샤워실의 진실을.
“전도혁 상병님, 정성태 상병님. 안 가십니까?”
연도가 두 사람에게 같이 샤워실로 갈 것을 권유했으나, 이들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을 했다.
“좀 있다가 갈게.”
“나도. 사람 좀 없을 때 가마.”
“그럼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신병들 잘 챙기고. 진수 없으니까 연도, 네가 특히 더 잘 봐줘라.”
“네, 알겠습니다.”
의성과 대박, 그리고 연도. 이렇게 셋이서 먼저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실이 저쪽인가.”
샤워실 가는 길도 비탈길이다.
어딜 가든 비탈길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이것이 유격장의 위력이었다.
심지어 가파르기까지 하다.
‘우리 부대가 진짜 편한 곳이긴 했구나.’
세 명의 남자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비탈길을 올라가 샤워실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건 또 뭐야!”
가조립 된 건축물 위에 물이 졸졸졸 떨어졌다.
샤워실이 아니라 가축들을 씻길 때 사용하는 시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시설도 최악인데, 그래도 샤워를 하겠다고 알몸 상태로 서로 막 부대끼며 물을 적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니 동정심이 절로 들었다.
물론 이들도 조만간 같은 모습을 하겠지만 말이다.
“아…… 돌아가고 싶다.”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제야 도혁과 성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유격 훈련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