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33화
제33장. 사회의 공기(3)
일반 대중목욕탕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이곳에는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설마 여긴……?”
“뭔데 그래?”
대박의 미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 이제야 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네 아저씨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나,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살짝 그을린 구릿빛 피부. 굳은살 투성이 손. 그리고 융통성 없어 보이는 아우라까지.
한눈에 봐도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민간인이 아니다!
“군인들이야.”
침을 꿀꺽 삼킨 대박이 때마침 옷을 갈아입으려는 아저씨 한 명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그 역시 일반 사복이 아닌 군복을 꺼내 들었다.
계급은 대령!
원스타에 비해 파괴력은 약했지만, 그래도 대령은 연대장급이다.
병사의 시선에서 보자면 대령도 충분히 두려워할 만한 존재였다.
“오 마이 갓…… 내 예상이 맞았어!”
“혼잣말 좀 그만하고 우리한테도 알려줘!”
“그래, 맞아!”
불안에 떠는 신병 3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대박을 닦달했다.
그러자 대박이 검지를 입술 위에 가져다 대며 쉿! 포즈를 취했다.
조용히 하라는 경고를 담은 행동이었다.
“여기로 말할 거 같으면……”
이곳의 비밀을 발설하려는 순간, 대박의 다음 차례를 가로챈 인물이 있었다.
강필두였다.
“군 간부들이 애용하는 목욕탕이다.”
“헉……!”
순간 현기증이 감돌았다.
여기를 둘러봐도 간부.
저기를 둘러봐도 간부!
온통 간부투성이였다.
“목욕탕뿐만이 아니라 이 아파트 자체가 군대에서 지원하는 숙소 개념이라서 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부가적인 설명을 들려준 필두가 알몸 차림으로 욕실 문을 열었다.
“옷 갈아입고 후딱 들어와라. 시간 없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신병들이 후다닥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들 네 명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건 불안해 못 버티겠다.
그나마 아는 간부인 필두가 같이 있어야 안심이 된다.
필두를 따라 욕탕 안으로 진입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하기야. 군 간부들이 자주 애용하는 목욕탕에 젊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니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현상이기도 했다.
간부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벙한 행태를 보아하니, 병사 티가 딱 났다.
나름 군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던 자들이라서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이 이곳을 왜?
그건 필두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자연스레 해답이 나왔다.
“아니, 행보관님 아니십니까!”
온탕에서 두 다리를 쩍 벌린 채 목욕을 즐기던 대머리 남자가 필두를 바로 알아봤다.
행보관이라는 세 글자를 들은 사람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필두를 응시했다.
“강필두 원사님인가?”
“저번에 TV에도 나왔잖아!”
“아, 맞아. 기억난다, 기억나!”
사람들이 급격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필두는 군대 내에서도 대스타라 불리는 존재다. 그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봐도 무방했다.
“행보관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행보관님!”
여기저기서 필두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네 왔다.
아까 봤던 원스타도 앞다투어 필두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신병들인가 보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번에 저희 부대에 새로 전입 왔습니다.”
필두가 슬쩍 눈치를 보내자, 신병 4인방이 곧장 거수경례를 해왔다.
“충성! 이병 전의성입니다!”
“이병 박대박입니다!”
두 사람을 비롯해 남은 신병 두 명도 각각 자신의 관등성명을 대느라 진땀을 흘렸다.
아직 온탕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이미 그들의 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게다가 알몸 차림으로 거수경례라니. 이건 또 무슨 경험이란 말인가.
네 남자의 거수경례에 원스타가 멋쩍은 듯 웃었다.
“됐다. 목욕탕에서까지 격식 차릴 필요 없다. 괜히 행보관님 불편하게. 아, 편히 쉬다 가시기 바랍니다, 행보관님.”
“감사합니다.”
원스타 정도면 필두를 상대로 부하 대하듯 대해도 될 법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의 신임을 얻는 필두였기에 그를 함부로 취급할 수 없었다.
어떤 후폭풍이 불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개인 샤워용품을 챙겨 든 필두가 신병 4명에게 말했다.
“1시간 뒤에 나갈 거니까 너희 알아서 목욕해라. 터치 안 할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눈치챘겠지만,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군 간부다. 그러니까 괜한 실수 하지 말고 조용히, 얌전히 목욕만 해라. 알겠나.”
“예!”
필두가 굳이 이렇게까지 말 안 해줘도 그럴 생각이었다.
* * *
본의 아니게 불편한 목욕 시간을 마친 이들.
그러나 악몽 같았던 시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눈앞에 놓인 자장면과 짬봉, 탕수육이 이들의 침샘을 자극했다.
“맛있게 먹어라.”
“잘 먹겠습니다!”
목욕이 끝난 이후 중국집으로 이동한 이들은 곧장 점심시간을 가졌다.
사회에 있을 때에 지겹도록 먹었던 자장면. 그러나 이곳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다가왔다.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는 이들의 모습에 필두가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천천히 먹어라. 누가 안 빼앗아 먹으니까.”
“예!”
입에 짜장 소스 가득 묻힌 채 대답하는 이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하나 한편으로는 짠하게 다가왔다.
군대. 그곳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절제하고, 모든 것을 참아야 하는 곳이다.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군대에 처박혀 있으니, 얼마나 불쌍할까.
때로는 이들의 모습에 동정심도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렇게 신병 4명의 주린 배를 가득 채워준 후에 다시 차를 몰고 부대로 복귀했다.
막사로 돌아온 뒤에도 신병들은 마치 자신이 꿈을 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의 공기를 마시며 자장면을 먹지 않았는가. 사소한 것들이 군대에 오니 소중한 기억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달콤한 꿈을 꾸고 돌아온 신병들을 향해 도혁이 공감의 눈빛을 보냈다.
“잘 갔다왔냐.”
“예!”
“또 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짜샤. 간부들이 득실득실한 욕탕에 또 간다고?”
“그래도 그거 한 번 버티고 자장면 먹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습니다!”
자장면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없던 용기도 생기게 하는 장소. 군대라는 곳은 참으로 신기한 곳이다.
* * *
일요일 오전에는 종교 행사가 예약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부하들과 같이 기독교 종교 행사를 가곤 했던 필두였으나, 오늘은 좀 달랐다.
전의성과 박대박. 두 신병의 가족들이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필두도 포대장과 함께 면회실에 내려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이미 눈물의 가족 상봉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얼굴이 왜 이리 탔어!”
“훈련소에서 훈련받느라 그랬지, 뭐…….”
“밥은 잘 먹고 다니고? 괴롭힘당하거나 그러진 않지?”
“선임들이 잘 해줘서 괜찮아. 부대도 좋고.”
필두와 포대장이 내려와서 일부러 사탕발림을 아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하나포 선임들은 신병들에게 잘 대우해 주는 편에 속했다.
물론 가끔 진수가 이해 못 할 행동을 보일 때가 있긴 했지만, 그것이 갈굼의 일종은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다.
밥도 맛있는 편이다. 1357대대에 비하면 9090대대는 셰프가 와서 요리를 해준다는 착각이 들 만큼 맛있는 편이었다.
여러모로 불편한 점은 없어 보였다.
면회가 한참 진행되는 동안, 대박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필두와 포대장에게 고마움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포대장님. 행보관님. 두 분 덕분에 저희 아들이 군 생활 잘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보입니다. 사실 대박이 때문에 걱정을 좀 많이 했었는데…….”
“하하! 아닙니다! 저보다 행보관님이 노력해 주신 덕분이죠.”
모든 공을 행보관에게 돌리는 포대장이었다.
실제로 부대 관리는 필두의 역할이 컸다.
주기적으로 병사들과 면담을 실시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필두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 줬다.
그 덕분에 제1포대 병사들의 병영생활 만족도는 타 부대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포대장의 말을 접한 대박의 아버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국민 영웅답군요! 행보관님이라면 부족한 제 아들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믿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신뢰를 쌓는 건 참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드리무어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애초에 레디너스 시절 때에는 이러한 일들이 없다시피 했으니까.
병사들의 부모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간부, 강필두.
면회실에 퍼지는 훈훈한 온기를 멀리서 지켜보던 소예나가 의구심을 드러냈다.
“정말 저자가 드리무어 맡습니까?”
바로 옆에서 예나와 함께 짐 나르기를 도와주던 마일더, 황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을 들려줬다.
“어, 확실하다.”
“못 믿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제가 알던 드리무어가 아닌 거 같아요.”
“나도 처음에는 너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분명 드리무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글쎄.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
마일더도 필두의 모든 일을 알진 못했다.
이 세계로 건너온 이후, 드리무어에게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강필두, 당사자만이 알 터.
필두가 진수에게 솔직담백하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줄 리는 없다고 보는 편이 좋았다.
그러나 진수는 내심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저런 면이 드리무어의 진짜 모습일지도 몰라.”
“예? 말도 안 됩니다.”
“드리무어는 원래 처음부터 악인은 아니었다. 하르만 학살 사건을 계기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서 악인의 길을 걷게 된 거지. 어찌 보면 녀석도 피해자인 셈이야.”
“그래도…….”
“안다. 그렇다고 드리무어의 모든 행보가 용서되지 않는다는 걸. 아마 본인도 잘 알 거야.”
마일더가 아는 드리무어는 의외로 책임감이 강하다.
그래서 행보관이라는 직책을 덥석 맡게 되었음에도 욕먹는 일 없이 잘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남자.
그자가 바로 드리무어다.
‘악인이 아니라 우리와 뜻을 함께했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인재가 되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실력도 있고, 머리도 좋다. 능력도 있는데 왜 구태여 악인의 길을 걸어야 했단 말인가.
그 모든 해답은 하르만 학살 사건에 있다.
“하인드 님에게 연락 온 거 없나.”
“예.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그렇군.”
레디너스 대륙 측에서도 하르만 학살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실행되기 시작했다.
사건의 전모를 밝혀라.
그것이 마일더의 지시 사항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르만 학살 사건을 일으킨 원흉이 바로 이 세계에 있으니까.
‘유격 훈련 때 흑마법사들이 습격해 온단 말이지.’
필두에게 들었던 정보를 되새겨보던 마일더.
그가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
“에리나…… 가 아니군. 예나.”
“예. 진수 님.”
“다음 달 일정은 모조리 비워둬라. 특별한 일 아니면 웬만해선 참가하지 말고 대기하도록.”
“종교행사도 말입니까?”
“아니, 종교행사는 제외한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건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
마일더도 나름의 대책을 세워야 했다.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건 그의 성격에 맞지 않은 플레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