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32화
제33장. 사회의 공기(2)
유격 조교 후보들을 적은 명단을 살피던 필두가 하나포 쪽을 유심히 바라봤다.
황진수라는 이름 세 글자가 당당히 새겨져 있던 탓이었다.
“마일더. 또 무슨 꿍꿍이냐.”
진수는 다른 병사와 다르다. 그래서 그가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면 자연스레 의심부터 들었다.
뜬금없이 유격 조교라니.
하긴, 생각해 보면 진수만 한 조교도 찾아보기 힘들다. 신체 능력도 좋고, 규율과 규칙을 엄수하는 병사 아니겠는가.
군인으로선 조교 역할이 참으로 적격이지만, 필두는 가급적이면 진수에게 다른 이들과 달리 튀어 보일만 한 무언가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
괜히 골치 아픈 일이 늘어날지도 모르니까.
“마침 잘 됐군.”
유격 조교에 지원한 진수 덕분에 그를 따로 부를 명분이 생겼다.
“당직! 진수, 행보관실로 오라고 해라.”
“예, 알겠습니다!”
방송이 나간 이후, 5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에 진수가 행정반에 모습을 드러냈다.
“충성. 일병 황진수,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행보관님께서 부르신다. 들어가 봐.”
“무슨 일 때문입니까?”
“글쎄. 유격 조교 일 때문이 아닐까?”
당직은 그렇게 예상했다.
유격 조교 지원자 명단을 본 뒤에 진수를 불렀으니,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행보관실로 향했다.
“일병 황진수입니다.”
“들어오도록.”
문을 열고 행보관실로 들어서자, 문고리 부근이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발현했다.
외부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끔 하는 마법진이 발동했음을 뜻했다.
행보관실에 자주 들락날락했던 경력이 있는 진수였기에 이제는 어느 마법진이 어느 기능을 지니고 있는지 다 알 정도였다.
“무슨 일로 날 부른 거지?”
진수가 먼저 필두에게 호출 의도를 물었다.
진수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하는 필두.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고심이 많이 들었다.
마일더에게 과연 흑마법사들의 습격에 관한 정보를 공유해야 할까. 이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와일드카드를 사용하기로 한 이상, 여기서는 필두가 먼저 진심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얼마 전에 내가 출연했던 방송, 잘 봤나.”
“그거 자랑하려고 날 불렀나.”
“촬영 당시에 방청객으로 온 사람 중에 흑마법사 조직원이 있었다.”
“……뭣?”
마일더가 놀라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첫 번째.
흑마법사의 접근 자체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왜 나한테 그걸 알려주는 거지?”
필두는 여태 흑마법사에 관련된 일을 마일더와 전면 공유하지 않았다.
숨기고 싶은 건 숨기는 그런 면모를 보일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일더에게 정보를 공유한다? 뭔가 수상쩍어 보였다.
하나 필두는 오히려 대범하게 나갔다.
“왜. 듣기 싫은가?”
“…….”
“네가 듣기 싫다고 한다면 나가도 좋다. 나도 굳이 내 입 아프게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으니까.”
“까다로운 녀석이군. 좋다. 듣고 싶으니 말해봐라.”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이유는 묻지 말고 얌전히 들어라. 그것이 필두가 요구하는 조건이었다.
말속에 담긴 필두의 진의를 눈치챈 마일더는 이번만큼은 필두의 뜻에 따라주기로 했다.
“그 흑마법사 녀석이 나한테 와서 이렇게 말하더군. 나와 동맹을 맺고 싶다고 말이야.”
“동맹이라고? 아무리 봐도 함정인 거 같은데.”
“나도 처음에는 너와 같았다. 그러자 녀석이 괜찮은 정보를 하나 흘리더군.”
잠시 말을 멈췄다. 이후, 또박또박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유격 훈련 때, 흑마법사 세 명이 나를 습격한다고 했다.”
“저번에 그 무장공비 습격 사건 같은 건가.”
“비슷하겠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두 명에서 세 명으로 인원수가 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필두가 이들의 습격을 무서워하거나 하는 그런 건 아니다.
신경 쓰이는 건 오로지 하나뿐.
“이번 습격으로 난 놈이 제안한 동맹 의사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생각이다.”
“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지?”
“혹시 네 녀석이 나서서 동맹을 제안한 놈을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미리 말해두는 거다.”
“그자만큼은 죽이지 말아 달라?”
“그래.”
마일더가 그렇게만 행동해 줘도 필두에겐 크나큰 도움이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괜히 일 꼬이게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난 또. 나보고 도와달라는 건 줄 알았네.”
“네 도움 따윈 필요 없다. 어차피 녀석들은 내 밥이니까. 그리고 도와달라고 해도 네가 도와줄 리 만무하고.”
“혹시 또 모르지. 정말로 도와줄 수 있을지도.”
이번에는 진수 쪽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필두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수는 그가 병사들로부터, 혹은 그 주변인들로부터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드리무어라는 희대의 악인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는 악인의 길이 아닌 다른 평범한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마일더의 예상대로였다. 그래서 그는 드리무어와의 적대적 관계보다 지금처럼 대치 상황을 계속 유지하며 그의 심경, 태도 변화를 실시간으로 보고, 느끼고 싶어 했다.
드리무어도 결국 하르만 학살 사건의 피해자인 셈이니까.
그렇다고 그가 저지른 범죄들이 모두 용서되는 건 아니다. 속죄할 건 해야 한다. 그것이 진수의 생각이다.
알기 힘든 진수의 의도에 필두가 혀를 찼다.
“내 주변에 이상한 녀석이 한 놈 더 늘었군.”
“피차일반이야.”
두 사람의 대치 관계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 * *
토요일 아침은 병사들에게 있어서 축복과도 같은 시간이다.
일요일보다 토요일 오전을 더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종교행사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기독교 종교행사의 경우에는 혜정을 비롯해 매주 도우미를 자처하는 소유나 같은 미인들이 자주 얼굴을 비추는 탓에 갈 맛이 나긴 했다.
그러나 때로는 그냥 막사에서 편히 쉬는 게 더 좋을 때도 있었다.
요즘이 딱 그러한 시기였다.
그러나 몇몇 분과는 아침부터 분주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연도야! 애들 세면백 다 챙겼냐?”
“예, 챙겨뒀습니다!”
“목욕 타월은?”
“PX에서 사둔 거 넣어뒀습니다. 그걸로 괜찮을 겁니다.”
“잘했다.”
하나포 선임들이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겨준다.
이들이 뭘 하는 것인지 조금의 감도 잡히지 않았다.
“대박아. 저건 또 뭐하는 거야?”
의성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물었다. 군대 썰을 많이 접하고 입대한 대박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겠는데.”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대뜸 정성태가 두 사람의 세면백을 요구했다.
선임이라서 안 줄 수도 없었기에 그대로 세면백을 넘겼다. 이후, 연도와 함께 이것저것 챙겨 욱여넣기 시작했다.
정성태가 빵빵해진 세면백을 들고서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들고 행정반으로 가라.”
“세면백 들고 왜 행정반에 갑니까?”
“기억 안 나냐. 오늘 행보관님이 너희 목욕탕 데려가신다고 했잖아.”
“아……!”
이제야 기억이 난 모양인지 두 신병이 곧장 성태의 말에 따라 행정반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목욕탕 가는데 왜 이리 호들갑일까.
“대대 목욕탕 가는 거 아니야?”
“그러게.”
대대 목욕탕은 관사 건물 바로 옆에 붙어 있다.
대단한 곳도 아니었기에 아침부터 괜히 호들갑을 떨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얕았음을 깨달았다.
행정반에 모인 4명의 신병을 확인한 필두가 사복 차림으로 행정반을 나섰다.
“사열대 앞에 가면 내 차가 있을 거다. 거기 탑승해라.”
“……?”
대대 목욕탕까지 가는데 무슨 차를 타고 간단 말인가.
의구심은 점점 더 높아졌다.
한편. 신병들을 데리고 본인의 차량으로 향하는 필두.
두 달 전, 덩치가 좀 큰 차량으로 바꾼 덕분에 네 명의 신병이 타도 널찍했다.
앞좌석에 탑승한 필두가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있나.”
“점심 말입니까?”
“그래.”
식당에 가서 먹으면 될 것이지, 굳이 점심 메뉴를 묻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점점 의구심만 쌓여갔다.
필두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신병들이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필두는 그것이 긴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선택지를 부여하기로 했다.
“짜장면, 탕수육, 피자, 치킨, 삼겹살 등등. 어느 게 먹고 싶냐.”
“짜장면 먹고 싶습니다!”
“전 짬뽕 좋아합니다!”
병사들이 각자 선호하는 기호 식품들을 언급했다.
4명의 뜻을 종합한 필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점심은 중국집에서 먹는 게 좋겠군.”
“중국집 말씀이십니까?”
“대대 식당에서 먹는 게 아닙니까?”
“아직 못 들었나보 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필두의 차량이 대대 관사를 지나쳤다.
도달한 곳은 위병소 앞.
“바깥에 나갈 거다.”
“……!”
입대 이후 처음 접하는 사회 공기.
그 설렘 때문일까. 신병들의 심장은 마치 첫 사랑을 만난 것처럼 두근거렸다.
* * *
민간 사회의 공기는 병사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반가웠다.
운이 좋게도 미세먼지 현황 또한 ‘좋음’이었다.
달리는 차량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이리도 상쾌했던가.
포차가 아닌 일반 차량의 승차감은 마치 침대에 누워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군대를 가면 사회에 있을 때 너무나도 당연시하던 것들이 한없이 소중해진다.
4명의 신병이 그러했다.
30분 정도 도로를 달린 끝에 마침내 정차한 차량.
“여기다. 내려라.”
“예!”
아쉬움을 뒤로하고 차량에서 내리는 신병들이 주변을 둘러봤다.
일반 아파트 단지였다.
바로 근처에 대중목욕탕이 보인다. 필두가 말했던 대로 이들은 정말로 군대 목욕탕이 아닌 사회의 목욕탕에 온 것이다.
토요일 주말 아침을 즐기는 민간인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목격됐다.
유모차를 끌고 이동하는 젊은 부부.
초등학생들의 웃음소리.
젊은 여대생들의 수다 떠는 모습은 미의 여신들을 떠올리게 했다.
“와…… 씨. 감동의 쓰나미 몰려온다.”
“공감한다.”
신병들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에 이들에게 돌아온 필두가 건물 안쪽에서 손짓했다.
“들어와라.”
“네, 알겠습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대중목욕탕으로 향하는 이들.
남탕 문을 열자, 꽤 많은 사람이 목욕을 즐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들 많네.”
“그러게.”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불뚝이 아저씨들이 대다수였다.
부여받은 개인 키를 가지고 이동하던 도중이었다.
앞서 걸어가던 대박이 급작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뭐야. 너, 왜 그래?”
“야, 야야야……!”
갑자기 대박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남은 신병 3인방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를 책망했다.
그러나 대박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들 역시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막 목욕을 마친 모양인지 군복을 차려입는 군인 한 명.
그의 어깨 견장에 새겨진 계급은 남달랐다.
“워, 원 스타……?”
은색 별 하나가 주는 파괴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