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31화 (131/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31화

제33장. 사회의 공기(1)

필두가 생각했던…… 아니, 원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유격만 아니었으면 했다. 그런데 설마 정확하게 한 달 뒤가 유격훈련 기간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닙니까?”

필두가 항의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포대장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유격 훈련장 일정이 꽉 차 있다고 하더군요. 이것도 겨우 비집고 들어간 거라고 들었습니다.”

하기야. 유격장에서 유격훈련 받는 게 9090대대 한 곳은 아니다.

듣도 보도 못한 부대들도 사방에서 다 몰려든다. 부대는 많고, 유격장은 한정되어 있고. 어쩔 수 없이 서로 조율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9090대대는 6월 중순으로 확정되었다.

‘골치 아프군.’

하필이면 왜 그때란 말인가.

다른 기간 다 좋은데, 가장 원치 않은 곳에 정확히 유격 훈련이라는 네 글자가 일정표에 자리매김을 했다.

필두가 대대장에게 찾아가 유격 일정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필두가 하는 말인데, 과연 대대장이 쉽게 그의 말을 흘려들을 수 있을까.

국방부 장관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필두이기에 대대장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나 문제는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왜 유격 훈련을 미뤄야 하는지. 혹은 앞당겨야 하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대대장은 필두의 의견을 분명 수용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없다는 것이 필두에겐 한없이 절망적이었다.

‘운도 안 좋군.’

예전부터 그는 운수가 별로 안 좋은 편이긴 했다. 그러나 설마 이렇게까지 안 좋을 줄이야.

‘어쩔 수 없군. 웬만하면 이건 안 하려 했는데…….’

결국 필두는 와일드카드를 꺼내 들기로 결심했다.

‘마일더. 이 녀석이 나에게 제대로 협조해 줄지 모르겠군.’

* * *

포대장과 이야기를 마친 후.

분대장들에게 유격 훈련이 다음 달에 있을 거라는 말을 전달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분대장들의 표정은 한없이 무거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유격을 즐기기엔 어려운 부분이 상당수 존재한다.

주간, 야간 행군도 그렇고 장애물 넘기도 그렇고. 위생도 최악이다. 제대로 된 세면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으며, 볼일을 볼 때에도 푸세식을 이용해야 한다.

겨울에는 그나마 밑이 얼어서 다행이지만, 여름은 악취가 그대로 올라온다. 게다가 벌레까지 꼬이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생활을 며칠 동안 해야 하다니. 굳이 멀리 가서 지옥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

유격 훈련장이 바로 지옥이다!

이러니 병사들의 표정이 즐거울 리 없었다.

“하아, 우린 뒈졌다.”

“끝났네, 끝났어.”

여기저기서 절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오히려 유격 빨리 받고 쉬는 게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긴 하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일지도…….”

어차피 유격 훈련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음을 비우고 훈련에 임하는 게 좋다. 괜히 스트레스받으면 본인만 손해니까.

한편. 선임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진수가 연도를 찾았다.

“조연도 일병님.”

“어. 왜?”

“유격이라는 게 뭡니까?”

“아, 그러고 보니 너도 이번에 유격 처음 받지?”

조연도가 어깨를 펴 보였다.

자신감을 표출하는 제스처의 일환이었다.

“유격이라는 건 말이다…….”

설명에 임하려는 순간, 도혁이 연도의 말을 끊었다.

“야. 너도 유격 안 받아봤잖아.”

“전도혁 상병님! 후임들 앞에서 폼 좀 잡아보려고 했었는데 그걸 방해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네 거짓말이 다 들통 나 개망신 당하기 전에 막아준 거다.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하나포에서 유격 훈련을 뛰어본 멤버는 전도혁과 정성태, 그리고 김조항. 이 셋뿐이다.

연도 밑으로는 유격을 뛰어본 경험이 없다.

본래 두려움은 무지(無知)에서 나오는 법이다.

유격이 어떤 훈련인지 제대로 모르기에 걱정이 앞섰다.

“대박아.”

“이병 박대박!”

도혁이 대박을 지목하며 이렇게 물었다.

“너, 입대하기 전에 유격에 대해 뭐라고 들었냐? 인터넷 같은 거에서 많이 찾아봤다며.”

“예, 그렇습니다!”

박대박은 입대 전에 군대에 관련된 썰이라든지 소문, 정보 등을 많이 접했다.

덕분에 훈련소 들어가기 전에 총을 미리 사가야 한다든지 하는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적은 없었다.

“훈련의 양대 산맥이라 들었습니다. 여름에 유격이 있다면, 겨울에는 혹한기가 있다고 말입니다.”

“유격이 힘든 이유가 뭔지는 알고 있냐.”

“유격체조 때문이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네.”

유격체조. PT체조라고도 불리며, 유격의 꽃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주간, 야간 행군을 재치고 병사들이 두려워하는 대상 1순위에 당당히 랭크된 유격체조. 직접 체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유격체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자세가 있는데.”

“그게 뭡니까?”

정보 모으기를 좋아하는 박대박이 도혁의 말에 격한 관심을 보였다.

호응해 주는 쪽의 반응이 좋아서일까. 도혁이 너스레를 떨었다.

“6번 발 벌려 뛰기. 이게 가장 어렵다. 그리고 가장 쉬운 게 8번 온몸 비틀기야.”

“오, 그렇습니까!”

“만약에 조교한테 받고 싶은 유격체조 말해보라고 하면 주저하지 말고 ‘8번 온몸 비틀기 하겠습니다!’라고 말해라. 그러면 같이 유격체조 받는 녀석들도 너에게 잘했다고 할 거다.”

“꿀팁 감사합니다!”

곧장 군용 수첩을 꺼내 도혁이 들려준 정보를 바로 적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인 김조항이 도혁의 말에 태클을 걸었다.

“후임 데리고 장난치지 마라, 도혁아.”

“듣고 계셨습니까?”

“아까부터. 그리고 온몸 비틀기가 가장 쉽기는 개뿔. 가장 어려운 거잖아.”

순간 박대박이 받아 적기를 멈춘 채 도혁에게 닦달했다.

“반대였습니까?”

“뭐, 그런 셈이지.”

“너무하십니다, 전도혁 상병님. 후임을 지옥으로 보내려 작정을 하셨지 말입니다.”

“이게 다 애정과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야. 크큭.”

박대박은 도혁의 이런 언행이 악마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 조항이 분대장 수첩에 적힌 문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잊고 있었네. 애들아. 잠깐 모여 봐라. 성태도 좀 불러오고.”

“예, 알겠습니다.”

진수가 생활관에서 바로 튀어 나가 진수를 데려왔다.

분과별 간담회가 아님에도 하나포 전원이 집합했다.

혹시 신병들이 또 뭐 잘못해서 갈구려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내심 들었다.

하나 조항은 후임을 막 갈구고 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걱정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정보를 들려줬다.

“혹시 너희 중에 유격 조교 해보고 싶은 사람 있어?”

“조교 말입니까?”

“조교라니…….”

분대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유격 전문 조교가 있긴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해당 부대에서 유격 조교를 차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격 조교하면 유격 훈련은 면제될 거다. 대신, 마냥 좋다고 볼 수가 없는 게…… 2주 동안 조교 훈련을 받아야 해. 이게 유격보다 힘들다는 건 기억해 둬라.”

“그러면 굳이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연도가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입에 담았다. 하나 반전이 존재했다.

“대신, 유격 조교하면 포상휴가 준다고 하더라.”

“……!”

포상휴가라는 말에 병사들의 눈빛이 싹 달라졌다.

젊은 군인을 매료시키기에 좋은 요소 중 하나. 그것이 바로 포상휴가다.

“4박 5일 포상휴가. 어때, 탐나지?”

조항이 먹기 좋은 미끼를 던졌다.

탐이 날 수밖에 없는 미끼였다.

“단, 분과별로 한 명씩만 차출한다고 하더라. 지원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바로 손들…….”

“상병 전도혁!”

“일병 황진수.”

도혁과 진수가 일제히 손을 들었다.

관등성명을 대는 것도, 거수하는 것도 둘 다 비슷했다.

누가 먼저라고 보기 힘들었다.

“도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진수, 너는 좀 의외네.”

포상휴가에 욕심을 내지 않았던 진수가 자처해서 유격 조교를 자원하니 이상해 보일 법도 했다.

그러나 진수의 목표는 포상휴가가 아니었다.

“휴가보다 조교라는 걸 해보고 싶습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예, 그렇습니다.”

“넌 역시 특이한 놈이야.”

다른 사람들은 포상휴가 때문이라도 조교를 하고 싶어 하는데, 진수는 고작 호기심 때문에 유격 조교를 하려고 하다니.

하긴. 이래야 진수다웠다.

“여하튼 두 명이 됐네. 어떻게 할래?”

도혁이 슬쩍 진수에게 눈치를 줬다. 선임이니까 알아서 나한테 양보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여기에 꿈쩍할 진수가 아니었다.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결국 도혁이 직접 실력행사를 나서기로 했다.

“진수야. 선임이 하고 싶대잖아. 양보해라.”

그러나 조항이 도혁의 말을 커트했다.

“야.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냐.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다고 하잖아. 물론 여기가 군대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회가 있으면 선임, 후임 구분하지 말고 정당하게 경쟁해라.”

“뭐로 정당하게 경쟁합니까?”

“뻔하지. 가위바위보밖에 더 있겠냐.”

“하, 하하하하하…….”

참으로 평화로운 수단이었다.

조항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찌 저항할 수 있을까.

결국 가위바위보로 유격조교 자리를 결정짓기로 합의를 봤다.

도혁과 진수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진수야. 참고로 난 말이다.”

도혁이 사악한 미소를 선보였다.

“주먹을 낼 거다.”

“…….”

되지도 않는 심리전이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진수. 그사이, 조항이 신호를 줬다.

“가위바위보!”

손을 뻗는 순간에도 도혁의 머리는 끊임없이 회전했다.

‘내가 주먹을 낼 거라는 생각에 녀석은 보자기를 생각하겠지? 그때 내가 가위를 내면 이기니까 진수가 한 번 더 생각해서 주먹을 낼 수도 있어. 그럼 나는 보자기를 내면…… 아니, 한 번 더 생각하자! 그러면 녀석이 내 보자기를 예상해서 가위를 낼 테니까 나는 주먹이다!’

뇌세포들끼리의 치열한 토론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은 주먹.

그러나 진수가 내민 것은…….

보자기였다.

“왜 보자기 냈냐?”

“그야 전도혁 상병님이 주먹 내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냥 보자기 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혁이 속으로 절망했다.

‘이런 생각 없는 녀석!’

진수가 이렇게 단순한 놈일 줄 알았더라면 그냥 3~4수를 내다보지 말고 가위를 낼 걸 그랬다.

하나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

“유격 조교는 진수가 가는 걸로 보고하마.”

“감사합니다. 전도혁 상병님이 일부러 저한테 자리 양보해 주셨으니, 최선을 다해 조교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수는 도혁이 일부러 자신이 주먹을 낼 거라는 정보를 흘린 게 본인을 위해서 한 행동인 줄로 착각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진수에게 차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한숨만 더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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