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29화
제32장. 우리 행보관님은 연예인(4)
스튜디오의 인테리어는 꽤 간단했다.
진행자 둘이 앉는 의자와 게스트가 앉을 수 있는 소파, 그리고 포스트잇을 테마로 삼은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거대한 포스트잇 위에는 오늘 이들이 주제로 삼을 테마 토크 관련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다.
“대국민 행복 프로젝트! 해피 캠프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진행을 맡은 이미현입니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오디오를 가득 채웠다.
방청객들도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왔다.
아직 필두와 유미는 무대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먼저 미현과 제훈이 프롤로그 격에 달하는 멘트들을 주고받은 이후, 순서에 맞춰 게스트들을 소개할 것이다.
그 타이밍에 무대 위로 올라가면 된다.
가장 먼저 필두가, 그다음에 유미가 나설 예정이었다.
주간에 있던 굵직한 이야기깃거리들을 언급하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미현과 제훈.
그중에서도 특히나 이미현은 아나운서 출신답게 유창한 말솜씨로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했다.
오제훈은 정석적인 이미현과 다르게 간간히 넣는 애드리브와 유머러스함으로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했다.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이 잘 되어 있군.’
무대 뒤에서 지켜보는 필두도 두 MC의 시너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게스트 분들을 모셨습니다. 세간을 후끈 달아오르게 한 분들이죠?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 대한민국의 영원한 행보관님! 강필두 원사님과 소유미 양을 모셨습니다!”
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방청객 쪽에서 엄청난 함성 소리가 새어나왔다.
물론 스태프의 지시에 따른 연출이 가미되어 있긴 했지만, 필두를 보고 싶어 일부러 방청 신청을 한 이도 적지 않았다.
각자 할당된 자리에 앉기 전에 미현이 두 게스트에게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등장 순서에 따라 자기소개를 하기로 했기에 필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9090대대 제1포대 행정보급관을 역임하고 있는 원사, 강필두라고 합니다. 충성!”
평범하게 인사하는 것보다 군인이라는 신분을 상기해 일부러 거수경례를 하기로 했다.
필두의 영향 때문일까.
“안녕하세요! 설틴의 소유미예요! 충성!”
유미도 인사 대신 거수경례를 택했다.
필두가 거수경례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귀여움. 이 말이 잘 어울렸다.
인사를 마친 후에 자리를 잡자, 미현이 환한 미소와 함께 시청자들을 위한 부가 설명을 읊었다.
“우리 행보관님은 몇 달 전에 있었던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서 지대한 공을 세우신 분으로 알려졌죠? 놀랍게도 행보관님의 부대는 보병부대도 아니고, 포병부대라고 하네요.”
“와……!”
방청객들이 감탄사를 자아냈다.
일반 보병부대가 아닌 포병부대가 무장공비 둘을 사로잡았다는 게 색다르게 다가왔다.
뒤이어 필두가 좀 더 보충해 당시의 상황을 언급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무장공비가 발견된 이후에 신고를 받고 정식으로 출동한 것도 아니었죠. 혹한기 훈련 도중이었는데, 저희 부대가 가장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제일 먼저 현장에 투입되었죠.”
“우연의 일치네요.”
“개인적으론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우연이었지만요.”
필두의 농담조에 듣는 이들이 웃음소리를 자아냈다.
이런 식으로 토크를 주고받는 방송이 처음일 텐데도 필두는 곧잘 적응해 나갔다.
하영원 PD도 매우 만족스러운 눈으로 필두를 응시했다.
필두와 미현, 두 사람의 차례가 끝난 이후 바통을 넘겨받은 오제훈이 이번에는 유미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유미 양은 ‘전선을 사수하다!’에 출연해서 많은 인지도를 받았어요. 실제로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 전과 후, 좀 달라진 게 있나요?”
“군대 행사 요청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 그게 가장 큰 거 같아요.”
유미 역시 처음에는 유머러스함을 담은 멘트로 서막을 장식했다.
확실히 연예인이라 그런지 유미의 말 구석구석에서 노련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점은 필두도 보고 배워야 할 점이기도 했다.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하 PD도 딱히 중간에 끊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흐름을 이끌어갈 것을 지시했다.
“행보관님한테 질문 하나만 드릴게요.”
미현이 필두를 지목했다.
“무장공비랑 마주했을 당시에는 무섭지 않았나요? 저도 다큐를 보긴 했었는데, 그때는 부하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몸이 먼저 움직이셨다고 했었는데요. 그래도 인간인 이상, 무섭다든지 하는 그런 건 있지 않았을까요?”
“미현 양 말씀대로입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에는 두려움을 느끼죠. 하지만 눈앞에서 부하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래서 직접 행동에 나설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필두의 답변이 끝나자마자 오제훈이 자신의 턴임을 알렸다.
“사실 행보관님. 제가 오늘 녹화하기 전에, 9090대대에 몰래 찾아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나눠봤어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현장 취재를 하셨군요.”
대단한 열정이었다.
하기야. 필두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낀 오제훈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원래 제가 개그맨 하기 전에 리포터로 활동했었거든요. 근데 거기 간부분들도 그렇고 병사들도 그렇고 죄다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욕인가요?”
“하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파포대 행보관님은 그 누구보다도 부대를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라고 말이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직접 그렇게 들으니 낯 뜨겁긴 합니다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그런 행보관이 될 수 있게끔 노력하고 있습니다.”
칭찬받는 건 참으로 어색하다.
괜히 해피 캠프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른 게스트들이었다면 분명 여기서 소소한 행복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본인이 살아온 행실이 나쁘지 않았음을 확인받은 셈이니까.
그러나 뭐랄까.
드리무어에게는 도리어 창피함만을 주는 꼴이었다.
* * *
1시간가량 이어진 녹화 촬영.
예정은 2시간 반 정도였다.
거의 중반부를 넘어설 때까지는 주로 필두에게 토크가 집중되었다. 후반으로 넘어가 다큐멘터리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유미의 분량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필두는 여유를 차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정말 방송이라는 걸 하고 있구나.’
처음에는 실감이 잘 안 났다. 그러나 촬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지금의 상황이 현실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방송에 슬슬 적응해갈 때였다.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 쓰이는군.’
진행자들이 유미와 멘트를 주고받는 동안, 필두의 시선이 방청객 쪽으로 향했다.
촬영이 시작될 때, 있어서는 안 될 기운이 감지되었다.
흑마법의 흔적이다.
처음에는 필두가 착각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탁한 마나의 기운은 점점 선명하게 감지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흑마법사 조직원이 필두를 습격하려 했다면 진작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직원은 일부러 필두를 방치했다.
마치 필두에게 일부러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이.
‘무슨 의도지?’
지금 단계에선 알기 힘들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중에 누군가는 흑마법을 다룰 줄 안다는 점이다.
유미의 경우와는 조금 달랐다. 꼭두각시가 아닌 흑마법사, 본인이 직접 이곳에 잠입했다.
필두는 그 점에 강한 확신이 들었다.
‘누구냐. 어떤 놈이지?’
스태프? 방청객? 아니면 출연진들?
후보가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아직까진 누가 흑마법사라는 걸 정확하게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곳에 흑마법사가 있다. 그리고 그 흑마법사는 일부러 필두에게 본인의 존재감을 알려오고 있다. 하나 누군지는 특정 짓지 못한다. 이것이 필두가 알아낸 사실들이었다.
촬영은 예상 시간보다 30분 정도 빠른 시간 내에 마무리 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하 PD의 말을 시작으로 스태프, 출연진들이 서로의 노고를 치하했다.
다음 스케줄이 있는 유미가 가장 먼저 이동 준비를 서둘렀다.
그 와중에 필두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걸 잊지 않았다.
“행보관님, 그럼 나중에 꼭 연락 주세요!”
“하하, 네. 기억해 두겠습니다.”
유미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 아니겠는가.
유미의 친절에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현과 제훈, 하 PD와도 고생했다는 식으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방송국을 나선 필두. 그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후,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한 남자.
뿔테 안경에 호리호리한 체형의 젊은 남성이 긴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겼다.
“촬영 재미있게 봤습니다, 행보관님. 국민적 영웅을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신기하네요. 혹시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제는 사인 요청을 받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네, 그러죠.”
“감사합니다! 친절하시네요, 행보관님은.”
하얀 종이와 펜을 건네받은 필두가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완성한 사인 종이를 남자에게 다시 건넬 때, 필두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행보관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볼 근처를 문지르는 그의 퍼포먼스의 필두의 목소리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언제까지 되도않는 연기 따위를 하고 있을 거냐.”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네 녀석이 흑마법사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
묵직한 필두의 팩트 폭행에 순간 뿔테 안경의 남자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눈치가 상당히 빠르네요, 행보관님.”
“내가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네가 티를 너무 많이 내고 다닌 거겠지.”
“하긴, 그것도 부정 못하겠네.”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로움을 표출했다.
김한과 조승천, 두 남자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은 사활을 걸었다.
필두에게 죽느냐, 아니면 그를 쓰러뜨리고 살아남느냐.
생존의 기로에 서 있던 탓에 두 흑마법사는 죽을 각오를 하며 필두에게 덤벼들었다.
하나 결과는 그들에게 있어서 처참했다.
너무나도 허망하게 필두에게 생포되었고, 이후 비밀 누설이라는 죄목 하에 같은 조직원들에게 암살을 당했다.
서수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을 죽인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싸우려면 다른 장소가 좋지 않을까. 여기선 눈치 볼 일이 많으니까.”
필두가 넌지시 제안을 했다.
그러나 수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애초에 싸우러 온 것도 아니니까.”
“그럼 뭐 하러 왔지?”
이후 이어지는 수오의 말은 필두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동맹을 제안하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