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27화 (127/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27화

제32장. 우리 행보관님은 연예인(2)

방송 출연.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필두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뜬금없이 방송 출연이라니. 다큐멘터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필두를 따로 불러 방송까지 출연시킨다는 말은 애초에 없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련된 겁니까?”

혹시 2부 제작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이런 말을 해봤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아니요. 제 지인 중에 토크쇼 프로그램 총괄하는 사람이 있는데…… 혹시 아시려나 모르겠네요. 프로그램 명칭이 ‘해피 캠프’라고 하는데, 아십니까?

“해피 캠프면…….”

바로 가까이서 필두의 혼잣말을 접수한 혜정이 아는 척을 했다.

“금요일 저녁마다 하는 프로그램이잖아. 필두 씨도 알지 않아?”

“알긴 아는데.”

시청률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혜정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나 PD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옆에 누가 계신가 보군요.

“예. 데이트 중이었거든요.”

-아하! 저번에 대대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 목사님 따님분이시군요!

안 보는 사이에 나 PD에게까지 혜정의 이야기를 해버렸나 보다.

-기회가 된다면, 여자 친구 분도 같이 방송국에 오셔도 됩니다. 출연은 좀 그렇지만, 방청 자리 쪽은 충분히 확보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아직 출연하겠다는 말을 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나 PD는 필두의 출연을 거의 기정사실로 만들고 싶어 했다.

“제가 출연하고 싶다 해도 여러 가지 이해 계가 있는지라 쉽게 결정할 만한 사항이 아닌 거 같군요.”

필두는 군인이다. 군인은 함부로 언론, 방송에 노출되어선 안 된다.

나 PD도 이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장관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뒀습니다! 만약 그것 때문에 고민이셨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보장하죠!

“…….”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하기야. 상부에서 허락을 맡았으니 필두에게 직접 출연 제의를 해오는 게 아니겠는가.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무엇이든 말씀해 보세요.

“TV 출연은 사전에 예고가 없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일이 이렇게 추진되는 겁니까?”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나 PD는 오히려 이런 출연 제의를 당연하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대중들이 관심을 보이니까요.

필두도 대충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인지도 높은 사람을 출연시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상영 이후 하루가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검색어 순위에 남아 있는 강필두라는 이름 세 글자. 이는 그가 대중들에게 얼마나 큰 화두가 되었는지를 증명해 보였다.

실제로 데이트 도중에 필두를 알아본 사람들이 사인, 악수 요청을 해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나 PD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출연료도 짭짤하게 드릴 겁니다.

“딱히 돈이 문제는 아닙니다만…… 여하튼 알겠습니다.”

-출연해 주시는 겁니까?

“아니요, 고민 좀 더 해보겠습니다.”

-그, 그렇군요. 가급적이면 이번 주 안으로 대답 주실 수 있나요?

“예.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나 PD의 목소리에는 많은 기대감이 담겨져 있었다.

상부로부터 정식으로 허가까지 받았다. 그 노력을 생각하면 실로 가상하나, 문제는 필두가 카메라 앞에 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통화를 마치자마자 혜정이 속사포 마냥 물어왔다.

“필두 씨, 해피 캠프에 나가는 거야?”

“아직 결정한 건 아니야.”

“나가면 좋은데. 왜?”

“난 광대놀이가 싫거든.”

필두는 연예인을 광대라고 생각했다.

만들어진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광대. 진지한 성격의 필두는 광대를 연기하기엔 자질 부족이었다.

그래서 모처럼 들어온 TV 제의를 잠시 보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혜정의 생각은 달랐다.

“나가서 군인들의 고충이라든지 아니면 처우 개선 같은 걸 어필할 수 있는 기회도 되잖아. 방송의 힘은 굉장하니까.”

“그런 쪽으로도 생각할 수 있군.”

필두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을 방송에 나가서 전부 다 할 수는 없었다. 편집이라는 게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일단 고민 좀 해보는 편이 좋겠어.”

“응. 난 필두 씨 의사를 존중하는 쪽으로 할게.”

혜정도 구태여 필두를 억지로 카메라 앞에 세우고 싶지 않았다.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필두에게 반한 여성 팬이라도 나오면 애인으로선 골치 아프니까.

* * *

월요일 아침부터 9090대대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행보관님! 해피 캠프 나가신다 들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나가실 때 이미현 씨 사인 좀 받아주실 수 있습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현은 해피 캠프 메인 MC의 이름이었다.

빼어난 외모 덕분에 많은 남성 팬을 거느리고 있는 방송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필두는 들러붙는 간부들의 기대감에 초를 쳤다.

“아직 나간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가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가면 이미현 씨도 볼 수 있는데!”

점점 높아지는 부사관들의 목소리에 필두가 짜증을 냈다.

“나가든 안 나가든 내 마음이니까. 그리고 하나포 반장, 너, 이미현이라는 그 아가씨 팬이냐. 아까부터 왜 이리 난리야.”

“실은 제가 초창기 팬클럽 맴버지 말입니다.”

이 말, 어디서 들은 적 있었다.

포대장이 설틴의 초창기 팬이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이 부대는 연예인 팬클럽 멤버가 왜 이리 많아.’

그래도 본래의 업무를 등한시하면서까지 팬클럽 활동을 하는 건 아니었기에 잠자코 있기로 했다.

TV 출연 이야기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진행해야 할 업무가 있었다.

“당직. 신병 4명 행정반으로 오라고 해라.”

“예, 알겠습니다!”

신병 단체 면담을 하기 위함이었다.

각 포상에서 견인곡사포 포병에 대한 가르침을 선임으로부터 받던 신병 4명이 빠르게 행정반으로 모여들었다.

4명이 다 왔음을 확인한 필두가 행보관실로 손짓했다.

“들어와라.”

“예!”

4명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필두에 대한 악명은 이미 선임들에게 충분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필두도 이들이 왜 자신에게 겁을 먹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구태여 언급은 하지 않기로 했다.

강필두란 사람은 악인 시절의 드리무어와는 별개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생활은 할 만한가.”

“예, 그렇습니다!”

“밥도 맛있고, 선임들도 잘 대해줍니다!”

형식적으로 좋은 말들을 들려줬다.

“하나포는 어떠냐.”

전의성과 박대박에게 질문의 초점이 집중되었다.

순간 두 사람이 눈빛 교환을 했다.

‘뭐라고 답해야 해?’

묻는 전의성 위에 대답하는 박대박이 있다.

‘내가 입대하기 전에 봤던 게시판 글에 의하면, 여기선 무조건 좋게 말해야 한다고 했어.’

‘오케이!’

말맞추기 작전 완료. 이제 실행만 남았다.

“최고의 분과라고 생각합니다!”

“선임분들이 정말 친절합니다! 천사인 줄 알았습니다!”

입에 바른 소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하나포는 후임들에게 모질게 대하거나 하는 그런 문화 같은 건 없었다.

분대장인 김조항이 그런 걸 용납할 만한 인물도 아니고 말이다.

여기서 필두는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었다.

“너희 맞선임이 진수지.”

“예, 그렇습니다!”

“어떠냐. 잘 대해주는 거 같나.”

“그건…….”

“…….”

의성과 대박이 무의식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런 와중에 의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좀 꽉 막힌 부분도 있지만, 잘 대해주시는 거 같습니다.”

순간 대박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무조건 좋은 말만 하자고 합의를 봤더니, 단점을 말하면 어쩌자는 건가.

그러나 필두는 의성의 답변을 높게 평가했다.

“정확하군. 그 녀석은 예전에도 답답한 구석이 있었지. 요즘은 그나마 좀 나아진 거 같지만, 그래도 여전한 건 여전하더라.”

“황진수 일병과 예전부터 아는 사이셨습니까?”

“아니, 남자의 감이다.”

드리무어와 마일더는 떨어지기 힘든 운명 같은 존재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악연이다.

그 악연이 설마 다른 차원으로까지 연결될 줄은 몰랐다.

필두가 노린 건 흑마법사 조직원들을 강제 차원 이동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설마 마일더가 필두처럼 다른 사람의 육체를 빌려 이곳으로 넘어올 줄이야.

이것까진 예상치 못했다.

그래도 아직까진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거 같으니 다행이었다.

“아무튼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말 잘 들어라.”

“예, 알겠습니다!”

진수를 향해 칭찬인지 악담인지 모호한 평가를 내린 필두였다.

* * *

며칠 뒤.

출근하자마자 필두는 대대장실로 직행했다.

그곳에는 대대장뿐만 아니라 주임원사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충성!”

“오셨습니까, 행보관님. 일단 좀 앉으시죠.”

대대장과 주임원사의 얼굴에 결의가 느껴졌다.

이들이 필두를 따로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미리 타둔 녹차를 한 모금 기울인 대대장이 단도직입적으로 필두를 부른 이유를 들려줬다.

“행보관님께서 방송 출연을 고민 중이라는 말, 들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가급적이면 방송 출연 제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군요.”

“물론 강압적인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부탁입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 가지지 마세요.”

군인이 자주 언론에 노출되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긴 했으나, 필두의 경우는 다르다.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는 필두를 이미지 마케팅으로 활용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의도였다.

그럼에도 필두는 일부러 방송 출연을 고민했다.

노림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주임원사가 슬그머니 한 마디를 던졌다.

“자네가 그 해피 캠프인지 뭔지에 나간다면, 상부가 여러 가지로 혜택을 줄 거라 하더군.”

“그렇습니까.”

“자세한 건 말 못하고. 대신 내 생각으론 보험 차원에서라도 이런 제안 같은 걸 받아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네. 혹시 또 모르지. 문제가 생겼을 때 면죄부가 될지도.”

외부인이 들으면 위험한 발언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하나 필두가 노리는 게 바로 이거였다.

상부로부터의 모종의 약속.

그 약속은 구체적인 것으로 형태화되어 있지 않지만, 나중에 가면 분명 써먹을 수 있는 와일드카드가 될 것이다.

모든 조건은 갖춰졌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야.”

주임원사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시점에서 대대장이 또 다른 부탁을 해왔다.

“그리고 행보관님. 혹시 방송 출연하시면…… 이미현 씨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여기에 연예인 팬이 한 명 더 있을 줄이야.

필두도 예상치 못했다.

* * *

다수의 모니터를 응시하던 서수오가 흥미로움을 드러냈다.

“강필두. 졸지에 연예인 됐네.”

얼마 전에 대형 몰에서 벌어졌던 소동도 서수오는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을 했었다.

뿐만 아니라 나 PD로부터 방송 출연 제의까지 받은 정보도 이미 다 접수했다.

하나 수오는 이 모든 정보을 조직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 또한 나름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피 캠프라고 했지? 어디 보자.”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원하는 사이트 창을 띄웠다.

“찾았다.”

그가 띄운 인터넷 창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해피 캠프 방청 신청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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