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25화
제31장. 내게도 후임이(5)
행보관실에서 나온 도혁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필두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러고서 도혁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마. 잘 기억해둬라.’
‘예, 행보관님.’
‘두 녀석이 계속 하나포를 건드려도 가만히 있어라. 대들지도 말고, 무조건 순종적으로 굴어라. 알겠나.’
‘왜 그런…….’
‘나중에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필두가 의도하는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필두는 자신만의 작전을 구상한다. 그러나 그 작전의 상세한 내용을 누구에게도 말해주지 않는다.
답답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늘 긍정적이었다.
실제로 필두가 직접 손을 대는 것마다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기에 제1포대는 연대를 뛰어넘어 사단, 심지어 국방부 장관에게도 언급될 만큼 유능한 부대가 되었다.
‘이번에도 행보관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 * *
“야, 하나포! 너희 신병 관리 똑바로 안 하냐!”
“X발, 내가 온수 쓰려고 했는데 그 온수를 이등병 새끼가 먼저 써?”
오구철과 서수일이 또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사용하겠다고 따로 명시를 해놓은 적도 없으며, 온수를 받아놓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주장은 그저 억지에 불과할 뿐이었다.
마음 같아선 이들에게 대들고 싶은 도혁이었으나, 필두의 말이 그의 뇌리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덕분에 저자세로 나가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교육시키겠습니다.”
“똑바로 좀 교육시켜라.”
“괜히 우리 말년들 기분 엿 같게 만들지 말고.”
두 사람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상승해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하나포 집중 공격에 신병들도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였다.
병장 두 사람이 떠나자, 진수가 도혁에게 다가와 물었다.
“전도혁 상병님.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행보관님과 무슨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진수는 알고 있었다.
평상시의 전도혁이라면 휴게실에서 했던 것처럼 오구철과 서수일 앞에서 강하게 대들었을 것이다.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전도혁은 이미 그러한 전과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요즘의 도혁은 뭔가 좀 이상했다.
정성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도혁이 두 사람의 말에 오냐오냐하며 그대로 따른다?
뭔가 좀 이상했다.
진수는 도혁의 태도 변화의 계기를 필두와의 면담 때문이 아닐까 하고 예측했다.
오구철과 서수일이 후임급 병사들을 집합시켰을 때, 필두는 전도혁을 따로 행보관실로 호출했다.
그날 이후, 도혁의 태도가 달라졌다.
눈치 좀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주변에 듣는 귀가 없음을 재차 확인한 도혁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당분간 행보관님께서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 저자세로 나가라고 하더라.”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못 들었어. 근데 뭐…… 행보관님께서 지시한 일이니까. 난 그저 ‘예, 알겠습니다.’ 하고 따르는 거지.”
“그렇습니까.”
자세한 이유는 듣지 못했으나, 그래도 진수가 원하는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필두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크나큰 소득이다.
진수는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없는 위치다. 일병이 무엇을 하겠나.
그러나 필두는 다르다.
그라면 두 사람의 내무 부조리 조장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행보관의 정체가 레디너스에서 악명 높았던 악인, 드리무어라는 점이다.
‘드리무어도 생각은 있을 테니 당분간은 지켜보는 게 좋겠군.’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이 진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 * *
저자세로 나가는 하나포의 태도 때문일까. 말년병장 2인방의 기세는 나날이 상승세를 탔다.
그 영향 때문일까. 최근에는 선을 넘어서는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처음에는 하나포로 집중되어 있었던 갈굼이 점점 다른 분과 쪽으로도 뻗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야, 둘포! 너희 남는 컵라면 있냐?”
“저희가 PX에서 사온 것밖에 없습니다.”
“있잖아! 그거, 내놔라.”
“잘못 들었습니다?”
“내놓으라고 했잖아!”
후임들이 사놓은 라면을 갈취하는 건 기본이오, 필두가 시킨 작업 지시도 다른 병사들에게 떠넘기기 일쑤였다.
나날이 심각해져 가는 오구철 병장과 서수일 병장의 행태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
덕분에 병사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갔다.
필두도 이와 관련된 사실을 충분히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
소위 말해 눈감아주기 식이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기. 과거에 내무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던 필두와 사뭇 다른 움직임이었다.
도혁도 그게 의아했다.
“저기…… 행보관님?”
점심 시간을 활용해 필두에게 몰래 접선을 펼친 도혁.
때마침 조만간 시행될 국지도발 훈련 관련 업무를 진행하려 했던 필두가 도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행보관님이 지시하신 대로 하고 있습니다만…… 언제쯤이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벌써 5일째다.
그럼에도 필두는 여전히 두 말년병장을 방치하고 있었다.
필두도 두 사람의 만행을 잘 안다. 아니, 모를 리 없었다. 왜냐하면, 도혁이 시간이 날 때마다 스파이 노릇을 하며 오구철과 서수일이 자행하는 내무 부조리 내용을 전달해 줬으니까.
그러나 필두는 아직도 침묵을 지켰다.
“고작 그 말 하려고 날 찾았나.”
“병사들도 폭발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행보관님께서 무슨 작전을 구상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대로 가면 다시 내무 부조리가 판을 치던 시절로 돌아갈 겁니다!”
“병사들 불만이 폭발 직전이라고?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간부보다 병사가 내무 생활 분위기를 더 잘 안다. 그건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필두가 기다리던 게 바로 이 말이었다.
폭발 직전.
“그렇단 말이지.”
펜을 굴리던 필두가 목소리를 높였다.
“통제관!”
행보관의 부름에 통제관이 바로 반응했다.
“부르셨습니까, 행보관님.”
“애들 깨워서 생활관으로 집합시켜.”
“1생활관으로 전원 집합시킵니까?”
비가 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야외 활동을 자제하라는 공문이 내려올 만큼 무더위도 아니다. 그런데 왜 실내 집합을 추진하는 걸까.
“일, 이등병들은 1생활관으로. 상병장들은 2생활관으로 집합시켜라. 점심시간 다 끝나가니까 지금 바로 집합시키면 되겠군.”
선임급, 후임급을 따로 집합시킨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있었다.
“혹시 마음의 편지 받으시려는 겁니까?”
통제관이 설마 하며 물었다. 그러자 필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군.”
필두의 기습 마음의 편지.
그것이 이번 사건에 쐐기를 박아줄 것이다.
* * *
갑작스럽게 시작된 마음의 편지. 덕분에 상병장들, 그중에서도 오구철과 서수일의 동공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마음의 편지를…….”
“설마 누가 우리 찌른 거 아니야?”
“불안한 소리 하지 마라! 그러다가 현실이 되면 어쩌려고!”
맞은편에서 구철과 수일이 주고받는 대화를 몰래 엿듣던 정성태가 도혁에게 슬쩍 물었다.
“행보관님은 이것까지 다 염두에 두신 거야?”
“글쎄. 내가 알 턱이 있나.”
아직까지도 필두가 의도하는 바가 뭔지 감이 잘 안 잡혔다.
한편, 1생활관으로 향한 필두가 후임급들에게 대놓고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마음의 편지를 받으려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오구철, 그리고 서수일. 두 명을 영창 보내기 위한 증거 마련이다.”
“……!”
노골적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다.
“요즘 두 녀석의 횡포가 하늘을 찌르려 한다는 걸 여러 곳에서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괴롭힘을 저지르는지까지 다 알고 있다. 내가 이것들을 알고 있음에도, 구태여 마음의 편지를 받으려는 건 아까 너희한테 말한 대로 증거 확보가 가장 큰 이유다.”
잠시 호흡을 고른 필두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를 냈다.
“너희에게 약속하마. 마음의 편지에 있는 그대로 솔직한 심경을 담아 적는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오구철과 서수일의 영창, 전출 보내마. 내가 거짓으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보고 더 이상 길게 말하지 않으마.”
이미 내무 부조리 3대장을 차례차례로 격파한 필두였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필두가 두 사람의 행각을 자세히 알고 있고, 영창에 전출까지 대놓고 약속을 했으면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어진다.
바삐 움직이는 일, 이등병들의 펜 놀림.
결과는 볼 필요도 없었다.
* * *
오구철과 서수일, 두 명은 포대장실로 따로 호출을 받았다.
잔뜩 성이 난 얼굴을 한 포대장이 불같이 화를 냈다.
“내무 부조리 없앤다고 그렇게 말을 했거늘! 곧 전역할 녀석들이 뭐가 아쉬워서 또 내무 부조리를 조장하는 거냐!”
“포, 포대장님! 저희는 그런 적 없습니다! 그, 그렇지? 수일아!”
“구철이 말이 맞습니다, 포대장님! 이건 모함입니다!”
“모함은 무슨!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냐!”
책상 위에 펼쳐진 마음의 편지들.
그곳에는 병사들이 적은 제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후임급뿐만 아니라 선임급이 적은 마음의 편지에서도 두 말년병장의 행보에 대한 볼멘소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의 행동이 도가 지나쳤다는 평가였다.
이미 여론은 두 사람을 등지고 돌아섰다.
남은 건 결과뿐.
“말년병장이라고 봐주려 했더니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군말하지 않겠다. 행보관님이 말씀하신 대로 너희 둘은 영창이다, 영창!”
“포, 포대장님!”
“저흰 정말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저 하나포 녀석들이…….”
“하나포가 뭐!”
“그게…….”
휴게실에서 자리 양보 안 해준 게 갈굼의 시작이라는 말을 했다간, 더 심한 꼴을 볼지도 모른다.
두 사람도 본인들이 한 행동에 떳떳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더 이상의 변론을 하겠단 말인가.
결국 이번에도 필두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어가게 되었다.
* * *
결국 말년에 영창 신세를 지게 되어버린 오구철과 서수일.
영창도 그렇지만, 전출도 결정되어 있었기에 더 이상 제1포대와 마주칠 일도 없었다.
한편, 이제 막 휴가를 복귀한 김조항은 그간 있었던 이들을 전해 들었다.
“고생 많았다. 나 없을 때 그런 일들이 있을 줄은.”
도혁과 성태, 그리고 연도와 진수에게도 위로를 건넸다.
이후 필두가 병사들을 불러 모아 다시금 선언했다.
“내가 관리하는 부대 내에서 내무 부조리는 절대 금물이다. 병사들끼리의 암묵적인 관습, 룰, 이런 건 없다. 그게 내무 부조리 성향을 띤다면 무조건 철폐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너희도 앞으로 주의하도록. 통제관. 하던 작업 분배, 마저 해라.”
“예, 행보관님.”
두 사람을 영창 보냈어도 제1포대의 하루는 여전히 돌아간다.
그것도 아주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