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23화 (123/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23화

제31장. 내게도 후임이(3)

“자리 말씀이십니까?”

“어.”

“우리가 귀한 시간 내면서까지 온 PX인데, 다리 아프게 서서 먹을 순 없잖아. 안 그래?”

노골적인 압박이었다.

‘어쩐다.’

성태로선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리까지 다 세팅한 마당에 난데없이 자리를 비켜 달라 하다니.

두 신병도 불안한 눈으로 성태를 응시했다.

‘하필이면 이때 김조항 병장님이 안 계실 줄이야.’

그가 휴가를 떠난 게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분과를 책임지는 건 정성태다. 부분대장으로서 조항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조항의 태도에 불편함을 느낀 모양인지 구철과 수일이 바로 짜증을 냈다.

“얌마. 정성태. 우리말이 안 들리냐?”

“비키라고 했잖아.”

“…….”

“어쭈? 선임 말이 말 같지 않냐?”

“많이 컸다, 너?”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냉동을 돌리고 돌아온 연도와 진수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마음 같아선 진수가 직접 나서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직급은 이등병. 계급으로 돌아가는 조직인 만큼 하극상은 피해야 했다.

바로 그때, 의외의 구세주가 등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구철 병장님. 서수일 병장님.”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도혁이 두 사람 앞에 마주 선 것이다.

“응? 넌 또 뭐냐.”

“마침 잘됐네. 네 분과 애들 데리고 빨리 꺼져라. 우리가 마침 자리가 없어서 말이야.”

두 병장이 호기롭게 외쳤다.

어차피 병사 중에서 이 두 사람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병사는 없었다.

제아무리 김조항이 온다 하더라도 오구철과 서수일의 후임인 이상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진 못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도혁이 무슨 힘을 쓴단 말인가.

그러나 이들이 잠시 잊은 게 있었다.

“싫습니다만?”

“뭐?”

“싫다고 했습니다.”

도혁이 노골적으로 두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쳤다.

“너 이 새끼. 정신 나갔냐?”

“오구철 병장님이 잠깐 잊으신 거 같은데. 저, 이등병 때부터 정신 나간 놈이라고 불렸던 거, 기억 안 나십니까?”

군 생활 편하기 하기 위해서라면 관심병사를 연기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던 희대의 반항아, 전도혁.

그가 다시 컴백했다.

“뭣하면 예전의 미친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만.”

“…….”

“…….”

“전 영창 가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두 병장님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저도 더러운 놈이지만, 오구철 병장님하고 서수일 병장님도 후임들 사이에선 평가 그리 안 좋은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도혁의 말이 옳았다.

오구철과 서수일은 예전부터 유명한 2인조였다.

집합의 왕이었던 문석도와 꼬장의 왕이라 불리던 최민복, 두 사람에 의해 존재감이 옅었을 뿐이지, 구철과 수일도 내무부조리를 조장하는 인원이기도 했다.

필두 때문에 잠깐 그 활동을 자제했던 것뿐이지, 말년병장 달았다고 요즘 들어 예전의 모습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말년병장 VS 일병.

잃을 게 많은 쪽은 말년병장이었다.

“재수 없는 새끼.”

“두고 봐라. 전역하기 전에 네 녀석만큼은 조지고 간다.”

“기대하겠습니다.”

여유롭게 미소를 선보이는 도혁이었다.

그의 활약으로 인해 두 병장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했지만, 성태는 영 편치 않았다.

“괜찮냐, 도혁아.”

“어. 그리고 어차피 입만 저렇게 떠들지, 실제로 나 건드리지도 못해. 원래 저런 사람들이니까.”

대신 도혁의 평판은 다시금 떨어지게 될 것이다.

선임에게 말대답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안 좋게 보는 이들이 상당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도혁은 이미 전과가 있었다.

안 좋은 군 생활을 보냈던 전도혁이기에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갈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난 원래 이런 놈이었으니까.”

당사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태는 가벼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도혁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하나포를 지켜냈다.

그러나 정성태는?

‘부분대장 실격이군.’

신병 환영식은 비교적 무거운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 * *

오늘의 당직은 행정보급관, 강필두가 맡기로 했다.

그가 당직을 설 때마다 매번 하는 게 있었다.

“순찰을 돌고 오마.”

“예!”

청소 시간이 시작되기 전까지 순찰을 마치기 위해 막사를 나섰다.

생활관 근처를 지날 때쯤에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흘려듣기 힘든 말이 새어나왔다.

“전도혁, 그 새끼. 내 그럴 줄 알았다.”

“선임한테 또 대들었다며?”

“오구철 병장님하고 서수일 병장님한테 말대답했다고 하더라.”

“아까 나도 그 말, 듣긴 했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랬대?”

“나야 모르지. 솔직히 그 두 사람도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선임한테 대드는 건 좀 아니긴 하지.”

오구철과 서수일도 평판이 그리 좋진 못하다. 그건 필두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나 그것보다 필두의 신경을 쓰이게 하는 발언은 따로 있었다.

‘전도혁, 그 녀석이 또 문제라도 일으켰나.’

필두에게 제대로 참교육을 당한 이후부터는 그래도 나름 착실하게 지내다시피 했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예상했으나, 최근에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 듯했다.

‘이야기 좀 들어봐야겠군.’

부대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잡는 게 행보관의 역할 아닌가.

순찰을 잠시 중단한 필두는 행정반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 * *

행정반으로 호출당한 도혁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오구철과 서수일, 두 사람에게 대놓고 반항적인 모습을 보였을 때에는 욱한 게 좀 있었다.

어차피 병사들에게 욕먹는 건 예전의 전도혁으로선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 했다.

그러나.

‘행보관님이 부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도혁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

강필두가 직접 도혁을 호출했다.

저녁 점호까지는 아직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안에 필두에게 무슨 벌을 받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상병 전도혁입니다!”

“들어오도록.”

행보관실 문을 열고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도혁을 지그시 응시하는 필두.

“문 닫고 앉아라.”

“예!”

군기 잡힌 모습으로 후다닥 필두의 말에 따랐다.

앉자마자 필두의 질문이 바로 이어졌다.

“병사들 사이에서 네 행동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거론되고 있다. 자초지종부터 설명해 봐라.”

“그건…….”

“말하기 싫다?”

“…….”

도혁은 알고 있었다.

본인이 묵비권을 행사한다 하더라도 결국 필두 앞에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설령 말하지 않더라도 필두가 지닌 최면 기술을 사용하면 본인의 의지에 상관없이 사건의 전말을 모두 실토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말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오구철 병장하고 서수일 병장 때문에 그랬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도록.”

“아까 PX에 갔을 때, 저희 신병 파티하려고 자리 잡았었는데 계급으로 밀어붙이면서 저희를 쫓아내려 했습니다. 본인들 앉을 자리 없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도혁이었으나, 그의 진심이 필두에게 닿을지 말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선임에게 대든 건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도혁도 잘한 건 없다.

“죄송합니다. 행보관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에 대해선 달게 처벌받겠습니다.”

이미 필두에게 벌을 받는 걸 각오했다.

말없이 도혁을 응시하던 필두가 의외의 질문을 꺼냈다.

“네 행동에 후회는 없나.”

“후회…… 말씀이십니까?”

“기껏 이미지 쇄신에 성공했는데, 이번 사건 한 방으로 다시 저평가된 걸 후회하지 않냐는 거다.”

처음에는 필두에 의해 강제적으로 A급 병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중간에 도혁은 깨달았다.

선임들로부터 인정받는 기쁨을.

후임들로부터 존경받는 즐거움을.

그리고 동기들의 자랑거리로 언급되는 자부심을.

이 모든 것들을 도혁은 짧은 기간에 느낄 수 있었다.

하나 이번 사건으로 인해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게 생겼다.

분명 후회도 들 터.

하나.

“거기서 제가 물러섰더라면, 아마 더 후회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군.”

필두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오른손을 훠이 저어 보였다.

“알았다. 생활관으로 돌아가도록.”

“끝입니까?”

“왜. 나한테 자처해서 혼쭐이라도 나고 싶은 게냐.”

“아, 아닙니다! 바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충성!”

허겁지겁 도망치다시피 행보관실을 나서는 도혁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도혁이 자취를 감추자 필두의 입꼬리 한쪽이 슬쩍 위로 향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기대 이상의 병사로 성장했군. 저 녀석.”

* * *

저녁 점호 시작 전.

일일 생활관 책임자가 된 오구철 병장이 하나포 인원 쪽으로 다가왔다.

“야, 하나포. 신발 정리 똑바로 안 하냐.”

“바로 하겠습니다!”

“관물대 정리도 제대로 해라. 매트리스 각도 잡고.”

“예!”

일부러다.

휴게실에서 당했던 수모를 이런 식으로 풀었다.

오구철 병장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병사는 현재의 하나포 인원 중에선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도혁이 말대답이라도 하면서 저항이라도 해보였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 끝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병사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오구철 병장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그건 제아무리 도혁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도혁의 반항을 이끌어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포를 괴롭혀 도혁에게 도발을 한다. 그리고 도혁이 성질을 이기지 못해 오구철에게 대들려고 하는 순간, 다수의 증인을 확보해 간부들에게 전도혁의 병영 생활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되면 영창을 가는 건 전도혁, 한 명뿐이다.

도혁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젠장, 쓰레기 같은 녀석들!’

속으로 울분을 토하면서 오구철이 시킨 것들을 얌전히 소화해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연도와 함께 자리 정리에 들어간 진수가 오구철을 힐긋 바라봤다.

‘아까의 응어리를 풀려는 건가.’

진수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치졸한 놈들이군.’

레디너스 대륙이었더라면, 그리고 자신이 저들의 상관이었더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정의의 철퇴를 내렸을 것이다.

하나 불행하게도 지금의 진수로선 저들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할 수 없었다.

오구철의 집중 공격에 의성과 대박, 두 명의 신병이 느끼는 불안감은 가중되었다.

‘괜히 우리 때문에…….’

‘첫날부터 망했다, 망했어!’

하나포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이들을 괴롭히는 데에 재미가 들린 모양인지 오구철이 무리수를 가했다.

“정리 잘 하는 거 같은데, 우리 다섯포 것도 좀 해줘라?”

“…….”

“어쭈. 반항해?”

계급을 앞세운 갑질. 게다가 모욕감마저 주는 지시였다.

결국 도혁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오구철 병장님! 이건 좀 심하…….”

강한 반론을 제시하려던 찰나였다.

콰앙!

문을 거칠게 박차고 들어오는 한 남자 덕분에 생활관 내부는 금세 침묵으로 물들었다.

제1포대의 진정한 실세.

행보관 강필두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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