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21화 (121/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21화

제31장. 내게도 후임이(1)

파견에 이어 다큐멘터리 촬영까지.

정신없는 일정을 보낸 필두는 오래간만에 평화로운 일상의 시간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행보관의 입장에서 평화로울 뿐이지, 병사들에겐 여전히 고단한 일과 시간이 되었다.

게다가 날씨도 슬슬 더워지기 시작했기에 조금만 노가다를 뛰어도 등 쪽이 땀에 흠뻑 젖었다.

이제는 정말로 하계의 계절이 돌아온 셈이었다.

“어휴, 덥다. 더워.”

손 부채질을 해 보이는 하나포 병사들. 오늘 이들에게 떨어진 하루 작업 일과 내용은 포상 정리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잡초 줄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더 자라기 전에 제초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시기를 놓치면 더 힘든 제초가 시작되기에 미리미리 손을 써두는 편이 좋았다.

특히나 포상은 포병 부대의 얼굴. 포상 정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목장갑을 낀 맨손으로 잡초 뿌리까지 제거한다. 낫을 이용하면 편하지만, 뿌리를 제거해야 하기에 낫 사용은 아직 금기시되었다.

“잠깐 좀 쉬자.”

정성태가 후임들에게 휴식 시간을 지시했다.

김조항이 휴가를 나갔기 때문에 당분간은 성태와 도혁, 두 상병이 하나포를 책임져야 했다.

그중에서도 정성태가 부분대장이었기 때문에 분대를 주도할 일이 있으면 도혁보다 성태가 먼저 나서서 선임으로서의 역할을 소화했다.

아직 차기 분대장은 정해지지 않았다. 본래는 정성태로 내정하려 했었으나, 요즘 도혁의 텐션을 생각한다면 도혁에게 분대장을 일임해도 크게 상관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여론도 있었다.

그래서 차기 분대장 임명은 ‘보류’ 상태가 되었다.

정성태의 휴식 지시에 병사들이 그늘을 찾아 헤맸다.

진수의 맞선임인 조연도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이제 대낮에 작업하는 건 힘드네.”

“그런 거 같습니다.”

땡볕. 이 말이 잘 어울렸다.

두 후임병이 나누는 대화를 근처에서 들은 도혁이 정보 하나를 흘렸다.

“안 그래도 행보관님이 행정병들 시켜서 생활관 선풍기 청소하라고 시켰더라.”

“벌써 선풍기를 틀어야 하는 날씨입니까?”

“조만간 에어컨도 틀겠지, 뭐.”

군대 날씨는 둘 중 하나다.

매우 덥거나 매우 춥거나.

따뜻한 봄 날씨라든지 그런 걸 느낄 사이도 없이 금세 여름으로 돌입한다.

그것이 군대 날씨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를 소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눈에 밟히는 풍경이 들어왔다.

“어? 전도혁 상병님. 저거 혹시 신병들 아닙니까?”

“음? 어디.”

발돋움을 하며 대대 연병장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연도의 말대로였다.

포차 위에 더블백을 끌어안은 채 두리번거리는 이등병들.

한눈에 봐도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이, 이제 막 자대 전입을 하기 위해 도착한 신병들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포상 안에서 휴식을 취하던 성태도 소란스러움에 이끌려 바깥으로 나왔다.

“우리 포대 쪽에도 신병 분배되려나 모르겠네.”

아직 저들이 어느 자대로 갈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신병이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김칫국을 마시기는 이르다.

그래도 신병이 들어온다면 하나포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안 그래도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데, 여기에 신병이 더 들어온다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까.

“우리, 내기할래?”

뜬금없이 도혁이 내기를 제안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어떤 내기?”

“신병이 우리 포반에 들어올지, 아니면 말지.”

“난 안 들어올 거 같은데.”

성태가 먼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의 의견은 부정적이었다.

“너희는?”

“전 올 거 같습니다.”

“저도 진수랑 같은 생각입니다.”

연도와 진수는 온다는 쪽에 걸었다.

“도혁이 너는 어디다 걸 거냐.”

“나도 너랑 같은 쪽.”

“안 들어온다고?”

“어.”

“그럼 딱 2대 2네. PX 내기지?”

“물론.”

선임파 VS 후임파.

승자는 적어도 오늘 안으로 결정될 것이다.

* * *

밀린 업무를 처리하던 필두가 행보관실을 나섰다.

“당직. 인사과에 좀 갔다 올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 인적사항 관련으로 문의할 게 생겼다.

전화도 안 받기에 직접 인사과까지 찾아가기로 했다.

대대 연병장을 가로질러 인사과로 향하는 필두의 시야에 낯선 병사들이 다수 목격되었다.

‘신병인가.’

이제는 척하면 척 알아보는 단계까지 왔다.

예전에는 병사들을 봐도 누가 누군지 구분이 잘 안 되었었지만, 짬밥이라는 게 쌓인 덕분인지 눈썰미가 제법 생겼다.

원사 계급을 단 필두가 인사과에 도달하자, 신병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추, 충성!”

“충성!”

어색한 거수경례를 선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행보관에겐 신병들이 귀여워 보일지도 몰랐다.

짬 차이가 십 년 단위로 난다. 필두에 비하면 이들은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필두의 방문을 확인한 인사장교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행보관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병사들 인적 사항 관련해서 문의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런 건 전화로 하셔도 충분한데…….”

“전화를 걸었더니 안 받으셔서 직접 왔습니다.”

“헉!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무음으로 해놓은 걸 깜빡했네요.”

뒤늦게 스마트폰 상태를 확인한 인사장교가 여러 차례 사과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얘들은 신병입니까?”

“네. 이제 자대 분배시키려고 합니다만. 제1포대 신병 필요합니까?”

“필요하지요.”

“몇 명 정도 필요하신지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의견 반영해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행보관님한테 몹쓸 짓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하하, 신경 안 써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필두의 눈은 이미 신병들을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제법 굴리기 괜찮은 녀석들이 몇몇 보였다.

안 그래도 최근에 몇몇 전포 분과가 인력 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신병들을 당겨오는 편이 좋았다.

“그럼 한 4명 정도는 어떻습니까?”

전입온 병사는 총 11명. 그중 4명을 달라는 건 꽤 무리한 조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사장교는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네, 좋습니다. 그럼 원하시는 병사 4명 알아서 데려가세요.”

“고맙습니다.”

미리 점찍어둔 4명을 차례로 지목했다.

“거기 너.”

“이병 하! 태! 원!”

“그리고 너.”

“이병 조석훈!”

“그쪽에 둘.”

“이병 전의성!”

“이병 박대박!”

이제 갓 훈련소를 퇴소한 이들이라 그럴까. 목소리에 하나같이 패기가 담겨 있었다.

“더블백 들고 따라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필두로부터 지시를 받자마자 곧장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동기들이 선택받은 4명의 신병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사실 신병들은 제1포대가 좋은 부대인지, 나쁜 곳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다. 그래서 먼저 떠나는 이들을 부러워해야 좋을지, 말지 고민이 됐다.

남은 신병들을 뒤로하고 필두와 함께 인사과를 나온 신병 4인방.

“좌우로 정렬.”

“좌우로 정렬!”

“앞으로 가.”

인솔자 위치에 선 필두가 신병들을 오와 열에 맞춰 세운 뒤에 제1포대 막사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제1포대 쪽으로 걸어오는 다섯 명의 모습을 멀리서 확인한 병사들이 급격하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나포도 마찬가지였다.

“정성태 상병님! 전도혁 상병님! 지금 행보관님이 신병 4명 데리고 올라오십니다!”

“뭐라고!”

“진짜냐?”

연도의 보고 때문에 성태와 도혁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이와는 반대로 도연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저희가 이겼지 말입니다!”

“아, 아니지! 아직 안 끝났다.

“그래! 내기 내용은 ‘우리 포반에 들어오느냐, 마느냐’였잖아. 거짓말하지 마라, 연도야.”

억울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엄밀히 따지면 이들의 말이 맞았다.

신병 합류는 포대가 아닌 포반이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조연도. 그와는 다르게 진수는 필두가 데리고 오는 신병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쌍한 녀석들. 하필이면 드리무어 밑으로 들어오게 되다니.’

들릴 리 없는 위로의 말을 신병들에게 건넸다.

* * *

행정반으로 들어온 신병 4인방은 자대의 모든 것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자대라는 곳이구나!’

‘아까 봤던 그 포, 엄청 커 보이던데.’

‘게시판에서 보던 155㎜ 곡사포에 걸리다니. 하아, 재수도 더럽게 없네!’

신병 중 몇몇은 인터넷에서 155㎜ 견인곡사포 포병에 대한 썰을 들은 적이 있는 모양인지 얼굴이 잔뜩 굳어진 채 있었다.

자주포에 비하면 힘든 곳이라는 건 확실하다. 이동하다가 제자리에 가만히 서면 방열이 끝나는 자주포와 다르게 견인곡사포는 방열방위각 따는 것부터 시작해서 가신 묻기 등등 방열에 걸리는 과정이 고되고 오래 걸린다.

그래서 견인곡사포는 포하고 있었으나, 행운의 여신은 이들에게 잠시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필두는 이들의 속사정까지 고려해 줄 생각은 없었다.

“통제관 있나.”

“예, 행보관님!”

때마침 행정반 근처에 대기 중이었던 통제관이 필두의 부름에 재빨리 튀어나왔다.

“전포 중에서 인원 부족한 곳 어디 어디인지 아나.”

“제가 알기론…….”

통제관은 전포반의 사정을 전체적으로 잘 알고 있다. 포반장보다 통제관을 부른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하나포, 넷포, 여섯포. 이렇게 부족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포에 둘, 넷포하고 여섯포에 하나씩. 이렇게 하면 되겠지?”

“예. 그게 가장 나을 거 같습니다.”

인력이 가장 부족한 곳은 하나포다. 진수가 일병을 달 동안 신병이 한 명도 안 들어왔으니, 이제는 슬슬 신병을 분배해 줄 때가 되었다.

속전속결로 분배를 마친 필두가 당직을 찾았다.

“당직. 하나포, 넷포, 여섯포 분대장들 오라고 해.”

“하나포 분대장은 휴가 갔습니다.”

“그럼 선입급 아무나 오라고 해라.”

“예, 알겠습니다.”

신병을 할당 받을 분과의 선임급 병사들이 차례차례 행정반으로 모여들었다.

하나포 쪽에서는 김조항 대신에 정성태가 자리를 채웠다.

“너희를 왜 불렀는지 잘 알겠지?”

필두가 먼저 질문했다.

어색하게 서 있는 네 명의 신병. 그리고 호출받은 세 개 분과의 선임급 병사들.

누가 봐도 딱 그거 아니겠는가.

“신병 분배 때문입니까?”

넷포 분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답이다.”

“아싸!”

“드디어 신병이구나!”

넷포와 여섯포 쪽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하던 신병 전입이란 말인가!

그러나 정성태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신병 전입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조금 전에 포상에서 나눴던 내기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성태의 표정 변화를 빠르게 캐치해낸 필두가 곧장 지적을 했다.

“정성태. 너는 별로 안 기쁜가 본데. 다른 분과로 신병 보낼까?”

“아, 아닙니다! 기쁩니다! 하하하하하!”

비록 내기에서 지긴 했지만, 하나포가 신병 지원이 절실하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었다.

‘연도하고 진수 녀석. 감도 좋네.’

신병 전입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된 두 후임병을 생각하며 성태는 애써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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