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20화 (120/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20화

제30장. 그의 무용담(4)

달밤 모텔에 도착한 필두와 진수는 가장 먼저 주변을 살피는 데에 주력했다.

유미가 흑마법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진입에도 신중을 기해야 했다.

흑마법사 조직이 두 사람을 위해 마련한 함정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함정이라는 걸 안다 하더라도 안 올 수가 없었다.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흑마법사 조직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유미가 머무는 모텔에 도착했을 때, 진수는 후회가 들었다.

‘에리나도 데려올 걸 그랬나. 아니, 괜히 불렀다가 드리무어에게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어. 여기서는 나 혼자 단독으로 행동하는 편이 좋겠군.’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 필두가 말을 걸어왔다.

“다른 쪽으로 정신이 팔려 있다간 녀석들에게 당할지도 모른다.”

“알고 있어.”

천하의 마일더가 흑마법사 조직에게 쉽게 당할 리 없다. 필두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기에 주의를 줬다.

달밤 모텔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3층으로 구성된 낡은 건물이었다.

새벽 시간대라 그런지 출입하는 인원들도 없었다. 심지어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중년 여성 역시 TV를 보다 잠든 모양인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CCTV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몇몇 보이긴 했지만, 작동은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입구로 진입하는 두 남자.

여기까진 딱히 수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유미라는 아가씨는 어디 있지?”

진수가 유미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필두도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이제부터 찾아야지.”

“무책임한 발언이군.”

“걱정할 필요 없다. 나한테는 쉬운 일이니까.”

같은 흑마법을 구사할 줄 아는 이들은 서로서로 알아본다.

유미의 경우도 같았다.

가장 꼭대기 층인 3층 복도에 들어섰을 때, 필두가 오른쪽 구석을 가리켰다.

“저쪽이군.”

301호. 그곳에 유미가 있다.

흑마법에 관련된 건 필두가 전문가다. 여기서는 그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 옳았다.

기척을 죽이며 301호실 문 앞에 마주 섰다.

필두가 먼저 들어갈 생각인지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렸다.

잠겨 있을 줄 알았던 문은 예상외로 쉽게 열렸다.

“노골적으로 함정인 티가 팍팍 나는군.”

진수의 말대로였다.

필두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각오를 굳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검은 물결이 필두를 습격했다.

하나 필두도 기습 공격을 예상한 모양인지 왼손을 뻗어 방어막을 발동시켰다.

콰지지지직!

강렬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공격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기에 비교적 손쉽게 방어에 성공했다.

시야를 가렸던 검은 물결이 서서히 사라지자, 이들의 눈앞에 한 여인의 형상이 들어왔다.

“늦었잖아, 드리무어. 기다리다 잠들 뻔했어.”

흐릿한 초점의 소유미가 탁한 마나를 뿜어대며 이들 앞에 마주 섰다.

* * *

검은 연기에 둘러싸인 유미가 두 사람을 응시했다.

“여자가 혼자 머무는 장소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들이군.”

“전후 사정 묻지도 않고 대뜸 공격부터 하는 사람한테 듣고 싶지 않은 말인데.”

필두도 그녀의 말을 담담히 받아쳤다.

처음에는 그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확인 절차 같은 건 전혀 필요 없어졌다.

그녀는 적이다. 그렇게 인지하는 편이 좋았다.

다시 한번 필두에게 공격을 가하기 위해 준비하는 유미. 그녀를 중심으로 마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이 모든 정황을 지켜본 진수가 의견을 제시했다.

“여기서 싸우면 애꿎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인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쩔 수 없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필두가 진수와 함께 복도를 벗어났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쿠웅!

안전하게 착지한 두 남자를 뒤쫓기 위해 유미 역시 창문 쪽으로 향했다.

때마침 모텔 뒤에 공터가 있었다. 그쪽으로 장소를 옮기는 동안, 필두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저 여자, 뭔가 어색하군.”

“어색하다고?”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주지. 우선은 저 아가씨부터 제압하는 게 먼저다.”

자세를 잡은 필두가 진수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손짓했다.

“이건 내가 해결하겠다. 넌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

“그럼 내가 같이 온 의미가 없는데.”

마일더와 협동해서 유미를 제압하는 게 훨씬 더 손쉬울 터. 그러나 필두의 생각은 달랐다.

“녀석들은 너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너도 놈들에게 정체를 들키고 싶진 않겠지? 그렇다면 숨어 있는 게 좋을 거다.”

필두는 애초에 저들한테 모든 정체가 발각된 채였다. 하나 마일더의 존재까진 모를 수도 있다. 그것이 필두의 생각이었다.

필두는 최강의 흑마법사다. 진수도 유미와의 대결에서 질 일은 없을 거라 판단했는지 오늘만큼은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진수가 사라지자마자 유미가 타이밍 좋게 등장했다.

“같이 온 병사는 어디로 갔지?”

“마법사들의 싸움에 일반 병사는 필요 없지.”

“하긴.”

유미는 진수를 필두가 데려온 일개 병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필두로선 다행인 셈이었다.

다시금 유미의 주변으로 탁한 마나가 휘몰아쳤다.

그러는 동안, 필두가 그녀에게 몇 가지를 질문했다.

“넌 누구냐. 너도 레디너스에 서 넘어온 녀석이냐. 날 죽이려고 왔다면, 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노리지 않았지?”

“천하의 드리무어가 혀가 너무 긴 거 아니야?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전혀.”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고 말을 건 것은 아니었다.

그저 테스트를 해보려고 했을 뿐이다.

움직이는 그녀의 입 모양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역시 어색해.’

필두가 말했던 어색함은 바로 유미의 몸동작에 있었다.

흐릿한 눈도 그렇고, 말을 할 때에도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건가.”

자신의 추측이 거의 맞았음을 직감했다.

한편, 확신에 가득 한 필두의 모습에 열을 받았는지 유미가 신경질적인 발언을 들려줬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거야? 그런 허세는 안 통해!”

“허세가 아니라 진짜다.”

전신에 마나를 불어넣어 일시적으로 신체를 강화시켰다.

조금의 망설임 없이 바로 전방을 향해 튀어 나가는 필두.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유미의 주변을 맴돌던 검은 마나가 구체 형태로 변화되어 돌진해 오는 필두에게 날아들었다.

공격 패턴도 저번에 상대했던 흑마법사들과 비슷했다.

하나하나 강력한 위력을 지닌 탄들이었으나, 필두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왼손을 크게 한 번 휘저은 것만으로도 검은 구체들이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저리도 간단하게……?”

유미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순식간에 그녀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필두가 오른 주먹을 뻗어 그녀의 복부에 정확히 꽂아 넣었다.

“흐읍!”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주먹을 쥐었던 손을 펼쳤다.

동시에 주먹 안에 감춰져 있던 작은 마나 구체가 유미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아아악!”

구체가 몸으로 흘러 들어가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하자 유미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괴로워하던 그녀가 이내 힘없이 지면에 쓰러졌다.

쓰러진 유미에게 다가가 상의를 위로 끌어올렸다.

날씬한 배가 그대로 외부에 노출되었다. 그 위로 손바닥 크기만 한 검은색의 마법진이 탁한 빛을 뽐냈다.

“이게 원인이었나.”

검지를 뻗어 마법진을 살며시 누르자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제야 유미의 호흡이 안정되었다.

한편,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진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조종당하고 있던 거다.”

“조종? 설마 그 흑마법사 조직원들한테?”

“아무래도 그렇겠지.”

유미의 움직임에 어색함이 느껴진 게 이 때문이기도 했다.

유미는 자의식으로 필두를 죽이려 시도한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해 강제적으로 필두에게 덤빈 것이다.

필두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그래서 확인 절차를 취하기 위해 일부러 그녀에게 말을 붙였었다.

그 결과, 필두의 추측이 맞았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필두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조종사는 근처에 없나.”

“왜 녀석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자처했는지 모르겠군.”

“뻔 하지. 간보려고 그런 거다.”

뿐만 아니라 유미를 세뇌시켜두면 여러 방면으로 도움이 되는 게 많다.

이 세계에 대한 정보라든지, 나중에 가면 유미를 조종해 이들이 원하게끔 이득을 이끌어낸다든지.

흑마법사 조직원들은 간첩의 신분으로 이 세계에 넘어왔다. 유미 같은 유명 인사들을 세뇌시켜두면, 남한에서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게 가능하다.

문제는 유미 같은 케이스가 몇이나 있는지에 대한 여부였다.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는군.”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 * *

이른 오전부터 유미는 자신의 몸 상태가 평소와 다름을 눈치챘다.

부정적인 뜻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부터 뭔가 몸이 가벼운 느낌이 들어요.”

“좋은 뜻이야?”

“아마도요?”

촬영 현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계속해서 오늘의 컨디션이 좋음을 어필하는 유미의 모습에 매니저도, 스태프들도 반신반의했다.

그때, 마침 필두가 다가왔다.

“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 유미 양.”

“아, 행보관님!”

새벽 때 필두를 공격했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유미를 반년 전부터 괴롭혔던 컨디션 난조. 그것은 흑마법사 조직원이 그녀에게 건 세뇌 마법 때문이었다.

그것을 필두가 완벽하게 없애버렸으니, 하늘을 걷는 기분일 것이다.

“행보관님 손이 약손이라는 거, 부대에서도 꽤 유명하시다면서요? 어제 들었어요. 행보관님 덕분에 많이 나아진 거 같아요.”

“앞으로도 쭉 괜찮을 겁니다.”

“고마워요, 행보관님!”

유미의 얼굴이 한층 밝아 보였다.

그녀의 활기참 덕분에 촬영장 분위기도 한층 밝아졌다.

필두는 딱히 유미를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소 짓는 유미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는 잘 됐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도 갈수록 마음이 여려지는군.’

악인으로서 자괴감이 들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 그렇진 않았다.

기분 좋은 이상함. 말로 표현하기 참 힘들었다.

* * *

유미를 비롯해 촬영 팀이 모든 일정을 마치고 9090대대를 떠났다.

그 모든 과정을 멀리서 지켜본 서수오가 아쉬움에 담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렵게 건 세뇌를 간단하게 풀어버리다니. 역시 드리무어구먼. 죽지 않았어.”

세뇌 마법을 풀어버린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면역 체계까지 마련해둔 덕분에 유미를 상대로 두 번의 세뇌는 시도조차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이번 사태는 필두가 예상한 그대로 떠보기 식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다음 공격은 좀 더 강하게 가볼까.”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흑마법사 조직원들이 궤멸하지 않는 이상, 필두와 그들의 싸움은 당분간 계속 이어질 예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