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19화
제30장. 그의 무용담(3)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일행들.
아직 해가 저물진 않았지만, 산속은 금세 어두워져서 촬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 PD의 얼굴은 한결 편했다.
생각보다 진도가 많이 나간 덕분이었다.
“내일 추가 촬영만 조금 진행하면 오전에 끝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네요.”
촬영이 빨리 끝날 수도 있다는 말에 스태프, 출연진들도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래도 오늘 촬영 일정이 끝난 건 아니었다.
막사로 돌아가면 필두를 비롯해 무장공비 간첩 사건 때 활약했던 병사, 간부와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은 인터뷰 장면은 저녁 시간 때 실내에서 촬영된다.
장소 협찬은 대대장실.
1357대대와는 다르게 9090대대는 아직 구 막사 형태를 갖췄다. 인터뷰 촬영 장소로 적합한 곳은 대대장실이 고작이었다.
인터뷰 촬영은 카메라 단독 샷을 받으며 질의응답 방식으로 진행된다.
중간에 유미가 나와 직접 질문하는 파트도 있었다.
인터뷰 비중이 가장 많은 이는 바로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영웅이라 불리는 제1포대 행보관, 강필두였다.
분량이 가장 많기에 촬영 시간 분배 또한 적지 않게 할당받았다.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자리를 잡은 필두에게 두 명의 젊은 여성이 다가왔다.
“눈 감으세요.”
“군인치고는 피부가 거칠지 않네요.”
“어머, 그러게.”
카메라 앞에 서는 이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치 장난감이 된 것 같았다.
간단한 메이크업을 마친 이후 자리에 앉았다.
나 PD가 먼저 가볍게 질문을 건넸다.
“무장공비와 처음 마주쳤을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무섭지 않았나요?”
“제가 도망치면 더 큰 희생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먼저 움직였습니다.”
물론 빈말이다.
사실 국가와 국민을 수호한다는 이런 대의적인 감정보다 사적인 생각이 더 앞섰다.
그들은 필두의…… 아니, 드리무어의 가족을 살해한 자와 연루된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때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병사들 경계근무 잘 서고 있나 확인하려고 돌아다니던 찰나에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혹시나 해서 올라가 봤더니 역시나였습니다. 그곳에 무장공비들이 매복한 채 대기 중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대기가 정신을 잃었을 때는 언제였나요?”
“채 5분이 안 걸렸을 때로 기억합니다. 오대기들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하기에 바로 달려들었습니다. 제 부하들은 제 손으로 지키고 싶었으니까요.”
“대단하네요.”
직접 증언으로 들으니 더욱 생동감이 느껴졌다.
거짓말이라는 게 문제지만.
이후 유미가 나와 필두와 대담을 주고받는 식의 인터뷰 촬영이 개시되었다.
내용은 앞선 질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때의 심정이라든지 정황, 그리고 무장공비들을 생포하는 과정 등등.
배우들로 당시의 상황을 재연했지만, 당사자에게 듣는 생생한 증언은 또 다른 맛이 있었다.
특히나 필두는 나 PD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말솜씨가 있는 남자였다.
대본을 보고 읽는 것도 아님에도 막힘없이 이어가는 그의 말에 나 PD도 감탄했다.
“네, 여기서 끊을게요.”
필두가 출연하는 분량은 이것으로 모두 끝났다.
본부포대 병사가 준 물 한 잔을 건네받아 목을 축이는 동안, 나 PD가 필두에게 다가와 그의 인터뷰를 칭찬했다.
“굉장한데요, 행보관님? 그렇게 말씀 잘하시는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매번 병력들 앞에서 이것저것 말할 일이 많다 보니 그런 거 같습니다.”
“아까 포대장님은 벌벌 떠시던데요?”
“흠, 그렇습니까.”
다수의 카메라 앞이라 그런지 긴장감에 못 이긴 포대장은 잠시 쉬었다가 촬영을 재개하기로 했다.
포대장이 다시 돌아오자 카메라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행보관님이 원래 무장공비 두 명을 때려잡을 만큼의 실력을 보유한 분이셨나요?”
나 PD의 질문에 포대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우리 행보관님은 체력도 좋고 자기 관리도 철저하고.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저도 가끔가다 깜짝 놀랄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한 번은 어느 경우가 있었냐면…….”
포대전술훈련을 시작으로 최근 있었던 혹한기 훈련까지.
행보관의 무용담을 주구장창 나열하는 포대장의 모습에 필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건 보나 마나 편집이군.’
본인을 추켜세우는 건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만, 세상만사 지나침은 부족함만도 못할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 경우다.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는 포대장이었지만, 나 PD는 일부러 끊지 않고 그를 방치했다.
일종의 카메라 훈련이었다.
이제야 좀 입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나 PD가 원하는 그림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포대장의 뒤를 이어 대대장, 그리고 오대기 소대원들과 소대장까지.
이것으로 인터뷰 파트는 모두 끝났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자, 다들 밥 먹으러 가죠!”
“네!”
여태 제대로 된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한 스태프들에겐 9090대대 식당에 특별식이 제공될 예정이다.
남성 스태프들은 오랜만에 짬밥 먹을 생각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 와중에 유미는 다른 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는 식이조절 중이라서…… 따로 챙겨온 거 먹을게요.”
몸매 관리는 아이돌의 필수 과제다.
어느 정도 사정을 이해한 스태프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와 함께 차량으로 이동하는 소유미. 그녀의 모습을 끝까지 응시하던 필두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 * *
인터뷰 촬영까지 마치고 오늘 머물기로 예정된 숙소로 이동할 준비를 서두르는 촬영 팀.
때마침 개인정비 시간을 보내던 병사들의 시선이 절로 촬영 팀 쪽으로 향했다.
“저기에 유미가 있다고?”
“예! 저기 저 검은 벤 있지 않습니까? 저쪽에 유미가 타고 있을 겁니다.”
“가서 사인 신청하면 해주려나?”
“간부님들한테 들키기라도 한다면 욕 오지게 먹을지도 모릅니다.”
“하긴, 그렇겠지.”
유미와의 만남을 호시탐탐 노리는 병사들의 눈빛은 하이에나와도 흡사했다.
그러나 유미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고귀한 존재다. 군통령이라 불리는 유미에게 누가 감히 접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들은 알지 못했다.
9090대대에는 상식에 어긋난 병사가 하나 있었다는 사실을.
뚜벅뚜벅. 거침없이 걸어간 한 남자가 유미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소유미 양.”
“네?”
유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병사를 응시했다.
본 적이 있는 병사였다.
“황진수 일병님이시죠?”
“예, 맞습니다.”
오대기 소대원들과 단체로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을 때 얼핏 본 기억이 났다.
“무슨 일이신가요? 저한테 용무라도 있으신지.”
“혹시 ‘마법’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네? 마법이요?”
황당한 질문이었다.
그래도 연예인으로서 자신의 팬일지도 모르는 이를 매몰차게 대할 순 없었다.
설령 상식 밖의 질문을 해왔다 하더라도 말이다.
“미안해요. 전 잘 모르겠어요.”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거나 혹은 사용한 적이 있다거나. 그런 경우는 없습니까?”
“네, 전혀요.”
“그렇습니까.”
“왜 그런 질문을…….”
자초지종을 물으려 할 때, 그녀의 매니저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죄송합니다. 아직 촬영이 끝난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노골적으로 진수의 접근을 경계하는 듯한 태도였다.
상대방 입장에선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 그러나 먼저 실례를 범한 건 진수였기에 그도 뭐라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예, 죄송합니다.”
다시 걸음을 돌려 병사들이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제야 매니저가 경계심을 풀었다.
“유미야. 저런 사람들까지 일일이 상대해 줄 필요 없어. 싫다고 직접 말하기 좀 그러면 나를 부르든가 해.”
“미안해요, 오빠. 앞으로 그렇게 할게요.”
유미가 매니저에게 혼나는 사이, 다시 병사들 무리로 돌아온 진수에게 급격한 관심이 쏟아졌다.
“야, 진수야! 무슨 이야기 했냐?”
“뭐, 뭐래? 우리 유미 님은!”
“그냥 아무것도 안 물어봤습니다.”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잘못 보신 겁니다.”
“……?”
자세한 상황은 설명해 주지 않은 채 제1포대 막사 쪽으로 되돌아갔다.
이 모든 정황을 멀리서 지켜보던 필두가 돌아가는 진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마일더도 눈치챘나 보군.’
소유미. 그녀가 수상하다.
직접 손을 마주잡았을 때 필두가 느꼈던 건 분명 흑마법의 흔적이었다.
흑마법은 레디너스 대륙에서 마법사들에게 금기된 금단의 영역이다. 흑마법은 강력한 힘을 주지만, 그만큼 사용자에게 많은 부담을 선사한다.
그러나 필두는 애초에 그 부작용조차도 자신의 것으로 다룰 만큼의 출중한 실력이 있었기에 아무런 문제 없이 흑마법을 마구 남발할 수 있었다.
하나 소유미는 다르다.
‘포대장한테 들었을 때, 분명 반년 전부터 갑자기 컨디션 난조가 이어지고 있다고 들었었는데. 설마 흑마법 때문인가?’
소유미가 흑마법에 손을 댔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여기엔 문제가 있었다.
마법이 허구로 알려진 세상에서 과연 누가 유미에게 흑마법을 알려줬단 말인가?
이게 궁금했다.
‘설마 저번의 그 흑마법사 조직인가.’
아직 명확하게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흑마법사 조직. 그자들이라면 유미에게 흑마법을 접하게끔 할 수 있는 여력이 된다.
‘아니면 소유미라는 여자가 흑마법사 조직의 일원일지도 몰라.’
여러 가지 가설들이 난무했다.
그러나 무엇하나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었다.
“포대장님.”
“예.”
“유미 양은 오늘 어디서 숙박하기로 했습니까?”
“시내 근처에 있는 모텔에서 머물 겁니다. 인터뷰 촬영 끝나고 아마 바로 그쪽으로 갈 걸요.”
“혹시 그 모텔 위치 좀 알 수 있을까요?”
“네? 그건 왜…….”
“혹시 모르니 알아두려고요.”
필두가 말하는 ‘혹시’라는 게 어떤 뜻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굳이 비밀로 할 필요까진 없었기에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다.
“달밤 모텔입니다.”
“감사합니다, 포대장님.”
유미가 오늘 머물 임시 소재지도 알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저녁에 부지런 좀 떨어야겠군.’
오늘 저녁.
흑마법사 드리무어가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몸소 나선다.
* * *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다큐멘터리 촬영 때문에 관사에서 하룻밤 숙박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필두가 조심스럽게 밖을 나섰다.
위병소에서 관사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바로 움직여볼까.’
군복 대신 미리 가져온 사복을 차려입고 위병소 근처로 다가갔다.
그가 자주 애용하는 투명화 마법까지 건 채로 아무런 제재 없이 위병소를 통과했다.
차량으로 이동하면 출입 자체가 위병소 기록에 남는다. 그래서 일부러 차량 없이 행동하기로 했다.
‘달밤 모텔이라고 했지.’
머릿속으로 위치를 기억해둔 필두가 재차 마법을 걸었다.
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필두의 행동에 제지를 걸었다.
“어딜 가려고 그러나, 드리무어.”
“……마일더냐.”
진수의 등장에 필두가 짧게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수는 자신이 추측한 필두의 목적지를 언급했다.
“소유미라는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가려는 거, 다 안다.”
“너도 눈치챘나 보군.”
“내가 모를 리가 있나. 흑마법을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인데.”
“하긴, 그렇겠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타협안을 제안하는 수밖에.
“내가 장소를 알고 있으니, 같이 가려면 가든가.”
“오지 말라 해도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두 남자의 불편한 동행이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