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17화
제30장. 그의 무용담(1)
국내 최고의 걸그룹이라 불리는 팀, 설틴.
그곳의 리더를 맡은 소유미는 예능 프로그램 녹화를 마치고 잠시 대기실에서 휴식했다.
“후…….”
그녀의 한숨이 매우 무거웠다.
사실 오늘 녹화는 그리 잘 풀리지 못했다.
요즘 들어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입이 술술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끼가 발산되던 그런 타입이었다. 하나 최근 들어 카메라 앞에만 서면 자꾸 과도한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 불안은 긴장감을 낳았다. 덕분에 혼자서 NG를 내는 일도 허다했다.
“왜 그러지, 정말.”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긴 생머리를 쓸어내리며 오늘의 녹화에 비친 자신을 반성하는 동안, 설틴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유미야.”
“아, 오빠. 잠시만요. 바로 갈 준비 할게요.”
“천천히 해. 그보다 좀 괜찮아? 요즘 컨디션 안 좋아 보이던데.”
매니저로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설틴이 잠시 가수 활동을 쉬고 있기에 망정이지, 여기에 가수 스케줄까지 겸했다면 소유미의 컨디션 저하는 분명 팀 단위로까지 번졌을 것이다.
컴백 무대를 가지기 전까지 앞으로 2개월 남짓. 소속사로선 그녀가 그때까지 컨디션을 되찾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미안해요. 저도 요즘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어요.”
원인을 모르니 더 답답할 지경이었다.
소위 말해서 슬럼프라는 녀석일지도 몰랐다.
“오늘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스케줄 있는 거 알지?”
“내일…… 뭐였죠?”
“다큐멘터리 촬영 리포터. 그 뭐였더라. 얼마 전에 뉴스 대문짝만 하게 났던 무장공비 침투사건 관련 다큐멘터리. 기억나지?”
“아, 네. 나 PD님께서 만드신다는 그거요?”
“그래, 그거.”
촬영은 2박 3일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다.
유미가 맡을 역할은 다큐멘터리 리포터 겸 MC. 그녀로선 새로운 도전이었다.
지금까지 메인 활동은 가수였고, 간혹 예능이라든지 배우로서 얼굴을 비출 때가 있었다. 워낙 다방면으로 활동했기에 그녀에게 붙은 별칭이 ‘만능 엔터테이너 유미’였다.
그러나 요즘은 그리 평판이 좋지 못했다.
저조한 텐션. 잦은 NG. 스태프들로부터 눈초리를 받기 딱 좋았다.
“이번에는 잘 좀 해보자. 새로운 도전인 만큼 집중해서 가자고. 오케이?”
“네, 알았어요.”
유미는 도전정신이 뛰어난 여성이다. 가수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것들을 해보고 싶어 하는 것이 연예인으로서 그녀의 태도이자 신념이다.
이번 국군 다큐멘터리 역시 그녀에겐 중요한 도전 중 하나다. 대한민국에서 크게 화자가 되었던 사건인 만큼 공중파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려는 다큐. 그곳의 진행자로 발탁된 그녀였기에 열의는 더욱 높아갔다.
‘열심히 해보자! 정신 차려, 소유미!’
본인 스스로 결의를 다졌다.
* * *
“다큐멘터리 제작이라. 결국 내일로 결정되었군요.”
“좀 더 일찍 말씀드려야 했었는데. 죄송합니다, 행보관님.”
포대장이 연신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필두는 그를 탓하려 하지 않았다.
“포대장님도 방금 대대장님에게 막 소식을 전해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굳이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단지 이제 막 파견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내일부터 바로 촬영을 시작해야 한다고 하니 그게 좀 거슬릴 뿐이었다.
대략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것들은 이미 들어서 잘 안다.
그때 당시의 상황을 재연 배우들이 촬영하고, 필두와 주요 관계자들은 인터뷰를 하는 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것도 대대장님한테 방금 들은 정보입니다만.”
포대장의 얼굴에 약간의 설렘이 감돌았다.
“진행자 역할을 도맡을 연예인이 그 소유미 양이라고 합니다.”
“소유미? 누굽니까.”
“아, 행보관님은 모르시나 보군요.”
헛기침으로 잠시 텀을 둔 포대장이 속사포로 설명에 임했다.
“요즘 부동의 걸 그룹 1순위를 달리는 ‘설틴’이라는 팀의 리더를 맡은 여자 연예인입니다. 나이는 올해로 24세. 처음에는 모델로 데뷔했었는데 그 이후에 현 소속사로부터 가수 스카웃 제의를 받고 3년 전에 걸 그룹으로 데뷔했습니다. 가수뿐만 아니라 예능, 배우 등 각종 분야를 섭렵 중인 대세 아이돌이죠.”
“잘 알고 계시는군요. 포대장님.”
“실은 제가 설틴 팬클럽 멤버이지 말입니다. 하하하!”
어쩐지.
소유미에 대해 너무 잘 안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설틴의 열성 팬이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여하튼 인기 많은 여자 연예인이라는 점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무튼 촬영은 내일 9시부터 바로 시작된다고 하니, 행보관님은 저하고 같이 대기하면서 차례 기다리시면 될 거 같습니다. 촬영 진행되는 것도 볼 수 있다고 하니 기다리는 게 지루하진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기억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필두는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적으로 여기는 흑마법사 조직 일원들은 필두의 존재를 알 만큼 안 상태였다.
구태여 뒤에 숨어서 지낼 이유가 없어졌다.
게다가 지금까지 방송이라는 걸 체험해 보지 못했다.
‘방송이라. 궁금하긴 하군.’
강한 호기심이 그를 자극했다.
* * *
촬영 팀이 오기로 예정된 날.
아침부터 병사들의 얼굴에 강한 생기가 감돌았다.
“야, 들었냐?”
“들었습니다. 오늘 설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소유미, 내가 정말 좋아하는 아이돌인데!”
“사인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방에서 기대감에 사로잡힌 발언들이 들려왔다.
보통 아침 점호는 병사들의 늘어지는 목소리와 피곤한 눈빛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아침 점호가 끝나자마자 세면세족을 위해 병사들이 화장실 앞으로 모여들었다.
문나성을 비롯해 말년병장, 그리고 어느 정도 짬 되는 선임병들은 가끔 지금 이 세면세족 시간을 건너뛰기도 했다. 땀내 나는 병사들과 부대끼며 씻는 것보다 차라리 밥 먹고 와서 여유롭게 혼자 씻는 게 훨씬 더 마음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샤워타월을 두르고 등장한 문나성이 이렇게 외쳤다.
“나, 샤워할 거니까 방해하지 마라!”
“아침부터 무슨 샤워입니까?”
“그러다가 당직사관님한테 걸리면 혼납니다.”
“조용히 혼자서 할 거니까 괜찮아. 아무튼, 그런 줄 알아라.”
“문 병장님, 설레발 좀 그만 치지 말입니다.”
“조용히 해! 혹시 모르잖아. 유미가 날 봐줄지!”
“어휴.”
청결에 지극정성을 쏟는 이유가 있었다.
소유미가 9090대대를 방문한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아침에 간부들 몰래 샤워하는 모험을 감수할 만한 이유가 된다.
한편, 출근을 서두른 필두가 향한 곳은 9090대대 행정반이 아닌 대대장실이었다.
“충성.”
“오셨습니까, 행보관님.”
대대장이 그의 방문을 반겼다.
“오늘 촬영 있다는 거, 알고 계시죠?”
“예.”
“장관님께서 군의 이미지를 쇄신시킬 좋은 기회라고 하니 아무쪼록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거수경례 뒤에 바로 대대장실을 나선 필두가 본인의 일터인 제1포대로 방향을 틀었다.
행정반에 도착하자마자 방송으로 병사들에게 직접 전파사항을 날렸다.
“아아. 행보관이다. 오늘은 다큐멘터리 촬영팀 온다고 하니까 청소 똑바로 해라. 내가 나중에 직접 위생검사 할 테니까 대충할 생각은 하지도 말고.”
굳이 이런 말까지 않아도 병사들이 알아서 청결 유지에 힘을 쓰는 중이었다.
국방부 장관이 오는 것과 인기 여성 아이돌이 온다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국방부 장관 때에는 의무감으로 어쩔 수 없이 청소에 매진해야 했었으나 소유미는 다르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다! 이 열망 때문에 병사들은 굳이 시키지 않은 것들까지 알아서 척척 소화해 냈다.
‘나중에 소유미가 TV 같은 곳에 나가서 우리를 언급해 줄지도 모르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인상에 남아야 해!’
이것이 병사들의 속내였다.
한편, 영문도 모른 채 분리수거장에 끌려온 진수가 선임병들에게 물었다.
“소유미라는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입니까?”
“당연하지, 짜샤! 우리 군인들에게 있어선 국방부 장관님보다도 더 높으신 분일 거다!”
“그 정도입니까!”
“그럼! 우리 군인들의 대통령! 줄여서 군통령! 그게 바로 설틴!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진수에게 있어선 충격이었다.
국방부 장관보다 더 높은 자가 존재할 줄이야!
‘그 여성이 이 나라 국군 실세인가! 내가 몰랐던 존재가 있을 줄이야. 반성해야겠군.’
본의 아니게 반성의 자세에 임하는 진수였다.
애초에 그는 걸 그룹에 관심조차 없었다. 남들이 TV 앞에 모여 걸 그룹의 섹시 댄스에 푹 빠져 있을 때에도 진수는 책 읽기, 헬스 등 자기관리 일에 매진했다.
그러니 알 턱이 있을까.
‘조금 있다 온다고 들었으니 잘 봐둬야겠어!’
군통령이라 불리는 존재와의 만남.
절로 긴장감이 들었다.
* * *
점점 민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깊숙한 곳까지 위로 올라가는 한 대의 벤.
그 안에서 수면 안대를 착용한 채 꿈나라로 잠시 여행을 떠났던 소유미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
“……매니저 오빠, 도착했어요?”
“아니, 아직 멀었어.”
“아직도요? 2시간이나 지났는데요?”
“30분 더 가야 나올 거야.”
“우와. 엄청 먼 곳이네요.”
“민통선 인근 지역이니까 멀지. 좌석 옆에 냉커피 있으니까 꺼내서 한 잔 마셔둬.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네.”
커피는 유미의 힘의 원천이다.
자양강장제보다도 커피가 더 그녀에게 원기를 보충해 준다.
딸칵!
캔을 따 물을 마시듯 벌컥벌컥 마신 후에 스스로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아, 어깨 결려.”
“몸이라도 안 좋아?”
“안 좋다기보다는 그냥 약간 신경 쓰이는 수준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숙박을 하면서 며칠 동안 군부대 촬영을 해야 한다.
이처럼 장시간의 촬영 일정을 가질 때에는 컨디션 조절이 필수다.
“촬영 팀은 먼저 도착했다고 하니까 일단 가면 나 PD님한테 먼저 인사드리자.”
“네, 오빠.”
매니저의 말대로 30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드디어 9090대대 위병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니저, 코디네이터 등등 소유미에게 붙은 인력만 대여섯 명이었다.
소속사에서도 유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그만큼 유미가 활약을 해줘야 한다.
“안녕하세요!”
차량에 하차하자마자 매니저와 함께 걸음을 재촉해 나영선 PD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재연 배우들에게 이것저것 상황 설명을 들려주던 나영선 PD가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유미 양! 어서 와요.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시죠?”
“아니예요! 괜찮아요. 공기도 맑고 나름 좋은 곳 같은데요?”
“하하하! 유미 양이 그렇게 말해주니 여기 계신 군인분들도 기뻐하겠네요. 우선은 재연 상황 촬영할 테니까 잠시 쉬고 계세요. 아, 그전에 소개시켜드릴 분이 있네요.”
나 PD가 다급히 누군가를 찾았다.
부름을 받고 도착한 세 명의 남자.
병사는 아니었다.
“소개해드릴게요. 여기가 이 부대 대대장님, 가운데가 1포대 포대장님, 그리고 맨 끝이 행보관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소유미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기운 넘치는 유미의 자기소개에 대대장은 아빠 미소를, 포대장은 삼촌 팬의 웃음을 지었다.
이들과 다르게 필두는 마치 유미를 분석하려는 듯한 눈빛을 뽐냈다.
‘이 여자가 연예인이라는 자군.’
연예인은 일반인과 어떻게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흥미로운 존재의 등장에 필두의 관심이 급격히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