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14화
제29장. 파견(5)
진수가 예고한 대로 필두가 탄약고 초소 근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어디 한번 허를 찔러볼까.’
필두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간이동 마법이었다. 그러나 진수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탄약고 초소 뒤쪽으로 이동한 필두를 정확하게 캐치해냈다.
“정지,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정확하게 초소 안에서 필두 쪽으로 총구를 겨눴다.
그러자 필두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지금 대낮이다. 밤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필두의 태클에 곧장 총구를 돌렸다.
한편, 오창석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막사에서 이제 나와 탄약고 초소까지 걸어오는 데에는 족히 10분 이상이 걸린다. 그런데 행보관이 갑자기 초소 뒤에서 튀어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진수는 필두의 깜짝 등장을 정확하게 캐치해 냈다.
두 사람의 행동은 일반인으로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슨 드X곤볼 보는 것도 아니고. 신출귀몰이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그러나 필두와 진수는 오히려 이것이 일상이라는 듯이 담담하게 반응했다.
“암구호는 잘 알고 있겠지.”
“이병 황진수. 오늘의 암구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암구호, 문어에 도라지, 답어에 기상청. 이상입니다.”
“잘 알고 있군.”
오창석에겐 천운이었다.
사실 그는 오늘의 암구호를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질문의 상대가 자신이 아닌 진수에게 돌아갔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안도하는 오창석의 시선을 필두가 곧장 캐치해냈다.
“암구호 잊지 말고 잘 기억해둬라, 오창석.”
“상병 오창석! 네! 죄송합니다!”
필두의 눈썰미를 무시해선 안 된다.
* * *
식사 문제는 필두가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혹한기라 하더라도 식사까지 거르면서 훈련을 치르는 건 아니다. 취사병들은 그대로 대대에 남아 식사 준비를 진행한다.
추진을 준비할 때, 파견 인력들이 먹을 만큼의 양은 따로 빼놓는다. 알파 포대 인원들은 그냥 식사 시간에 맞춰서 식당으로 내려가면 된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와. 밥 먹고 올라올 때, 완전 대박이겠다.”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문나성 병장이 식사 이동을 하던 중에 내뱉은 말이었다.
이들은 현재 1357대대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악명 높은 바로 그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경사가 꽤 가파른 탓에 내려갈 때에도 무게 중심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1357대대 식당 역시 9090대대와 다르게 신식 건물이었다.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깔끔한 인테리어. 흠집 하나 없는 테이블. 환한 내부 조명까지.
“그거 보는 거 같다.”
“뭐 말입니까?”
도혁이 묻자 나성이 입으로 자체 효과음을 냈다.
“빠바바바밤~ 빠바바바밤~”
“아, 그거 말입니까.”
헌집을 새집으로 환골탈태시켜주는 모 예능 프로그램의 테마송이 떠오른 것이다.
물론 여긴 9090대대가 아니지만.
병사들을 이끌고 내려온 하나포 반장이 전투복 차림의 취사병에게 물었다.
“여기 식판 덮어져 있는 거, 가져가서 먹으면 돼?”
“충성! 예, 그렇습니다.”
“그래. 잘 먹으마.”
하나포 반장과 취사병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병사들이 각자 자신의 식판을 들고 이동했다.
위에 덮어져 있는 식판을 치우자,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들이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젓가락을 든 문나성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일단 외형은 합격이네.”
저녁 메뉴는 탕수육과 소고기뭇국, 김치, 야채볶음, 그리고 밥.
부식으로 어니언 음료가 지급되었다.
“탕수육이 가장 궁금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지 않은가.
아직 맛을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대감이 절로 상승했다.
저녁 식사 메뉴의 메인 스트라이커, 탕수육으로 향하는 병사들의 젓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삭!
튀김옷을 깨무는 순간, 병사들이 서로를 응시했다.
누가 먼저 소감을 말할지. 눈치 싸움이 펼쳐졌다.
그사이에 탕수육을 입안에 넣은 채 우물거리던 하나포 반장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야. 밥은 우리 대대가 더 맛있는 거 같다.”
취사병들이 들을까 봐 직접 말은 하지 못했지만, 9090대대 병사들은 격한 공감을 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저녁 10시가 되었을 때, 필두가 생활관으로 들어와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점호는 딱히 안 할 테니 알아서 자라. 그리고 TV 연등은 없으니까 볼 생각은 하지도 말고.”
애초에 병사들도 기대는 안 했다.
근무만 잘 서면 자유 시간에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필두였으나 취침 시간은 예외다.
군인에게는 정해진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이 있다. 거기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필두의 지시에 따라 TV를 끄고 잠을 청하는 병사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묘한 기분을 선사했다.
낯선 환경에서의 취침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불편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빡센 근무 일정 때문일까.
병사들은 군말하지 않고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한편. 첫날 당직사관을 맡게 된 필두가 아직도 행정반에 남아 스마트폰을 만지는 하나포 반장에게 취침을 권유했다.
“들어가서 자는 게 어떠냐.”
“조금만 더 있다가 자겠습니다. 게임 이벤트 중인지라…….”
“그러다가 날 밤새서 근무 교대 안 하면 내가 엉덩이 걷어차서라도 깨울 거다.”
“하하하, 알고 있습니다.”
넉살 좋은 하나포 반장의 웃음. 그러나 과연 이 웃음이 3박 4일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자정을 넘어 새벽 1시, 새벽 2시. 그리고 근무 교대. 3시, 4시. 또 근무 교대.
2시간 간격으로 일정 패턴이 이어졌다.
이제 겨우 이틀 차에 접어들었는데 병사들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피곤함이 번져가고 있었다.
“아…… 죽겠다, 레알루다가.”
고만해가 피곤함을 토로했지만, 그렇다고 근무자 명단에서 제외해 주고 하는 그런 건 없다.
여기서 단 한 명이라도 빠지는 순간, 근무가 완전히 엉망이 되기 때문이었다.
당직에게 근무 인솔을 맡긴 필두가 잠시 막사를 나섰다.
혹시 몰라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붉은 눈의 까마귀를 행정반에 배치해 뒀다.
지금 행정반에는 아무도 없다. 전화라도 왔을 때를 대비해서 일부러 까마귀를 남겨놓았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까마귀가 바로 필두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러면 순간이동으로 행정반까지 이동하면 그만이다.
당직이 인솔을 마친 전번근무자들과 행정반에 도착하면 까마귀는 알아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모든 대비를 한 채 부대를 나섰다.
텅텅 빈 1357대대. 그 광경이 필두에게 신선함을 부여했다.
매번 북적이던 부대가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니.
평화보다 고요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렸다.
‘9090대대도 좋긴 하지만, 여기도 나름 나쁘지 않군.’
주변을 맴돌며 1357대대가 어떤 곳인지 구석구석 파악하기 작업에 들어갔다.
3박 4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혹시 또 모르지 않은가. 만일에 대비해 부대의 위치, 구조를 알아두는 편이 좋았다.
확실히 9090대대에 비해 부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포병부대는 자주포, 견인포를 수납할 포상이라는 공간이 필요했기에 부대가 꽤 큰 편이었다. 그러나 보병부대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마치고 행정반으로 돌아왔을 때의 시간은 새벽 6시 20분을 가리켰다.
꾸벅꾸벅 졸던 당직사병이 뒤늦게 필두의 존재를 확인했다.
“병력들은?”
“아직 자고 있습니다. 제가 가서 깨우겠습니다.”
“아니, 됐다. 어차피 점호도 없으니 그냥 알아서 자게 놔둬라. 나중에 시간 되면 후번근무자 네 명만 깨워라.”
“예, 알겠습니다.
인력이 없기에 야간에는 당직사병이 불침번 업무까지 소화한다.
하루 종일 당직 근무를 서느라 피곤함의 극치를 달리던 당직사병. 해가 온전히 하늘 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시간은 오전 7시를 가리켰다.
필두와 교대로 식사를 마친 뒤 대충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오전 9시가 되었다.
당직사병들의 근무 교대는 끝났지만, 아직 하나포 반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간부 생활관 좀 다녀오마.”
“예!”
행정반 바로 맞은편에 자리 잡은 간부 생활관.
문을 열자, 코 고는 소리를 내며 단잠에 빠진 하나포 반장이 가장 먼저 보였다.
배게 근처에 놓인 스마트 폰 액정 위에는 게임 화면이 그대로 떠 있었다.
“이 녀석이. 어제 그토록 말을 했건만.”
예고했던 그대로 필두의 발이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하나포 반장의 입에서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아악!”
“언제까지 쳐 잘 거냐.”
“버,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일어나긴 개뿔. 근무 교대 안 하냐.”
“아차! 죄송합니다!”
이제야 필두가 밤새도록 당직 근무를 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곧장 행정반에 들어온 하나포 반장. 그에게 완장을 떠넘긴 직후 바로 세면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신 막사답게 화장실이 따로, 샤워실이 따로, 그리고 세면실과 세탁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덕분에 남의 대변 냄새를 맡으면서 세면세족을 하지 않아도 된다.
쏴아아!
시원한 물줄기로 세수를 하자, 피곤함이 싹 가시는 듯했다.
밤을 새워가면서 당직사관 업무를 진행했던 필두였으나, 피곤함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대낮보다 더 쌩쌩했다.
‘좀 뛰고 올까.’
안 그래도 당직 근무 때문에 아침에 매번 하던 마법 수련과 몸풀기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유산소 운동이라도 하자는 심산으로 간부 생활관을 찾은 필두가 환복을 마치고 연병장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딱 마주친 근무교대 일행. 당직사병이 대표로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행보관님,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운동 간다.”
“잘못 들었습니다?”
“운동 간다고.”
꼴딱 밤을 새우고 운동 간다니. 이게 사람이란 말인가.
“안 피곤하십니까?”
“운동하고 잠드는 게 더 개운할 때가 있으니까 그러는 거다. 너희나 후딱 들어가서 쉬어라.”
“알겠습니다.”
참으로 열정적인 필두의 모습이었다.
경외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충 30분 정도 쉼 없이 계속 달리기 운동으로 한껏 몸을 달궜다.
연병장을 뛰는 필두의 모습을 위병소에서 지켜보던 문나성이 감탄을 토로했다.
“진짜 대단하다, 우리 행보관님. 우리 같은 20대도 저 정도 체력은 없을 텐데.”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반대편에 있는 후임근무자 초소에서 도혁의 공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행보관님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지금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랬었습니다.”
“저번이 뭔데?”
“그런 게 있습니다.”
전도혁을 개과천선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잠들어 있던 전도혁을 산속까지 끌고 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두고 멧돼지 밥 되기 싫으면 착실히 살라고 협박했던 필두의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문나성 병장님도 전역하시기 전까지 행보관님 눈밖에 안 나게 조심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건 경험자로서 당부 드리는 말입니다.”
“도대체 뭘 경험했길래.”
의구심만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