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13화
제29장. 파견(4)
간부 생활관을 찾은 필두가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확실히 간부가 머무는 곳이라 그런지 병사 생활관보다 아늑함이 느껴졌다.
그런 필두의 뒤를 졸졸 따라온 중대장이 연신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덕분에 큰 위기를 넘겼습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소총 관리는 제대로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 대국민 조롱감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 그렇지요. 죄송합니다.”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중대장이었으나 필두는 딱히 그가 마음에 안 들거나 그러지 않았다.
“이제 곧 이동 준비 시작하시겠군요.”
“아, 네. 그렇죠.”
오후 1시 반. 이제 30분 후면 다른 진지로 이동을 시작해야 한다.
“이틀째에 다시 부대로 한 번 돌아올 겁니다. 오후에 대대에서 훈련하기로 예정되어 있거든요. 행보관님께서 병사들이랑 같이 막사에서 생활하다가 이건 좀 불편한 거 같다 하고 느낀 점 있으면 그때 저한테 바로 말씀해 주세요. 아, 이참에 전화번호라도 교환할 수 있을까요?”
“그러도록 하죠.”
자기 부대 챙기느라 바쁠 터인데도 중대장은 필두에게 꽤 잘 대해주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K-2 소총을 찾게 도와준 점이 크게 작용한 듯했다.
만약 필두가 제1중대를 도와줬다는 사실을 진수가 접했다면, 아마 거짓말하지 말라고 핍박을 늘어놓았을지도 몰랐다.
악인이 악행도 아니고 선행이라니. 마일더가 아는 드리무어는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다.
‘점점 강필두라는 인물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나답지 않군.’
연기라 하더라도 그것이 일상이 되면 더 이상 연기가 아니다.
어쩌면 드리무어도 필두에 동화되어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딱히 나쁘진 않았다. 애초에 이 세계는 드리무어보다 필두를 더 필요로 하니까.
게다가 필두의 원수로 추정되는 자들도 이 세계로 같이 넘어왔다. 그들만 없애면, 필두는 딱히 레디너스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미련이 없어지게 된다.
애초에 필두가 악인이 된 본래의 목적은 그들이었으니까.
잠시 레디너스 관련 생각을 접어둔 필두가 현실로 돌아왔다.
“병사들한테 짐 옮기라고 전해두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막사를 나온 필두가 포차에 내린 채 신 막사 건물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병사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 쳐다보고 짐 옮겨라.”
“저희, 어디로 가면 됩니까?”
“4생활관하고 5생활관. 하나포부터 넷포까지가 4생활관 쓰고 나머지는 5생활관 쓴다. 그리고 하나포 반장은 간부 생활관으로 개인 짐 옮겨둬라.”
“예, 알겠습니다!”
하나포 반장을 비롯해 병사들이 곧장 군장과 더블백을 어깨에 짊어졌다.
간부 생활관은 4명이 묶을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필두와 둘이서 생활할 생각을 하니 하나포 반장은 벌써부터 앞날이 걱정이었다.
한편, 각각 4, 5생활관에 도착한 병사들이 짐을 풀자마자 신 막사에 대한 소감을 털어놓았다.
“우와! 문나성 병장님! 여기 TV, 엄청 큽니다!”
“관물대로 완전 신식이지 말입니다.”
“군 생활하면서 침대를 사용하게 될 줄이야.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신 막사로부터 받은 첫 인상을 털어놓느라 여념이 없었다.
병사들이 일순간 수다쟁이가 되었다. 문나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와, X발, 진짜 대박이다! 여기가 막사냐, 호텔이냐!”
“문나성 병장님. 아까 분명 초보 티 내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전도혁의 날카로운 태클에 문나성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시끄러워, 이 녀석아! 사람이 말이야. 감탄도 좀 할 수 있지! 안 그러냐!”
구 막사와 확실히 뭔가 다르다. 그건 진수도 잘 알 수 있었다.
‘우리 막사는 이렇게 안 변하려나.’
진수가 전역하기 전까지는 계획에 없었다. 희망은 일찌감치 버리는 편이 좋은 법. 그래야 헛된 기대감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 * *
생활관도 생활관이지만, 샤워실과 화장실도 신진 문물 그 자체였다.
대변기를 확인한 고만해가 입을 쩍 벌렸다.
“화장실에 비데가 있어! 세상에.”
1사로 대변기 한정이긴 하지만, 비대의 존재는 이들에게 문화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침대에 이어 비데라니.
문나성 역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애들아.”
“예, 문나성 병장님.”
“나, 오늘부터 1357대대로 전입할 거다. 말리지 마라.”
“전역이 며칠 안 남았는데 무슨 전입입니까.”
병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정도로 신 막사가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병사들의 농담 따먹기를 바로 근처에서 듣고 있던 필두가 쓴소리를 늘어놓았다.
“아직 훈련 중이다. 싸돌아다니지 말고 생활관에 가서 짐이나 풀고 있어라. 그리고 오늘 당직 누구냐.”
“상병 오성민!”
오성민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근무자 명단 넘길 테니까 근무자들 투입 시킬 준비 서둘러라.”
“예, 알겠습니다!”
본래 외곽 근무는 1시간가량을 서는 게 정석이지만, 파견을 나온 이들의 일정은 조금 달라진다.
주간 외곽 근무는 2시간씩 번갈아 근무에 투입된다. 3교대이기 때문에 2시간 근무를 선 뒤 4시간의 휴식이 보장된다. 이것을 3박 4일 동안 반복한다.
상당히 빡센 일정이다. 그래서 필두는 일부러 이들에게 PX 추진 같은 것들을 최대한 허용해 줬다.
이름 하야 지옥 스케줄. 물론 필두도 예외는 없다.
필두와 하나포 반장. 두 사람이 번갈아 당직사관을 교대할 것이다. 필요에 따라선 근무휴식도 없이 병력을 통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간부든 병사든 이래나 저래나 힘든 건 마찬가지다.
* * *
오후 2시가 넘자 1357대대가 서서히 이동 준비를 시작했다.
9090대대와 다르게 이들은 보병사단이었기 때문에 이동 시에 큰 준비를 요하진 않았다.
위병소 근무로 투입된 문나성 병장과 전도혁 일병.
그중 선임근무자인 문나성 병장이 위병소 바깥을 나서는 군용 트럭들을 향해 받들어총을 선보였다.
“조심해서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수십여 대의 차량이 바깥으로 나간 직후.
그제야 방어벽을 다시 되돌리고 위병소 초소로 돌아온 문나성이 바로 총을 내려놓았다.
“아, 개 힘드네.”
“벌써부터 힘들어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문나성 병장님. 아직 근무 끝나려면 1시간 30분이나 남았습니다.”
“이런 썩을.”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1시간 근무 서는 것도 빡센데, 2배가량의 시간을 근무에 투자해야 하다니. 짜증이 절로 유발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근무만 서면 자유시간이 4시간 보장된다는 점이었다.
근무에 투입되기 전. 필두가 병사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다.
근무만 잘 서면, 나머지 시간에 절대 터치하지 않겠다.
반대로 말하면, 근무태만으로 걸렸다간 알아서 하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행보관님이 순찰 오실지도 모릅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도혁이 자신의 추측을 들려줬다. 그러나 나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이, 오버하지 마라. 아무리 우리 행보관님이라도 설마 타 부대 파견 와서까지 순찰을 돌까.”
‘문나성 병장이 아직 행보관님을 제대로 모르는구먼.’
후임이었기에 차마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분명 그는 온다. 전도혁은 확신했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일까. 도혁의 시선에 필두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문나성 병장님! 행보관님 오십니다!”
“뭐? 진짜?”
“예! 저기 안 보입니까?”
“이런 썅! 파견까지 왔는데도 순찰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냐?”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행보관님이라면 순찰 돌고도 남는다고 말입니다.”
필두의 성향은 이미 도혁이 꿰고 있었다.
한편, 도혁 덕분에 미리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총을 들고 잠시 풀었던 방탄모의 턱끈을 다시 조였다.
“도혁아! 오늘 암구호 뭐냐!”
“문어에 도라지, 답어에 기상청입니다!”
“아, 알았다!”
포대전술훈련의 악몽이 떠올랐을까. 좌경계총 자세를 갖추면서 도혁에게 암구호를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위병소에 도착한 필두가 두 사람을 응시했다.
“충성!”
문나성이 대표로 받들어 총 자세를 선보였다. 그때, 필두가 그를 지목했다.
“도라지.”
암구호 중 문어를 거론했다.
이제는 척하면 척이었다.
“기상청!”
“용케도 대답하는군.”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구나. 보나 마나 도혁이가 알려줘서 기억하는 거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하, 하하하하하…….”
역시 필두 앞에선 거짓말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야 나았다.
“파견 상태 점검하러 상급 부대에서 기습으로 순찰 올 수도 있으니 주의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조장 근무자는 없으니까 선임근무자가 출입기록 잘 남겨두고. 나중에 와서 확인한다.”
“네!”
필두한테 듣는 말 중 가장 무서운 한 마디.
나중에 다시 확인한다. 이것만큼 두려운 말도 없었다.
그렇게 똑바로 하라는 의미를 담은 경고를 날리고 다시 퇴장하는 필두.
그제야 문나성이 안도했다.
“하아, 진짜 우리 행보관님은 너무 성실해서 탈이라니까.”
자연스럽게 총을 내려놓고 다시 방탄모 턱 끈을 풀었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무태만으로 영창 가고 싶냐.”
“아, 아닙니다아아!”
필두의 목소리였다.
분명 막사 쪽으로 올라가지 않았나. 그런데 갑자기 위병소 초소 뒤쪽에서 툭 하고 튀어나왔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황급히 좌경계총 자세를 취해보지만, 풀어헤친 방탄모의 턱 끈까지 처리할 순 없었다.
“후임을 보고 배워라, 이 녀석아.”
필두가 대신 그의 턱 끈을 조여 줬다.
“병장 문나성!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음부터 근무 똑바로 서라. 농담으로 하는 말 아니니까.”
“예! 목숨 걸고 근무 서겠습니다!”
그제야 필두의 걸음이 다시 막사 쪽으로 향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멋대로 다시 앉을 순 없었다.
언제 또 필두가 튀어나올지 몰랐으니까.
한편. 이 모든 과정을 후임근무자 자리에서 지켜봤던 전도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 말이 맞지 말입니다.”
“하…… 말년병장의 천적은 행보관이라도 하던데, 그 말이 진짜구나.”
“우리 행보관님은 말년병장 한정 천적이 아니라 모든 병사의 천적일 겁니다.”
이미 필두의 무서움을 한 차례 겪었던 전도혁이었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 * *
탄약고 초소.
경계 근무에 임하던 선임근무자, 오창석 상병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들이 벌써 근무를 서기 시작한 지 근 1시간 반가량이 지나갔다.
“어휴, 다리 아프다. 다리 아파.”
방탄모를 바닥에 깐 채 엉덩이를 붙인 창석이 후임근무자, 진수에게도 쉴 것을 제안했다.
“진수야. 너도 와서 쉬어라.”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너, 아까부터 계속 좌경계총 하고 서 있었잖아. 선임 명령이니까 와서 쉬어라.”
“그러기는 힘들 거 같습니다.”
“뭐? 야. 황진수. 선임 말이 말 같지 않냐?”
“행보관님 올라오고 있습니다.”
“뭐야?”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오창석이 황급히 방탄모와 총을 들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행보관님 아직 올라오려면 멀었습니다.”
“어디 계시는데?”
“막사 뒤에서 이제 막 걸어오고 있습니다.”
“미친, 그 거리가 보여?”
“예.”
수십 미터 떨어진 곳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진수의 시력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