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09화
제28장. 앞으로 나아갈 용기(3)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장소를 이동하는 두 남녀.
이들의 시선이 바삐 움직였다. 식사하기 위한 가게를 찾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도심보다 네온사인의 불빛이 그렇게까지 화려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여행을 온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가게들이 너무 많아 어느 곳을 들어가야 좋을지 몰랐다.
가게도 가게지만, 죄다 해산물 관련 음식이 주류라는 것도 문제였다.
점심때 지겹도록 먹었던 해산물이었기에 웬만하면 다른 걸 먹고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필두가 오른손으로 특정 가게를 가리켰다.
“저기 어떻습니까.”
간소해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바깥에 진열된 메뉴판에도 스테이크와 파스타 등 다양한 메뉴가 적혀 있었다.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럼 바로 가보죠.”
“네!”
안으로 들어서자 유니폼을 입은 남성이 이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시죠?”
“두 명입니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창가 쪽 괜찮으신가요?”
“예.”
모처럼 바다를 보러 왔으니, 기왕이면 경치를 구경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더 좋지 않겠나.
비수기라 그런지 사람도 없어서 바다의 절경이 더욱더 눈에 잘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혜정이 다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얏!”
무의식적으로 신음을 냈다.
힐을 신은 상태에서 너무 오래 걸었더니 부작용이 온 것이었다.
통증에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그녀. 필두가 이를 곧장 캐치했다.
“괜찮습니까, 혜정 씨.”
“네, 괜찮아요. 조금 욱신거리는 정도니까요.”
“잠시만 보여주세요.”
“보, 보여 달라니요? 무엇을요?”
“발입니다.”
“그건 좀…….”
쑥스러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필두의 태도는 강경했다.
“괜히 놔뒀다가 더 큰 병이 될 수 있습니다.”
“…….”
필두는 군인이다.
부하가 다쳤을 때, 혹은 응급상황일 때 대처하는 방법 같은 건 숙지하고 있을 터.
결국 마지못해 필두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하이힐을 벗어 오른쪽 다리를 살짝 내밀었다.
스타킹에 감싸여진 혜정의 오른 다리는 군살 하나 없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필두가 혜정의 다리를 가볍게 만졌다.
순간 크게 움찔하는 혜정. 동시에 걱정도 들었다.
냄새라도 나는 건 아닐지. 다리 두껍다고 흉보는 건 아닐지.
온갖 걱정들이 혜정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필두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근육이 뭉쳤군.’
그래도 놔두면 걷는 데에 지장이 갈 수 있었다.
하급 치유 마법을 발동시키자, 뭉쳤던 근육들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혜정의 표정도 아까와는 다르게 한결 편안해졌다.
“어떻습니까.”
“많이 괜찮아졌어요. 어떻게 한 거예요? 약 바른 것도 아닌데…….”
“제 손이 부대에서도 약손이라 불립니다. 만져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신기하네요.”
왠지 필두가 말하니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다시 힐을 신은 혜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험 삼아 몇 걸음 걸어봤다.
역시나 멀쩡했다. 필두의 말대로였다.
“고마워요. 정말 필두 씨는 못 하는 게 없네요.”
“못하는 거야 있습니다. 저도 인간이니까요.”
“그게 뭔가요?”
빤히 바라보는 혜정의 시선에 부담감마저 느껴졌다.
가족들을 지키지 못한 것.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것.
그것이 필두가 해내지 못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르만 학살 사건에 대해 언급해 봤자 혜정이 알아줄 리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레디너스라는 존재 자체도 몰랐으니까.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그를 향해 혜정이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연애 아닌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의외였다.
혜정이 이렇게 직설적인 질문을 꺼낼 줄은 필두도 미처 몰랐다.
확실히 혜정의 말이 맞았다.
드리무어는 둘째 치더라도 강필두라는 남자는 지금까지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초식남이었다.
‘강필두로서 대답하면 되겠지.’
결정을 내린 후에 입을 열었다.
“예. 연애 경험이 없다시피 하거든요.”
“필두 씨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어색해하는 거 같아요.”
“…….”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 부모님도 그렇고 부대원도 그렇고. 직장 동료도 그렇고. 남들보다 한 발 먼저 지인들을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사랑이라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그것이 혜정의 생각이었다.
사랑. 결코 어렵지 않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건 언제든지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필두는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들면 안 된다.
하르만 학살 사건.
그것은 필두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애초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아픔조차 겪지 않았을 터.
그리고 그 결과. 지금의 드리무어가 탄생했다.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가시를 바짝 세우는 고슴도치.
그러나 혜정은 그 고슴도치를 향해 겁 없이 다가갔다.
“대부분의 사람이 필두 씨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직접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분명 그럴 거예요.”
“혜정 씨도 마찬가지입니까?”
순간 혜정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필두보다 더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
“네.”
자신의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이제는 필두의 차례다.
타인을 두려워하는 겁먹은 고슴도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전 제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게 가장 괴롭습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하르만 학살 사건을 겪고 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드리무어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낸 적 없었다.
혜정이 최초였다.
“한때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소중히 여기는 자들을 만들지 않는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을 거라고.”
손을 뻗었다.
혜정의 가녀린 손을 마주 잡았다.
“사실 내심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행동할 때 강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걸까.
필두는 최후의 일전에서 마일더가 이끄는 추격대에게 패배했다.
최악의 악인이자 최강의 흑마법사, 드리무어의 참패!
그건 당사자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승패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패배에는 명확한 원인이 있었다.
드리무어는 혼자다.
혼자였기에 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혜정 씨는 언제까지고 제 편이 되어줄 거 같군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구태여 말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감정.
이 기분.
얼마 만에 느끼는 걸까.
숱한 갈등도, 고민도 있었지만 이제야 확실히 본인의 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갈까요?”
낯 뜨거운 필두의 고백에 혜정의 얼굴이 더더욱 달아올랐다.
그래도 싫진 않은 모양인지 거절 대신 승낙의 뜻으로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줄타기를 하던 두 남녀의 엇갈렸던 마음이 드디어 하나로 모였다.
* * *
월요일 하루 동안 휴가를 내고 싶다.
이 말을 전하자, 필두의 예상대로 무난하게 허가가 떨어졌다.
결국 바닷가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 필두와 혜정.
오전 6시 반.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기상을 한 필두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필두와는 다르게 혜정은 아직 단잠에 푹 빠져 있었다.
어제저녁. 그 어떠한 날보다도 뜨거운 밤을 보냈던 두 남녀. 아직 그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샤워부터 해볼까.”
워낙 피곤했던 모양인지 샤워조차 하지 않은 채 잠들었다.
쏴아아아!
시원한 물줄기와 함께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필두.
그때가 되어서야 혜정이 몸을 뒤척였다.
“으음…….”
오른팔을 옆으로 뻗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혜정이 실눈을 떴다.
그곳에는 필두가 속옷 차림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었다.
“일어났어?”
“앗…… 으, 응.”
어제저녁 이후. 이들은 서로 말을 놓기로 했다.
연인이 되었는데, 높임말을 사용하는 건 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모든 커플이 반말을 선호하는 건 아니다.
존댓말 사용을 원하는 커플도 있지만, 필두와 혜정은 후자보다 전자에 속했다.
본인이 알몸임을 확인한 혜정이 이불을 잔뜩 끌어모아 몸을 가렸다.
부끄러워할 만한 몸매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상황 자체가 좀 부끄러웠다.
“샤워해. 나 먼저 했으니까.”
“응…… 알았어.”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 혜정이 후다닥 샤워실로 향했다.
창피해하는 모습이 참으로 귀엽게 느껴졌다.
샤워 이후 옷까지 다 차려입은 혜정이 자연스럽게 필두와 팔짱을 꼈다.
“오늘 출근은 어떻게 됐어?”
“대대장님이 쉬래. 난 오늘 하루면 족하다고 했는데 필요하면 이번 주 내내 쉬어도 좋다고 하던데.”
“엄청 화끈하시네.”
그러나 여기에는 속사정이 있었다.
필두가 지금까지 대대장을 위해 세운 공로들을 나열한다면, 일주일간의 휴가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챙겨주고 싶은 건 다 챙겨주려 할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일주일이라는 휴가 기간을 얻게 된 필두. 당사자보다 연인인 혜정이 더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여행이나 갈래?”
“여행이라.”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나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다.
흑마법사 조직 사건도 있고, 마일더의 수상한 행동도 그렇고. 신경 써야 하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다음 기회에.”
“다음에 언제?”
“한가할 때.”
“지금은 바쁜 시기야?”
“아무래도 좀.”
혜정도 고집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필두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해 줄 만큼의 아량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 이상 자기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알았어. 필두 씨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대신, 데이트는 할 수 있지?”
“물론.”
“여행도 나중에 꼭 가기야.”
“기억해둘게.”
훈련 기간만 아니면 시간이야 언제든지 낼 수 있다.
이미 9090대대는 필두의 손안에 있다시피 했으니까.
* * *
다시 부대로 돌아온 필두를 보자 포대장이 의아함을 표출했다.
“행보관님, 휴가 아니셨습니까?”
“다음에 가기로 했습니다.”
“모처럼인데 그냥 쉬시지, 굳이 출근하실 필요까지는…….”
“확인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필두도 여행 가고 싶은 마음에 한 가득이었으나, 불행하게도 지금 시기는 여행을 떠나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얼마 전에 살해당한 두 명의 흑마법사 조직.
아직 그들의 흔적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다.
어차피 필두가 찾지 않아도 저들이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놈들은 언젠가 온다!
그들이 노리는 건 드리무어의 목이니까.
막사를 나와 울타리 근처를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저번 주에 진지공사를 한 덕분인지 울타리 주변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나 울타리만으로 흑마법사들을 막아낼 순 없을 터였다.
필두가 새겨놓은 마법진.
이것들을 찾아 하나하나씩 체크하기에 나섰다.
주변에 도합 50여 개의 마법진을 설치했다.
속도를 높이며 9090대대 주변을 전부 순찰한 필두가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이상 없군.”
마법진 중에 훼손된 건 단 한 개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아직 흑마법사 조직원들이 이곳을 침범하지 않았음을 뜻했다.
“앞으로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아야겠어.”
업무가 또 하나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