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06화
제27장. 엇갈리는 관계(2)
“네?”
예나가 황당한 얼굴을 하며 되물었다.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거 같았다.
연인? 마일더랑?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물론 어디까지나 연기지만.”
진수가 재차 연기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연기든 뭐든 마일더와 연인 관계가 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예나에게는 크나큰 사건이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 예나는 TV를 통해서 연예인들이 가상 결혼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걸 접한 적 있었다.
그때마다 연기라도 좋으니까 본인도 마일더랑 한 번이라도 이런 식의 관계를 맺어봤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녀도 여자다. 좋아하는 남자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설마 진수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진심이십니까?”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어디까지나 거짓이라고 했잖아.”
“그, 그래도.”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잘 안 됐다.
몰래 허벅지를 꼬집어봤지만, 명백한 현실이었다.
“드리무어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양해 부탁하마.”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진수. 이렇게까지 하는데 부하된 입장에서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런 건 오히려 예나 입장에서 부탁하고 싶었다.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마일더 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에리나는 난생처음으로 드리무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 * *
진수와 예나가 남몰래 의기투합하는 사이, 필두는 혜정이 싸온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랬다.
“이것도 맛있군요.”
“다행이에요. 혹시 몰라서 필두 씨 어머님한테 이것저것 물어봤었는데, 잘한 거 같아요.”
“제 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았었군요. 몰랐습니다.”
“그…… 중매해 주신 분께서 알려주셨어요. 혹시 모르니 전화번호 받아두라고 해서요.”
“그렇군요.”
필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하기야. 필두도 혜정의 아버지와 자주 만나는 사이인데, 그의 어머니와 혜정이 서로 연락하는 관계라 해도 딱히 불편한 건 없었다.
오히려 필두 입장에선 득이 되는 게 더 많았다.
필두가 싫어하는 것들, 꺼리는 것들을 혜정이 미리 알아서 눈치껏 행동하게끔 해주니까.
물론 과거의 필두와 지금의 필두는 취향이 달랐다.
그래도 혜정의 이런 마음 씀씀이가 나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오히려 필두 입장에선 가산점이 되었다.
“필두 씨. 혹시 다음 주 일요일에 시간 되시나요?”
“일요일요?”
“네. 안 바쁘시면 저하고 만나주실 수 있나 싶어서요…….”
저번처럼 또 만화 행사라도 같이 가자는 그런 의도가 아닐까 싶었다.
“일요일 괜찮습니다. 근데 그날에 종교행사 나오시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그때는 하루 쉬기로 했거든요. 생일이라서요.”
“생일이었군요.”
이제야 혜정이 그에게 시간을 물었던 이유에 대해 알 것 같았다.
이번 주 일요일은 그녀의 생일이다.
“생일이라면, 저보다 가족분들과 함께 보내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전 필두 씨랑 보내는 거 더 좋아요.”
보통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정석이었지만, 혜정은 이번 생일만큼은 필두랑 함께 보내고 싶어 했다.
그녀답지 않게 용기를 냈다.
혜정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데에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음을 필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날은 비워두겠습니다.”
“고마워요, 필두 씨.”
“천만에요. 혜정 씨한테 도움도 많이 받았었으니까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 심리적인 부분에서 혜정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었다.
그녀의 상냥함은 늘 필두의 불안한 마음을 치유했다.
물론 초반에는 혜정이라는 여자가 불편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필두 역시 그녀에게 마음을 여는 모양인지 점점 혜정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조만간 남자답게 결정을 내려야 할 터.
그 결정의 내용이 무엇인지 안 봐도 뻔했다.
혜정의 마음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였다.
하나 필두에겐 트라우마가 있었다.
하르만 학살 사건을 통해 그는 소중한 이들을 잃었을 때 겪는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혹여나.
또는 혹시나.
그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까. 그 때문에 필두는 쉽사리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혜정도 마찬가지였다.
드리무어는 아직 그녀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아마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혜정으로선 드리무어의 태도가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해!’
혜정이 먼저 칼을 빼 들기로 결심했다.
결전의 때는 그녀의 생일날!
그날에 혜정은 모든 것을 결판 짓기로 했다.
* * *
위병소로 다시 돌아와 필두 일행과 합류한 진수와 예나.
두 사람의 표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던 혜정이 예나에게 다가갔다.
“무슨 이야기 했어?”
“그건…….”
차마 여기서 입에 담지 못할 말들뿐이었다.
물론 야 한 쪽의 이야기는 아니다.
혜정이 알지 못하는 레디너스와 드리무어에 관련된 이야기들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혜정으로선 그저 ‘어머머’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손목시계로 현재 시간을 확인한 필두가 두 여성에게 말했다.
“면회 시간 다 끝나가니 슬슬 막사로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예나 양, 진수랑 좋은 얘기 많이 나누셨습니까.”
“네. 무, 물론이죠!”
한없이 어색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드리무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위병소 앞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필두 씨.”
혜정이 대신 고마움을 표현했다.
위병소를 통과해 바깥으로 나서자, 주차장에 혜정의 차가 보였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필두 씨. 나중에 또 연락드릴게요.”
“예. 조심해서 들어가시길.”
필두와 작별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진수와 예나는 별다른 말없이 눈빛 교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이윽고 두 여자가 탄 차량이 점점 멀어졌다.
그제야 다시 걸음을 돌리는 두 남자.
위병소를 지나 대대 연병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필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였지?”
“뭘.”
“예나라는 아가씨랑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묻는 거다.”
“그걸 왜 내가 말해야 하지?”
“난 행보관이고 넌 병사니까.”
“그 이전에 다른 관계가 있었지.”
드리무어와 마일더. 두 사람은 앙숙이다.
희대의 악인을 쓰러뜨리기 위해 넘어온 심판관, 마일더.
그러나 그는 최근에 의구심이 들었다.
“하르만 학살 사건과 그 흑마법사 집단이 연관되어 있다는 말, 사실인가.”
“어디서 들었지?”
“네가 무장공비 둘을 심문할 때.”
“남의 말을 몰래 엿듣는 건 악취미라고 보는데.”
“희대의 악인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
하르만 학살 사건이 마일더의 입에서 언급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 변화되는 걸 목격했다.
포커페이스의 달인이라 불리는 드리무어가 감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라면, 분명 그에겐 크나큰 사건이었을 터.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면, 선처의 기회를 줄 수도 있다.”
마일더로선 상당히 통 큰 제안이었다.
그러나 드리무어가 그 말을 듣기라도 하겠나.
“못 들은 걸로 하지.”
“아쉽군.”
협상 결렬이었다.
이후 대화 없이 마냥 걷기만 하던 두 남자.
그러던 중에 마일더가 사열대 계단을 오르기 직전에 필두가 했던 질문에 대답했다.
“예나, 그 아가씨랑 교제하기로 했다.”
“교제?”
“이성 관계가 되었다는 뜻이지.”
그건 알고 있었다.
진수의 결정이 너무 뜬금없어서 잠시 당황했을 뿐이다.
“여자 친구를 사귄다고? 레디너스에 있을 때에도 여자에게 관심조차 없던 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여유라도 가지자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대민지원을 갔다 온 이후부터 마일더의 행동이 매우 수상쩍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진수의 이성교제에 초를 칠 수도 없으니 그저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아픈 기억만 더 늘어날 뿐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상실감은 커져만 가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켜야 할 게 있기에 사람은 강해지는 거다.”
“…….”
“너도 예전에는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겠지. 인간인 이상, 없을 리가 없을 테니까.”
“나에게 그딴 건 예전부터 없었다.”
냉정히 말을 끊으며 먼저 행정반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숨을 내쉰 진수도 생활관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던 중에 방향을 선회해 행정반쪽으로 돌렸다.
깜빡할 뻔했다.
“복귀 신고해야지.”
잊지 말자. 현재 신분이 이등병이라는 점을.
* * *
월요일 오전 8시 반.
본래는 이보다 더 이른 시간에 출근 준비를 서두르던 필두였으나, 오늘은 평소보다 상당히 늦은 시간에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본래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마나 수련을 하고 출근길에 오른다. 그것이 필두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마나 수련조차 하지 못했다.
엉망이 된 아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죽어가는 가족들. 그 모습이 악몽으로 다가와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차원 이동을 한 이후에도 악몽은 그의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사실은 무장공비였던 흑마법사 조직의 일원 두 명을 사로잡았던 날에도 악몽 비스 무리한 것을 꿨었다.
하르만 학살 사건에 연관된 것과 마주하게 되면 항상 그렇듯 악몽을 꿨다.
오늘 꾼 악몽의 원인은 아무래도 엊그제, 마일더와 나눴던 이야기가 계기가 된 듯했다.
최대한 빠르게 차량을 몰아가 위병소를 통과했다.
오전 집합 시간 전까지는 그래도 어찌 저 찌 도착할 수 있었다.
차량에서 하차하자마자 바로 사열대로 오른 필두가 집합해 있는 병력들 앞에 마주 섰다.
병력들을 미리 집합시킨 통제관이 그에게 거수경례했다.
“충성! 오셨습니까, 행보관님.”
“병력들에게 할 말 있으니까 잠깐만 시간 좀 빌리자.”
“예.”
통제관이 잠시 자리를 비켜줬다.
그사이, 필두가 병력들에게 다음 주에 있을 일정을 소개했다.
“너희도 알고 있겠지만, 다음 주는 진지공사 기간이다. 이미 분대장들 통해서 들었을 테니 자세한 설명은 안 하마.”
진지공사 시즌이 도래했다!
훈련 급으로 빡세다는 진지공사. 병사들이 절로 침을 꼴딱 삼켰다.
그러나 필두의 말은 예상외로 상냥했다.
“딱히 보수할 만한 곳은 안 보이니 너무 겁 안 먹어도 된다.”
필두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이번 진지공사는 정말 편하게 넘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직접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병사들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오늘은 통제관이 알아서 작업 분배할 거다. 이상.”
통제관에게 다시 발언권을 넘겨준 후에 행정반으로 돌아왔다.
발을 들인 순간, 이상한 분위기를 직감했다.
‘공기가 무겁군.’
간부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필두의 물음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이는 포대장이었다.
“행보관님. 방금 사단에서 소식이 전해졌는데…….”
“무슨 소식입니까?”
좋은 내용은 아닌 듯했다.
“얼마 전에 행보관님께서 잡으신 무장공비 둘 있지 않습니까.”
“네.”
“실은 말입니다.”
포대장이 잠시 말을 끊었다.
이윽고 무거운 한숨과 함께 행정반 분위기가 침체된 이유를 들려줬다.
“어제 새벽에 갑자기 죽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