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04화 (104/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04화

제26장. 재회(4)

일요일 종교행사가 끝난 후.

그 날 저녁, 필두는 이상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보세요?

“예, 혜정 씨. 접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에 걸려온 혜정의 전화.

그녀가 필두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훈련 도중에도 통화를 주고받은 적도 있는데 주말 저녁에 통화하는 거야 뭐가 대수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내용에 있었다.

-혹시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되시나요?

“토요일이요? 가능합니다만. 무슨 일인가요.”

-실은…….

잠시 말을 흐리는 혜정. 필두에게도 쉽사리 꺼낼 수 없는 내용인 듯했다.

그러기를 잠시 후. 각오를 다진 모양인지 작은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성가대 인원 중 한 명이 필두 씨 쪽 병사 한 분이랑 만나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요. 저한테 직접적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뭐랄까. 이성적으로 관심이 좀 있는 거 같아요.

“그렇습니까.”

특이한 경우였다.

병사들이 민간인 여성에게 반하면 반했지, 그 역인 상황은 잘 보지 못했다.

필두도 군인이긴 하지만, 사실 군인은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기엔 부족한 면모가 많았다.

융통성이 없다느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편견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넓고, 다양한 이상형을 가진 여자들도 존재하니까.

그러나 간부도 아닌 병사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을 두는 여자가 있다는 건 필두가 행보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처음 발생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기하게 다가왔다.

“혹시 어느 병사인지 알고 있습니까?”

-황진수라는 분일 거예요.

더더욱 특이한 상황이었다.

진수를 좋아하는 젊은 민간인 여성이라니.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마일더 녀석이 설마 수작이라도 부린 건가.’

그러나 흑마법사가 아닌 이상, 능숙하게 정신조작마법을 부리기도 힘들 터였다.

게다가 마일더의 품성을 생각한다면, 타인의 마음을 조종해 자신에게 반하게 만든다는 일을 벌이는 건 말이 안 된다.

‘진짜로 반하기라도 했나 보군.’

헛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렇군요. 근데 그 일과 제가 시간을 따로 할애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진수 씨한테 관심 두고 있는 아이가 예나라는 아인데, 혼자서 면회 오기 부끄러운가 봐요. 그래서 저보고 토요일 날에 같이 면회 가자고 하는데, 기왕 가는 거 필두 씨 얼굴도 보고 싶기도 해서 물어본 거예요.

수줍게 대답하는 혜정. 어찌 보면 간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출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의 용기에 보답해 주기 위함일까. 필두가 담담하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다음 주 토요일이군요. 알겠습니다. 시간 비워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필두 씨!

혜정의 목소리에 생기가 감돌았다.

부천 만화 행사 이후 한동안 사적으로 만나보지 못했던 두 남녀. 그래서일까. 통화를 끝마친 이후에도 혜정의 기대치는 점점 상승했다.

* * *

평일 오후. 일과 시간을 마친 진수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챙겨 들고 생활관을 나섰다.

그 과정에서 도혁이가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전화하러 가냐?”

“이병 황진수. 예, 그렇습니다.”

“부모님한테? 아니지. 쪽지 들고 가는 거 보니까 부모님한테 하는 건 아닌 거 같고.”

집 전화번호 정도는 충분히 외우고 있을 터.

전화번호를 따로 적은 걸 보아선,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전화를 하러 가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별일이었다. 진수가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전화하러 가다니.

그때, 고만해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설마 저번 주에 만났던 그 교회 언니냐?”

“뭐? 야, 황진수. 능력 좋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공감대가 잘 맞아서 이야기 나눠보기로 한 것뿐입니다.”

이성적인 감정이 있어 연락을 트게 되었다는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이 여기에 몇이나 있을까.

누가 봐도 이건 그린 라이트였다.

근처에서 이들의 대화를 몰래 경청하던 조항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진수에게 충고했다.

“여자친구 생기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라. 분대장 일지에 적어두게.”

“하, 하하…….”

그저 어색한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남의 일에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겨우 뿌리치고 공중전화 박스로 향한 진수.

수화기를 들고 천천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짧은 신호음이 이어지더니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했다.

-네, 소예나입니다.

“나다.”

-마일더 님이십니까?

“여기서는 본명으로 말하지 마라. 그러다가 괜히 들킬지도 모르니까.”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마일…… 아니, 진수 님.

며칠 전. 에리나에게도 드리무어 말고 흑마법사 집단이 따로 있음을 재차 강조했었다. 그들은 필두와 다르게 아직 소재지가 파악되지 않았다. 잡혀 들어간 두 명의 무장공비 말고도 일곱 명이 더 있다고 하니, 당분간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혜정 언니 설득해서 이번 주 토요일에 면회 가게끔 해뒀습니다. 그때 진수 님 뵐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토요일이라. 나쁘지 않군.”

그러면 진수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일단은 면회 신청을 해둔다. 그래야 선임들에게 잔소리를 듣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진수 님. 드리무어도 혹시 같은 병사 신분입니까?

중요한 정보를 말해주는 걸 깜빡했다.

“아니, 행정보급관이다.”

-행정보급관? 그게 뭡니까?

“부대 관리를 책임지는 부사관 직책이다. 간부지.”

-그래서 진수 님이 건드리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던 거군요.

“그래.”

주변인들의 시선도 신경 안 쓸 수 없었다.

실제로 처음 자대로 전입왔을 때, 뭣도 모르고 필두를 죽이려 했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있었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머리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참고로 드리무어의 현재 이름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름까지 알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선임병이 짜증을 부리는 목소리를 냈다.

“통화 언제 끝나냐?”

“죄송합니다. 바로 끊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뒤에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여하튼 알았다. 몇 시쯤에 올 예정이지?”

-10시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토요일에 나누도록 하자.”

-예.

그때 필두의 이름을 포함해 마일더가 아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해 주면 된다.

후일을 기약하며 예나와의 통화를 마친 후에 곧장 생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면회 신청을 하기 위함이었다.

직접 간부에게 말하는 것보다 분대장인 김조항에게 먼저 말을 해두는 편이 좋았다. 보고 체계라는 것 때문이었다.

아까 전화를 하기 위해 생활관을 나올 때, 마침 김조항은 막사 내에 있었다. 찾기 어렵진 않았다.

“김조항 병장님.”

“응? 왜.”

“저, 토요일에 면회 신청할까 합니다만.”

“그 성가대 아가씨냐?”

“예, 그렇습니다.”

“오호. 우리 막내에게도 봄날이 왔구나. 그래. 내가 행보관님한테 보고해두마.”

필두가 언급되자 진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반드시 행보관님한테 보고해야 하는 겁니까?”

“물론이지.”

“……알겠습니다.”

불만족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필두는 예나의 정체가 에리나라는 걸 모른다. 조심만 하면 될 터.

그럼에도 진수는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 * *

금요일 저녁에 대뜸 혜정의 요청으로 외출을 나오게 된 예나.

두 여성이 도착한 곳은 바로 백화점이었다.

“여기가 백화점이라는 곳이군요.”

에리나는 이곳을 처음 접했다. 레디너스 대륙에는 이런 거대한 의류 매장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신기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자, 빨리 가자. 시간 없으니까.”

“그런데 여긴 뭣 하러 온 겁니까?”

“뭐하긴. 옷 사러 왔지. 온 김에 너도 사는 게 어때?”

“왜 사야 합니까?”

“그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을 때, 혜정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여야 하니까…….”

“그렇군요.”

땀내 나는 기사 생활을 오래 한 에리나라 하더라도 그녀 역시 여자였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리나의 패션 감각은 꽝이다. 애초에 그녀가 입었던 옷의 90%는 제복과 갑옷이었으니까.

의류 매장에 진입하자마자 혜정이 바삐 움직였다.

“이 옷, 어때?”

하늘색 무늬가 인상적인 원피스.

치마 길이도 매우 짧은 편이었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의상인 거 같습니다.”

“음, 그래? 잘 어울리려나 모르겠어.”

“혜정 언니 몸매 정도면 괜찮다고 봅니다. 군살도 없고, 배가 나온 것도 아니고. 여성으로선 훌륭한 몸을 하고 있습니다.”

기사로서는 꽝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 기사를 논할 필요는 없었다. 혜정은 철저하게 민간인이었으니까.

그렇게 혜정한테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패션 감별사 역할을 해주게 된 예나.

덩달아 그녀 역시 본의 아니게 옷 구입을 강요당했다.

“정말 저보고 이걸 입으라고 하시는 겁니까?”

“응.”

“아, 안 됩니다! 이렇게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복장은 싸울 때 불편할뿐더러 다칠 가능성도 있습니다!”

“누구랑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래도…….”

짧은 핫팬츠. 예나의 육감적인 허벅지가 유감없이 드러났다.

에리나가 예나의 육신을 차지한 이후, 그녀도 드리무어나 마일더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법 수련과 꾸준한 운동을 병행해 왔다. 덕분에 몸에 균형이 잡히기 시작했다.

허벅지에도 탄력감이 붙었다. 덕분에 지나가던 여자들조차도 예나의 몸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거 봐. 모델 아니야?”

“몸 관리한 거 보니까 맞나 본데?”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예나는 부끄러워 죽을 맛이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그곳으로 들어가 숨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나 혜정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내일 이거 입고 가는 거야. 알았지?”

“그, 그렇지만…….”

“괜찮아. 스타킹 입으면 추위도 어느 정도 커버 되니까.”

“아니요. 추위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만…….”

노출도가 문제였다.

그러나 쇼핑 모드에 들어간 혜정은 단호했다.

“토요일에 같이 면회 가자고 부탁 들어줬으니까 이번에는 네가 내 말에 따라야 해.”

“…….”

이럴 땐 침묵이 답이다.

* * *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카페를 찾은 두 여인.

‘히, 힘들어. 훈련보다도 더!’

3시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쇼핑을 했지만, 혜정은 아직 팔팔해 보였다.

“근데 예나, 너 말이야.”

“예, 언니.”

“어쩌다가 진수 씨라는 분한테 반하게 된 거야?”

“반한 건 아니고, 그냥 관심이 생겼습니다.”

“흠, 그래?”

이야기의 화두가 달라졌다.

“혜정 언니는 강필두라는 분을 왜 사모하시게 되었습니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혜정의 얼굴이 다시금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냥…… 겉과 속이 다른 점?”

“안 좋은 거 아닙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고 무관심한 거 같은데, 알고 보면 누구보다도 상냥하고 착한 사람인 거 같아.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보이더라.”

“그 필두라는 분은 어디에 소속된 병사입니까?”

“병사? 아닌데?”

“네?”

목사한테서 혜정이 강필두라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들었었다.

필두가 어느 직책에 어느 병사인지는 몰랐다.

혜정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 순간, 예나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제1포대 행정보급관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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