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01화
제26장. 재회(1)
오후 5시가 되어서야 흩어졌던 병사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작업은 다 끝났나.”
“예!”
“그럼 포차에 탑승하도록.”
“알겠습니다.”
필두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필두는 유독 한 명의 병사를 유심히 바라봤다.
황진수였다.
진수도 필두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하던 행동을 멈췄다.
“저한테 볼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행보관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필두는 최대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포커페이스. 그가 자신 있어하는 행동이었다.
모든 병사가 포차에 탑승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 필두가 가장 마지막에 선탑자 자리에 올랐다.
“출발한다. 식사 시간 전까지는 부대로 돌아가야 하니 속도 좀 내라.”
“예, 알겠습니다!”
수송병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그렇게 대민지원 임무도 무사히 클리어.
그 과정에서 진수는 커다란 예상치 않은 횡재를 겪게 되었다.
차원 통신 수단 확보!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고작해야 원거리 통신망이 개방된 것에 불과했지만, 이 작은 성공은 훗날, 진수에게 어마어마한 도움을 줄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 *
일과시간이 모두 끝난 저녁.
당직사관을 맡게 통신반장이 각 생활관에 잘 들리게끔 목소리를 높였다.
“저녁점호는 본 당직사관이 직접 취한다. 점호는 1생활관부터. 점호를 취하지 않는 2생활관은 잠시 대기하도록.”
순서상 늘 우선순위 1번인 1생활관에 도달한 통신반장이 생활관 책임자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이후 병사들을 쭉 바라보며 물었다.
“특이사항 없지?”
“예!”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오케이. 그럼 잠시 대기하고 있어라.”
통신반장은 FM, AM 중 굳이 분류를 한다면 AM쪽 성향이 강한 간부였다.
형식적인 질문 몇 개만 하고 바로 2생활관으로 이동하는 통신반장.
생활관 책임자를 맡은 김조항이 생활관 마룻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때, 또 다른 간부 한 명이 1생활관을 방문했다.
행보관, 강필두였다.
“충성!”
반사적으로 바로 기상한 조항이 대표로 거수경례했다.
그의 거수경례를 받아준 필두가 생활관 복도를 거닐었다.
“위생 상태는 나쁘지 않은 거 같군.”
“…….”
“…….”
위생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순간, 병사들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설마 필두가 이 시간까지 남아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거기에 더해 위생 검사까지 자처하리라곤 아무도 몰랐다.
“거기 너.”
“일병…… 사, 상병 고만해!”
잠깐 자신의 진급 사실을 깜빡했던 고만해가 곧장 진급을 정정했다.
“손 내밀어 보도록.”
“자, 잘못 들었습니다?”
“양손 전방으로 쫙 펴 봐라.”
“…….”
더 이상 못 들은 척할 수 없었다.
결국 마지못해 필두가 지시한 행동대로 이행하는 고만해.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고만해의 손을 내려다보던 필두가 날카로운 일침을 가했다.
“손톱이 꽤 길군. 최근에 언제 잘랐나.”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 전에 자르고 나한테 확인받으러 와라.”
“예!”
그 이상의 처벌은 없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후 다른 병사들의 관물대를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아직 필두의 차례는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병사들을 훑어보던 필두의 시선이 진수에게로 고정되었다.
“황진수.”
“이병 황진수!”
“관물대 꺼내보도록. 안에 있는 것 전부 남김없이 싹 다.”
다른 병사들은 진수가 재수 없게 필두의 위생 검사에 걸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진수는 뭐랄까. 위화감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건 부하된 도리였다.
필두의 지시대로 더블백을 포함해 군장까지 깡그리 다 안에 담긴 내용물들을 꺼냈다.
관물대 안도 마찬가지였다.
“끝났습니다.”
하나 필두는 불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손으로 남아 있는 비닐봉지 하나를 가리켰다.
“저건 뭐지?”
“빨랫감입니다.”
“저것도 꺼내봐라.”
“예, 알겠습니다.”
빨랫감이라고 해봤자 양말 두 켤레에 불과했다. 보통은 빨래가 많이 밀려 있으면, 그것도 혼날 거리였다.
하나 양말 두 켤레 정도는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
혼낼 이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필두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져 있었다.
“이게 다인가.”
“예, 그렇습니다.”
“숨기고 있는 건 없나.”
“없습니다.”
“……그렇군. 다시 정리하도록.”
“예.”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딱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필두의 감이 맞았다. 사실 진수는 하나 더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필두에게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차원 이동 마법을 통해 건네받은 통신기.
마석이었다.
그것을 필두에게 보여주는 순간, 지금의 이 관계가 어떻게 변동될지 몰랐다.
필두가 행보관이고 뭐고 현재의 역할을 다 때려치우고 드리무어로서의 본래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 있는 군인들까지 죽임을 당할 우려도 존재했다.
진수는 그걸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마석을 숨기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마석 자체는 마나를 내뿜거나 하는 그런 아티펙트가 아니었다. 차원 통신을 주고받을 때만 마나를 뿜어낼 뿐이었다.
차원 통신만 안 하면 그저 반짝이는 돌에 불과한 마석. 그렇기에 제아무리 필두라 하더라도 진수의 마석 소유 여부를 육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1생활관을 나서는 필두. 그러자 병사들의 입에서 일제히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빨래 밀려 있었는데, 진수 대신에 내가 걸렸으면 진짜 끝장났었겠다.”
“어휴. 행보관님이 위생검사 하실 거라고는 진짜 생각도 못 했습니다.”
졸지에 걸려 버린 고만해만 의문의 1패를 당한 꼴이었다.
“저, 손톱 좀 깎고 오겠습니다!”
“그래, 빨리 깎고 행보관님한테 확인받아라.”
“그러다가 취침시간 날려 먹을지도 모르니까. 하하!”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졸지에 놀림의 대상이 되어버린 고만해가 손톱깎이를 들고 사열대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생활관 내에서 손톱을 깎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귀찮더라도 바깥까지 나가야 했다.
한편, 필두의 엄격한 위생 검사를 완벽하게 클리어해낸 진수에게는 만해와 다르게 찬사가 이어졌다.
“잘했다, 진수야.”
조항이 진수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이병 황진수. 아닙니다. 전 그냥 군인으로서 당연한 행동을 한 것뿐입니다.”
그 당연한 행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었다.
빨랫감 안 밀리게 꾸준히 빨래하기. 손톱, 발톱, 머리카락 정기적으로 깎기. 그리고 세면세족과 샤워는 꼭 하기.
보급품 관리도 필두였다. 기본적인 것들이지만, 자칫 까먹기 쉬운 것들이기도 했다.
진수는 레디너스에 있을 때에도 본인의 청결 상태에 매우 많은 신경을 쓰는 남자로도 유명했다.
기사는 언제나 깔끔해야 한다. 그것이 마일더의 신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 신조가 설마 타 세계에 와서 크나큰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하나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설마 내가 마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건가?’
뭔가 좀 이상했다.
당직사관이 아님에도 이 시간까지 남아 있던 것도 이상하고, 거기에 더해 갑자기 위생 검사를 실시한 것도 수상했다.
‘주의해야겠어.’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일단은 신중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지내자. 그것이 당분간 진수의 행동 지침이 될 예정이었다.
* * *
행정반으로 돌아온 필두.
퇴근 준비를 서두른 그가 통신반장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당직, 고생해라.”
“예! 들어가십시오! 충성!”
“충성.”
사열대 계단을 통해 밑으로 내려와 자신의 차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한 번 더 생활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생활관 위에서 대기하던 붉은 눈의 까마귀가 그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과연. 그런 거로군.”
까마귀로부터 그간의 정보를 건네받았다.
사실 필두는 이미 대민지원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진수가 마석을 획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마일더.”
마석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마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까진 드리무어도 알지 못했다.
하나 마석을 발견한 후, 혼잣말을 내뱉었던 것으로 추론하자면…….
‘차원 통신이 가능한 물건인가 보군.’
게다가 진수는 분명 ‘에리나’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어찌 그 이름을 모를까.
에리나는 레디너스에서 마일더와 함께 드리무어를 괴롭혔던 인물 중 한 명이다. 드리무어가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여러 가지 증거들을 조합해 보면, 그 마석이 레디너스 대륙과 차원 통신을 가능하게끔 해주는 아이템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진수로부터 그 마석을 빼앗아 파괴하는 것도 가능했다.
진수는 모르겠지만, 드리무어는 그가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을 되찾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드리무어와 마일더, 두 사람이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99% 이상의 확률로 드리무어가 승리할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그럼에도 드리무어는 일부러 진수를 방치하기로 했다.
만약 드리무어가 생각하는 흑마법사 집단이 정말로 하르만 학살 사건을 주도했다면.
‘마일더 쪽 인원들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마일더와 그의 세력은 드리무어에게 있어서 일종의 보험이었다.
* * *
정신이 든 지 벌써 1주일째.
큰 사고를 당했음에도 소예나의 회복력은 관계자조차 놀랄 정도로 빨랐다.
몸의 상처는 거의 회복되었다. 지금 퇴원해도 큰 무리가 없을 만큼 완벽한 회복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이분이 예나라는 아가씨의 부모님입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예나야!”
“아이고, 우리 딸이 어쩌다가 이렇게……!”
부모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병원 측에선 기억상실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찝찝한 것도 있었다. 기억상실증이라고 보기에는 뭐랄까. TV라든지 컴퓨터 등의 개념조차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억상실증 말고 제대로 된 해명을 하기도 힘들었다.
일단은 퇴원을 확정받고 집으로 돌아온 예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엄마한테 말하렴. 그리고 일단은 푹 쉬고. 자고 나면 괜찮아질지도 모르니까.”
“예. 감사합니다.”
말투도 예전에 알던 딸의 어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게 당연했다.
왜냐하면 예나의 몸속에는 다른 영혼이 들어와 있었으니까.
“여기가 마일더 님이 계신 그곳인가.”
문제는 마일더와 어떻게 접선해야 좋을 지였다.
마일더에게 대충 들은 힌트로는, 그는 9090대대 제1포대 이등병이라는 곳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에리나가 조사한 결과, 이 나라의 군대는 민간인이 쉽게 갈 수 없는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어떻게 해야…….’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어?”
예나의 시선이 벽에 붙어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을 포함해 소수의 민간인과 다수의 군인이 함께 사진을 찍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예나의 눈빛에 희망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