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00화
제25장. 대민지원(2)
산언저리를 향해 빠르게 이동을 개시하는 황진수.
이번에도 과연 저번에 만났던 무장공비와 같은 부류일까?
그런 의문이 진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추궁하고 싶은 게 있었다.
하르만 학살 사건을 정말로 그들이 지시한 걸까?
필두는 그 사건을 통해 가족과 소중한 이들을 잃었다고 했었다. 그가 악인이 된 결정적인 계기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악인은 따로 있을지도.’
물론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모든 일은 직접 본인의 눈과 귀로 확인하고 나서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마일더의 인생관이었다.
마나의 파동이 변질했던 곳으로 향한 진수가 주변을 둘러봤다.
근처에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 느낀 건가?’
혹시 몰라 재차 근처를 확인했다.
그러나 새로운 건 없었다.
‘아쉽군.’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흔적을 잡았을지도 몰랐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약이었다.
“김조항 병장님이 눈치채기 전에 돌아가야겠군.”
슬슬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님.
“……?”
진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방금 그건…….”
틀림없었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진수가 헛것을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누군가가 있다.
“…….”
입을 굳게 다문 진수가 경계심을 높였다.
그의 양손에 마나 덩어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적이 등장하면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여인의 목소리는 진수에게 더 많은 당혹감을 심어줬다.
-마일더 님!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노이즈가 낀 여성의 목소리였지만, 뭐랄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설마 에리나인가?”
-역시 마일더 님이셨군요! 혹시 몰라서 계속 신호를 보냈었는데, 이제야 연락이 닿을 줄은 몰랐어요!
에리나. 그녀는 레디너스 대륙에서 마일더의 부관을 역임하고 있는 젊은 여기사였다.
평소에는 지겹도록 들었던 목소리였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녀의 음성이 반갑게 다가왔다.
“차원 통신에 성공했구나.”
-예. 혹시나 마일더 님이 드리무어에게 당했을까 봐 걱정이 되어 밤잠을 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드리무어와는 만났습니까?
“만나긴 했다만…… 문제가 있다.”
-어떤 문제입니까?
“설명하긴 복잡하다. 여하튼 드리무어 바로 근처에 머무르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녀석을 제거하긴 힘든 입장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일단은 지원 병력이 있으면 좋겠군. 아무래도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 같다.”
드리무어도 드리무어지만, 또 다른 흑마법사 집단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드리무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흑마법사 집단 또한 마일더의 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절대다수. 상대하려면 마일더 측도 병력이 필요했다.
-길드에게 문의해 보겠습니다.
“부탁하마. 그리고 차원 통신은 이 자리에서만 유지할 수 있나?”
-아니요. 그 근처에 마석 하나가 떨어져 있을 겁니다. 차원 통신을 원활하게 하려고 임시방편으로 마련한 장치입니다. 그걸 지니고 있으면 언제든지 차원 통신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마석이라.”
이제야 불규칙했던 마나의 파동이 발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석을 이 세계로 보내기 위해 에리나와 마법사들이 일시적으로 차원 이동 마법을 시도했던 것이다.
‘물건을 보낼 정도라면, 조만간 병력들을 이곳으로 보내는 것도 가능하겠군.’
물론 자세한 건 길드 측 마법사들이 알 터. 마일더는 상위 클래스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이 방면에 대해선 잘 몰랐다.
바닥 근처를 뚫어져라 훑어보던 중에 파랗게 빛나는 작은 돌을 발견했다.
“이건가?”
-잠시만요…… 네, 맞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그쪽이랑 차원 통신이 가능하다 이거군.”
-예, 마일더 님. 단, 조심하셔야 합니다. 차원 통신을 주고받을 때, 마나가 발산됩니다. 드리무어한테 들킬 여지가 있으니 신중하게 사용하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렇군. 정보 고맙다.”
-아닙니다. 그리고 부디…… 제가 갈 때까지 무사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어쨌든 당분간은 내 쪽에서 통신을 요청할 때까지 차원 통신은 시도하지 마라. 네 말마따나 드리무어에게 들킬 수도 있으니까.”
“예. 마일더 님.”
더 이상의 통신은 위험했다. 드리무어는 마일더와 다르게 마법사다. 마일더보다 더 마나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였다.
그렇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차원 통신을 주고받는 게 가능한 수단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도망친 드리무어를 잡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드리무어뿐만 아니라 마일더가 몰랐던 배후 세력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건 마일더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 * *
다시 산 입구 쪽으로 돌아온 진수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설 작업에 돌입했다.
그때, 조항이 거수경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충성!”
“제설작업 잘되어가나.”
“예, 그렇습니다!”
필두가 이곳까지 온 것이다.
‘드리무어. 설마 눈치챘나?’
설사 낌새를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진수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르쇠로 임하는 것뿐이었다.
조항에게서 작업 현황에 대해 간단한 보고를 받던 중.
“…….”
필두의 시선이 진수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진수는 제설 작업에 몰두하는 척을 했다.
구태여 필두와 시선을 맞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필두도 다시 시선을 돌렸다.
‘눈치 못 챘나.’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물론 확인된 건 없지만, 그래도 정말 필두가 진수의 차원 통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이건 크나큰 득이었다.
걸음을 옮기던 와중에 필두가 조항과 진수에게 새겨들으라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수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역시 알고 있었나!’
하나 필두의 다음 이어지는 말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어르신 분들이 고생한다고 새참에 막걸리 같은 거 줄지도 모른다. 음주는 엄격하게 금할 테니 주의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조항이 대신해서 필두의 말에 대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다른 병사들이 작업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필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르나 보군.’
오늘은 운이 좋은 듯했다.
그러나 마일더가 알아차리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그가 산언저리를 향해 뛰어갈 때부터 이미 붉은 눈의 까마귀가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 * *
에리나로부터 마일더에게 들은 사실들을 전해 들은 마법사들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그런 일이…….”
“그래도 마일더 님께서 드리무어와 무사히 접선했다고 하니 다행이군요.”
“아니, 다행이라고 봐야 할지 그것도 참 묘합니다.”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나쁘게 받아들여야 할지 마법사들조차도 제대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덧붙여 마일더는 분명 ‘병력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
“마석 하나 이동시키는 일에도 많은 마력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병력들을 무사히 그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죠.”
마법사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에리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마일더 님께서 혼자 고군분투하고 계시는데, 저희는 모른 척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모른 척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에리나 님. 차원 이동 마법이 안정화가 될 때까지 좀 더 공을 들이자 이거죠.”
“그사이에 마일더 님이 드리무어에게 당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누가 책임질 겁니까!”
“마일더 님은 결코 약한 분이 아닙니다. 상대가 드리무어라 하더라도 마일더 님의 검은 꺾인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마일더 님을 믿어보시죠.”
“아니요, 전 그렇게 못 하겠습니다!”
마법사들의 소극적인 태도에 진절머리가 난 모양인지 오늘따라 에리나의 태도가 매우 격했다.
그녀의 이런 반응도 이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에리나는 마일더에게 상관과 부하, 그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애정. 즉, 사랑이었다.
마일더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와 마일더를 아는 사람이라면 대다수는 에리나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리나가 불안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했다.
“병력 지원에 시간이 걸린다면, 하다못해 저라도 먼저 가게 해주세요.”
“그건 무리입니다, 에리나 님. 아직 영혼과 육체를 무사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단계까진 달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럼 마일더 님처럼 저도 저쪽 세계에 있는 인간의 육신을 빌려서 이동하면 되지 않습니까!”
“으음…….”
그런 방식의 이동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마일더라는 선례가 있었기에 에리나의 경우는 위험부담도 확실히 덜했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에리나가 그쪽으로 넘어가 마일더와 함께 손을 잡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
확실히 마일더 혼자서 드리무어를 상대하라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마법사 길드가 예의주시하던 몇몇 흑마법사들도 드리무어와 함께 강제로 차원 이동이 되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만약 그들이 드리무어와 손을 잡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다.
“알겠습니다. 에리나 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결국 이들 역시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서울에 위치한 어느 대학 병원.
민혜정은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평일 오후에 이곳을 찾게 되었다.
“여기에 입원한 거 맞아요?”
“가족들한테 연락했더니 맞다고 하더라.”
“상태는 어때요?”
“아직 의식 불명이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혜정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성가대에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활동했던 젊은 여인, 소예나.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의식을 잃은 지 이제 이틀째. 가족들의 속은 타들어 갔다.
“의사 말로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좋다고 하더라.”
“…….”
목사의 말에 혜정이 침묵을 지켰다.
병원 복도 끝에 도달한 병실 하나.
가족들은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인지, 안에는 소예나 혼자서 호흡기를 단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아직 24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이런 고충을 겪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예나야. 어서 기운 차려야지. 빨리 일어나서 언니랑 같이 쇼핑도 다니고…….”
혜정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릎을 굽혀 예나의 작은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제발 이 가여운 어린 양을 구원해 주길.
혜정의 기도가 닿았을까.
일순간 예나의 손이 꿈틀거렸다.
“아, 아빠! 방금 예나가 움직였어요!”
“뭐라고?”
목사도 놀란 모양인지 복도로 뛰쳐나가 간호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사이.
“헉!”
상반신을 일으킨 예나가 헛숨을 들이 삼켰다.
깜빡이는 두 눈동자.
그녀의 시선이 놀란 표정을 짓는 혜정에게로 향했다.
“여긴 어딥니까?”
“어디라니…… 벼, 병원인데…….”
“병원? 이건 뭐죠? 당신은 누구고? 그리고 이 주렁주렁 달린 줄들은 뭡니까?”
“저기…… 예나야, 괜찮아?”
“예나? 그게 누굽니까.”
“누, 누구긴. 너잖아…….”
하나 예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혜정의 말을 부정했다.
“예나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자, 잘못 봤다니. 누가 봐도 예나 맞는데?”
틀림없이 예나였다.
그러나 예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혜정의 말을 강하게 부정했다.
“저는 마일더 님의 부관, 에리나. 드리무어를 잡기 위해 이 세계로 건너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