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99화
제25장. 대민지원(1)
혹한기 훈련 당일 갑작스럽게 내린 폭설 덕분에 9090대대는 한 때 혼란을 겪은 적 있었다.
그 덕분에 혹한기 훈련 1일 차에는 제대로 된 훈련도 생략하고 제설 작업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오전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전 병력이 제설 도구를 가진 채 악마의 똥이라 불리는 존재와 맞서 싸웠다.
그 정도로 많은 양의 눈이 왔었다.
만약 거기서 필두와 진수가 활약하지 않았더라면 제설 작업은 새벽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을지도 몰랐다.
본격적인 제설 작업 덕분에 9090대대 근처는 말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 몇몇은 그렇지 못했다.
대다수는 고령이었고, 그 때문에 눈 치울 만한 여력이 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9090대대의 대민지원이 결정됐다.
대민지원 예정일은 바로 내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진급 시험 때문에 한 차례 큰 고초를 겪었더니만, 대민지원이라는 숙제가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흠.”
행보관실에 자리 잡은 필두가 병사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내려다봤다.
대민지원으로 데려갈 인원들은 도합 10명.
적절한 인원을 선별하는 건 필두의 몫이었다.
“힘 좋은 녀석들로 데려가야겠군.”
다행스럽게도 부대 관리 측면에선 현재까진 별다른 일은 없었다. 대민지원에 인력을 집중시켜도 될 듯해 보였다.
어차피 대민지원이 훈련처럼 2박 3일, 혹은 3박 4일처럼 장시간 치러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 정도만 투자하면 될 터.
게다가 이들이 갈 마을은 그렇게까지 큰 규모가 아니었다.
‘그래도 기와 이렇게 된 거, 빨리 해치울 수 있으면 좋겠군.’
잠시 고민하던 필두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치트키를 써볼까.’
펜을 굴리던 그의 손이 멈춘 곳은 바로 황진수의 이름이 적힌 칸이었다.
* * *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일부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날씨 생각보다 추우니까 귀마개하고 목토시, 그리고 깔깔이 꼭 챙겨 입어라.”
“예, 알겠습니다.”
조항의 지시에 도혁과 진수가 새겨듣겠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하나포에는 이들 세 남자가 대민지원을 나갈 예정이었다.
필두는 대다수의 인력을 전포에서 뽑았다. 힘 좀 쓸 줄 아는 인원 대다수가 전포 쪽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하나포만 자그마치 3명이었다.
욕심대로라면 정성태까지 포함해서 4명을 뽑고 싶었다.
그러나, 한 포반에서 4명이나 인원을 선별하면 그것도 형평성에 어긋날 거 같아 일부러 밸런스를 생각해서 성태는 제외시켰다.
필두에 대한 충성심을 따져 결국 도혁을 선택했다.
조항은 대민지원에 분대장급 병사가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판단하에 선출하게 되었다.
진수의 선택 이유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치트키 아니겠는가. 안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준비 다 끝났어?”
“예! 김조항 상병님…… 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김조항 병장님!”
도혁이 아차 싶었는지 바로 말을 바꿨다.
그렇다. 오늘부터 조항은 상병이 아닌 병장이 되었다.
계급장에 줄 하나 추가된 게 이리도 기쁠 줄은 본인도 미처 몰랐다.
“됐다. 죄송할 게 뭐 있냐. 나도 예전에 진언이 형 병장 진급했을 때 한 1주일 동안 상병님이라고 불렀었어.”
근 반년 동안 불렀던 ‘김조항 상병님’이라는 호칭을 하루아침에 바꿔 바로 부를 수 있는 병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김조항 본인도 예전이 이런 실수를 자주 했었기에 도혁을 충분히 이해했다.
“진수는.”
“저도 준비 다 끝났습니다.”
“그럼 사열대로 가자.”
“예!”
세 명의 장정들이 발길을 재촉했다.
사열대 앞에는 이미 하나포 말고도 다른 전포에서 선별된 인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에는 도혁이 아는 얼굴도 보였다.
“오! 전도혁 상병!”
일부러 상병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그의 동기, 고만해.
그 또한 상병이 되었다.
“왜.”
“얌마. 내가 일부러 관등성명 불러줬는데. 너도 나 한번 불러줘라.”
“알았다, 고만해 일병.”
“상병이라고, 상! 병! 여기 계급장 안 보이냐?”
“그래, 잘 보인다. 그래도 아직 전역하려면 한참 남았잖냐. 겨우 상병된 거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
“쳇, 낭만이 없는 놈이구먼.”
이제 겨우 상병 1호봉에 지나지 않았다. 상꺽 정도 되어야 전역일을 논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게 도혁의 평소 마인드였다.
서로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대민지원을 이끌 간부, 필두가 이들의 준비 상태를 직접 체크했다.
“다 끝났나.”
“예!”
“운전병이 조금 있다가 사열대 앞으로 차 끌고 올 테니까 거기에 도구들 다 싣고서 탑승해 있어라. 그리고 하나포 반장은 어디 갔나.”
“배 아프다고 잠깐 화장실 갔습니다.”
“하여튼 그 녀석…… 하나포 반장 오면 내 말 전해둬라.”
“네!”
다시 행정반으로 발길을 돌렸다.
머지않은 시간이 필두가 예고했던 대로 포차 한 대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사열대로 다가왔다.
“오라이, 오라이. 스톱!”
조항이 직접 차 유도까지 끝낸 뒤에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제설 도구 실어라.”
“예!”
병사들이 더더욱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포 반장까지 합류해 이들을 도왔다.
10분 뒤.
출발 준비를 마친 병사들과 함께 필두가 포차에 올랐다.
선탑자 자리를 차지한 그가 운전병에게 물었다.
“위치 기억하나.”
“얼추 압니다.”
“가다가 길 모를 거 같으면 나한테 말해라. 알려줄 테니까.”
“예, 행보관님.”
“그럼 출발하도록.”
출발 명령이 떨어지자 포차가 매연을 내뿜었다.
* * *
목표로 삼은 묘랑 마을은 9090대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만, 마을 입구가 생각보다 좁아 운전병에게 고난도 운전 스킬을 강제로 요했다.
“조금만 더 운전석 쪽으로 핸들 돌리고. 그렇지.”
바들바들 떠는 운전병과 다르게 필두는 여유롭게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실 드리무어의 운전 경력은 운전병보다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습득이 월등히 빨랐기에 남들 1년 익힐 걸 그는 한 달…… 아니, 어쩌면 10일이면 충분히 익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비상한 두뇌를 앞세운 빠른 습득력으로 이미 그는 운전 마스터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설사 운전병이 실수를 저질러도 크게 상관없었다.
선탑자 자리에는 필두가, 그리고 포차 뒤에는 진수가 앉아 있는데 무슨 걱정이랴.
포차가 폭발해도 인명 피해가 발생할 일은 전혀 없었다.
운전병에게만 살 떨리는 진입로를 통과했을 때.
“스톱. 여기에 차 세워라.”
“네!”
포차를 정차시킨 필두가 먼저 하차했다.
“전원 하차해라.”
“하차!”
복명복창하며 포차 위에서 뛰어내리는 병사들의 모습은 흡사 특공대를 연상케 했다.
다만, 손에 쥐고 있는 게 총이 아닌 제설 도구라는 게 좀 거슬렸지만 말이다.
마을에 도착하자 한 노인이 이들에게 다가왔다.
“하이고, 참말로 고맙습니다! 늙은이들 위해서 여기까지 다 와주고.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청년회장 맡은 이춘복입니다!”
70대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청년회장 직책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 마을의 고령화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 가능한 부분이었다.
“9090대대 제1포대 행정보급관. 강필두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르신.”
가볍게 악수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 노인의 얼굴에 미안함이 감돌았다.
“미안합니다. 마을 눈도 못 치워서 이렇게 도움까지 요청해서…….”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어르신은 눈 치워야 할 장소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필두가 들려주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노인에겐 힘이 되었다.
노인으로부터 치워야 할 구역들을 재차 확인 맡을 때.
병사들은 바로 제설 들어갈 수 있게끔 미리 준비 작업에 임했다.
“진수야. 눈삽 그쪽에다 좀 놔줄래?”
“이병 황진수. 예, 알겠습니다.”
마을 뒷산으로 향하는 입구 근처에 눈삽들을 내려놓았다.
그때, 이질적인 감각이 진수의 전신을 훑었다.
‘이건…….’
마나의 파동이 격하게 요동쳤다.
정신을 집중해 원인이 무엇인지, 위치는 어디인지를 파악하려 했지만, 파동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뭐지?’
정확하게 무슨 일이었는지 알아차리긴 힘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추 가능한 사실이 있었다.
‘저번에 그 녀석들이 나타났을 때와 동일해.’
김한과 조승천.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떠올랐다.
‘설마 또……?’
필두가 두 사람을 심문하는 내용을 몰래 엿들었다.
김한과 조승천 말고도 다른 녀석들이 이곳으로 넘어왔다는 정보는 이미 진수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동료일지도 몰랐다.
필두의 가족을 죽인 진범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였다.
그래서 진수가 직접 이 사건에 발을 들여놓고 싶었다.
악인, 드리무어의 탄생.
그리고 그의 과거.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다행스럽게도 필두는 아직 진수가 알아차린 걸 모르는 듯해 보였다.
‘녀석한텐 비밀로 해야겠군.’
정보를 공유할 필요까진 없었다.
아직 이들은 서로 적이니까.
노인과 대화를 마치고 온 필두가 병사들을 불렀다.
“2명씩 조를 짜서 움직인다. 3개 조는 내가, 2개 조는 하나포 반장이 담당하도록.”
“예. 행보관님.”
“산 입구 쪽, 그리고 마을 입구 쪽. 이렇게 두 곳은 하나포 반장이 담당해라. 병사는…….”
“이병 황진수! 산 입구 쪽 지원하고 싶습니다!”
진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본래는 필두가 알아서 분배하려 했었다.
갑자기 저런 열정을 보이는 것도 이상했다. 필두가 시키는 일이라면 반감부터 가지는 진수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저런 적극성을 보이는지 이해가 잘 안 됐다.
수상해 보이지만, 그래도 딱히 막을 만한 이유도 없었기에 진수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알아서 해라.”
“감사합니다!”
웬일로 드리무어에게 고마움까지 표현한다.
‘감시를 붙여두는 게 좋겠군.’
비록 진수와 자주 얼굴을 마주 보는 사이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서로 같은 편이 된 것까진 아니었다.
다른 병사들 배분까지 다 마친 뒤, 각자 할당된 구역으로 이동했다.
그전에 필두가 빠르게 자신의 소환수를 꺼냈다.
“마일더를 감시해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도록.”
붉은 눈의 까마귀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윽고 날개를 펄럭이며 뒷산을 향해 날아갔다.
* * *
진수와 같은 조가 된 조항이 벌써부터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 넓네.”
“그러게 말입니다.”
산 입구 쪽이 할당된 구역 중에서 가장 넓을 것이다.
“그래도 하긴 해야겠지. 진수야. 네가 그쪽 맡아라.”
“예, 알겠습니다.”
산과 가장 가까운 지역을 맡게 되었다.
진수에겐 호재였다.
“…….”
눈을 치우는 척하면서 슬금슬금 산 입구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조항의 눈치를 살폈다.
‘코너 돌면 안 보이겠군.’
제설하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코너를 돌았다.
동시에 진수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가 목표로 삼은 곳은 산언저리.
마나 파동이 발생했던 곳과 동일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확인 한번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