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95화
제24장. 진급시험(2)
진급 시험은 병기본과 체력 측정으로 이뤄진다.
필기시험도 있고, 사격도 포함되며 화학전 상황에서 방독면을 얼마나 빨리 쓰는지를 기록해 평가하는 과목도 있었다.
복합적으로 평가를 매겨 이 병사가 진급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본래는 진급 시험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그냥 만기를 채우면 알아서 진급되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하나 강한 군인 육성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병진급 시험 제도도 함께 도입되었다.
덕분에 병사들만 고통받는 중이다.
때아닌 진급 시험 준비까지 해야 하니, 이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이란 말인가.
집합을 마친 뒤 생활관으로 돌아온 진급 대상자들.
오자마자 한탄부터 늘어놓았다.
“왜 하필이면 다음 주냐. 미치겠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러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지 말입니다.”
“하아, 돌아버리겠네.”
“이놈의 진급 시험은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 진짜.”
원성이 자자했다.
안 그래도 국방부 장관의 배려로 평일에도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보장받았는데, 그 시간을 진급 시험 준비로 낭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니 억울함이 사무쳤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필두의 명령이긴 하지만, 이건 본인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진급 누락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았다.
“도혁아, 성태야.”
자리로 돌아온 조항이 조용히 두 사람을 불렀다.
“예, 김조항 상병님.”
“이거, 받아라.”
“이게 뭡니까?”
두 병사에게 작은 군용 수첩을 건넸다.
“진언이 형이 남겨두고 간 거다. 진급 시험 기출 문제라고 보면 된다.”
“헉, 정말입니까?”
“웬만하면 이 안에서 다 나오는 추세니까 이것만 외워도 필기는 합격점 받을 거다.”
한 마디로 족보 같은 거였다.
이거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진급 시험 시스템이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가라 형식이 좀 많았다. 그냥 겉으로만 진급 시험처럼 보이게 하고, 실상은 웬만큼 인성에 문제가 없는 이상은 그냥 진급시켜주는 형태로 많이 치러졌다.
그러나 요즘 군대는 달랐다.
2008년을 기준으로 점점 진급 시험 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하더니, 육군에는 진급 시험 제도가 정착되었다.
하나 진급 시험 통과 기준은 각 부대가 자율적으로 하게끔 시행되고 있었다.
9090대대는 기준이 제법 높은 편. 그래서 더더욱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에 우리 하나포는 진급 대상자만 세 명이더라. 행보관님 말씀하신 것처럼 가급적이면 전원 진급할 수 있게끔 하자. 진언이 형이 모처럼 사제 모자도 사줬으니까.”
“네,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하겠습니다!”
전도혁이 먼저 강하게 의욕을 뽐냈다.
성태도 직접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도혁 못지않게끔 진급 욕심이 가득했다.
진급 누락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것이 하나포 분과 내에 열풍처럼 불어 닥쳤다.
하나 이들보다 더 진급에 욕심을 내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윤병철을 비롯해 이미 한번 진급이 누락된 병사들이다.
“하아.”
진급 시험 이야기를 듣자, 윤병철 상병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번에는 무조건 진급해야 하는데…….’
하나 걱정이 덜컥 앞섰다.
9090대대 진급 시험 과목에 체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 오래달리기까지.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는 어찌 저 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오래달리기가 자신 없었다.
체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비단 윤병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번씩 진급 누락이 됐던 병사는 도합 4명.
이들의 공통적인 탈락 이유가 바로 체력 시험에 있었다.
‘연습은 해둘까.’
두 번의 진급 누락은 없다!
그런 생각에 활동화를 갖춰 신고 사열대 앞으로 나갔다.
몇 바퀴 정도 뛸 생각이었다.
막사를 나와 사열대 계단을 내려가는 윤병철. 그때 먼저 온 손님들이 그를 반겼다.
“충성!”
“윤병철 상병님 오셨습니까.”
“응? 너희, 뭐하냐.”
진급 누락된 4인방 중 윤병철을 제외한 3명이 각각 몸을 풀고 있었다.
“오래달리기 연습 좀 하려고 합니다.”
“너희도 나와 같은 생각이구나.”
“예. 이번에 행보관님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 무조건 합격해야지 말입니다.”
“하긴, 그렇지.”
그 생각에 병철도 깊은 공감을 표했다.
강압이라기보다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만약에 병철이 이번에도 진급 누락을 통보받게 된다면, 그리고 반대로 조항 같은 후임들이 병장 진급 시험에 합격한다면, 그는 후임보다 낮은 계급을 달게 될 것이다.
그건 피하고 싶었다.
오기로라도 이번 진급 시험은 무조건 합격해야 한다! 그것이 윤병철의 강력한 의지였다.
“좋아! 우리 전부 다 합격하는 거다! 알겠지?”
“예!”
“무조건입니다!”
진급 누락자 4인방이 의기투합하기 시작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헥…… 헥…….”
벌써부터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뛴지도 얼마 안 됐다. 고작해야 300m?
진급 시험에선 3㎞를 뛰어야 한다. 지금 뛴 것에 10배 되는 거리를 뛰어야 하는데, 과연 이들이 감당해낼 수 있을까.
천만에. 지금 상황에서 봤을 땐,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때마침 탄약고 초소를 들렀다가 당직과 함께 막사로 돌아온 필두.
그의 시선이 사열대 앞을 향했다.
“너 먼저 들어가 있어라.”
“예!”
같이 순찰을 돌고 온 당직을 돌려보냈다.
잠시 우두커니 서서 진급 누락 4인방의 모습을 응시했다.
‘허약하군.’
딱 봐도 안쓰러움이 느껴질 만큼 저질 체력들이었다.
500m가 넘어갈 즈음에 이들은 이미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저대로 가다간 이번에도 진급 누락될 게 뻔했다.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거 같은데.’
그래도 필두의 부하 아니겠는가.
부하의 고충을 못 본 척하고 넘어갈 만한 그런 남자는 아니었다.
뭔가 해결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가만.’
순간 필두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병사들의 개인신상정보가 주마등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중 유독 한 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강철남 병장.
넷포에 소속되어 있으며, 병사들 사이에선 ‘진급의 신’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그는 진급 시험에서 전부 특급 등급을 받으면서 오히려 조기 진급이라는 엘리트 길을 걸어온 자였다.
행정반으로 돌아온 필두가 또다시 당직을 찾았다.
“당직! 강철남 지금 행정반으로 바로 오라고 전해라.”
“강철남 병장 말입니까? 10분 뒤에 외곽 근무입니다만.”
“선임 근무자 다른 병사로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 오라고 해라.”
“예! 알겠습니다!”
필두의 말은 절대적이다.
그건 9090대대 제1포대 내에선 거의 법칙으로 작용하다시피 했다.
* * *
행보관실 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체격 좋은 병사 한 명이 등장했다.
“충성! 병장 강철남, 행보관실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와서 앉아라.”
“예!”
전도혁급의 풍채를 지닌 강철남. 그가 눈동자를 굴렸다.
‘행보관님이 왜 날? 내가 뭐 잘못하기라도 했나?’
이런 불안감이 그를 더더욱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하나 필두가 그를 찾은 용무는 부정적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네가 병력들 사이에서 ‘진급의 신’이라 불린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그거야 애들이 장난식으로 붙인 별칭일 뿐입니다. 전 그저 저만의 노하우로 진급 시험에 임했을 뿐입니다.”
노하우라는 단어가 유독 필두의 귀를 자극했다.
“노하우?”
“예, 그렇습니다!”
“진급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필살의 전략 같은 거라도 있나보군.”
“필살이라기보다는 그냥 팁 수준입니다.”
“그거라도 어딘가.”
사실 진정한 필살 전략은 따로 있었다.
필두가 마법을 사용해 일시적으로 그들의 육체를 강화시켜주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겠는가. 체력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본인이 꾸준히 길러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두는 게 좋았다. 마법의 힘을 빌린 능력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자신만의 강인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런 방법은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네가 도움을 좀 줬으면 하는데.”
“제가 말입니까?”
“만약 이번에 22명 모두가 다 진급 시험에 통과한다면, 너에게 따로 보답을 하마.”
“보답이라 하심은…….”
조심스럽게 묻는 강철남.
그의 눈빛에 기대감이 어렸다.
철남이 듣고 싶어 하는 포상 내역이 뭔지 필두도 잘 알고 있었다.
“포상휴가 챙겨주마.”
“……!”
그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했다.
사실 강철남은 필두의 말에 따르고 싶지 않았었다. 다른 병사들은 일주일 내내 휴식을 보장받았는데, 보지도 않는 진급 시험 가지고 본인 개인정비 시간을 희생할 필요가 뭐가 있나. 철남이 그렇게까지 정이 넘치는 병사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포상휴가를 따로 챙겨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 하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나왔어야지.”
협약이 체결되었다.
* * *
어제에 이어 오늘도 활동복 차림으로 아침 점호를 받는 병사들.
얼굴에는 여전히 졸음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조금 있다가 쉴 생각을 하니 그렇게 피곤해 보이진 않았다.
매번 하던 점호를 마치고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온 후에 아침 식사까지 마쳤다.
주말과 같은 일정을 보내는 터라 아침에 사열대로 따로 집합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아아.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진급 시험 대상자 22명은 지금 즉시 사열대 앞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필두에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된 22명의 병사에게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분명 행보관님이 지시했겠지?”
“안 봐도 뻔하지 말입니다.”
병사들 사이에서도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견은 공통되었다.
보나 마나 필두일 것이다.
실제로 필두가 사열대 앞에서 22명의 병사들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 모였나.”
“예!”
“지금부터 너희에게 진급 시험 교육을 시켜줄 강사를 소개해 줄 거다.”
“강사……?”
“뭐지?”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다.
하나 필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등장한 병사를 보자마자 이들이 놀라움을 표했다.
“강철남 병장님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강철남 병장님! 거기서 뭐 하십니까?”
이들의 물음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강철남.
평소의 그와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구해온 건지 모르겠지만,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는 선글라스와 빨간색 모자, 티를 착용한 상태였다.
군인이라면 다 알 법한 복장이었다.
‘유격 조교 코스프레인가?’
‘왜 저런 차림이래.’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병사들에게도 금시초문이었다.
사전에 전혀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강철남이 목에 걸린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익!
“본 조교가 오늘부터 너희의 진급 시험을 책임지기로 했다. 책임지고 합격시키기로 했으니 각오하도록.”
“……?”
“……?”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런 반응이었다.
하나 강철남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대답 안 하나!”
“예, 예! 알겠습니다!”
선임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일단 대답은 했지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몰라, X발! 난들 아냐?’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