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87화
제21장. 실제상황(3)
무장공비 중 한 명인 김한이 노골적으로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허름한 차림임에도 그의 눈빛에는 무시하기 힘든 살기가 어렸다.
하나 정장 차림의 남성, 조승천은 그럼에도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적일지도 모르는 녀석한테 우리 정보를 멋대로 흘리지 마라. 그러다가 피 볼 수 있으니까.”
“그 판단은 내가 한다.”
“그럼 넌 저놈이 아군이라고 생각하나?”
“드리무어를 적으로 두고 있다면, 아군이 될 가능성이 있지.”
드리무어라는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진수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두 남자의 대화를 통해 큰 정보 두 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무장공비로 치부된 두 남자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존재. 다시 말해서 드리무어와 진수처럼 차원이동을 통해 레디너스에서 이곳으로 건너온 자들이었다.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강제적으로 이곳에 온 듯해 보였다.
‘드리무어 때문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원인으로 작용했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그건 차후에 심문하거나 하면 될 테니까.
그리고 두 번째.
저들은 드리무어에 악감정을 지녔다.
하나 그렇다고 레디너스의 평화를 위해 활동했던 진수와 같은 과는 아닌 것 같았다.
또 다른 악의 잔당들일지도 몰랐다.
악인이라고 모두가 다 협력 관계에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골치 아프군.’
그렇다면 진수의 적일지도 몰랐다.
찰나의 순간, 진수의 감정변화를 알아차린 조승천이 안경을 고쳐썼다.
“보아하니 우린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이인 거 같군.”
“그러게 말이야.”
진수도 그 말에 공감했다.
고라니 수법을 통해 병사들을 기절시킨 걸 실시간으로 목격한 진수.
거기서 그는 저들이 사용한 마법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흑마법이었다.
레디너스에서 금기시되는 마법은 두 가지가 있다. 흑마법과 차원이동. 후자는 드리무어를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흑마법은 여전히 마법사들에게 금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흑마법을 다룰 줄 아는 자. 그 말은 곧 좋지 않은 길을 걷는 자임을 뜻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악인(惡人)이다.
조승천이 슬쩍 김한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김한이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협상 결렬인가.”
“…….”
긴장감이 감돌았다.
상대방이 얼마나 강한지 감도 안 잡혔다. 게다가 저쪽은 두 명. 이쪽은 한 명.
심지어 진수는 아직 본래의 힘조차 되찾지 못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저들의 말을 유추한다면, 넘어온 시기는 드리무어와 비슷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다면 진수보다 적응 시기가 훨씬 더 많았을 터.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조승천이 가장 먼저 칼을 뽑아들었다.
오른손을 뻗자, 무수한 검은 갈래들이 진수를 향해 쏟아졌다.
하나 진수는 애초에 피할 생각도 없었던 모양인지 마나 소드를 만들어내 날을 세웠다.
스르릉!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었던 검은 갈래들이 순식간에 마나 소드의 먹잇감이 되었다.
‘좋아, 바로 이 감촉이지!’
위험한 상황이 될지도 몰랐으나, 그것이 오히려 진수에게 흥분을 심어줬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몸을 풀 기회가 왔다!
그간 군대에서 받은 훈련들이 너무나도 허접했던 터라 오히려 그것이 진수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줬다. 마음껏 날뛰고 싶었음에도 마땅한 상대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상대가 나타났다. 그러니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한편, 진수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아차린 탓일까. 조승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저 녀석, 정체가 뭐지?’
방금 일격은 조승천이 구사할 수 있는 고위 흑마법 스킬이었다.
그럼에도 진수는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무마시켰다.
적응 기간이 차이 난다 하더라도 애초에 이들의 실력에 격차가 심했다.
드리무어라는 최강의 흑마법사를 상대해 왔던 마일더 아니겠는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악인, 조승천이 구사하는 흑마법 정도는 손쉽게 튕겨낼 수 있었다.
아직 진수의 정체가 마일더임을 모르는 조승천과 김한. 그러니 이렇게 허세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진수가 마일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부리나케 도망치느라 바빴을 터.
‘어디 슬슬 강도를 높여볼까.’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마나를 끌어 올려 녀석들에게 단죄를 명하려 했다.
하나 갑작스레 방해자가 등장했다.
쿠우웅!
진수와 두 남자 사이를 가로지르듯 한가운데에 정확히 착지한 남자.
상사 계급장을 보자마자 진수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들었다.
‘드리무어……!’
베레모를 고쳐 쓴 필두가 김한과 조승천을 응시했다.
그 뒤, 진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진수가 불만어린 목소리를 냈다.
“뭣 하러 왔냐. 나 혼자서도 충분하거늘.”
“뻔하잖나.”
담담한 얼굴로 자신이 온 목적을 들려줬다.
“간첩 잡으러 왔다.”
* * *
필두를 보자마자 김한과 조승천의 눈빛이 달라졌다.
조금 전에도 서로 말다툼을 하던 두 남자였으나, 드리무어가 등장하자마자 그 갈등은 금세 해결되었다.
공통의 적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갈등은 불필요했다.
파바박!
가장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간 쪽은 김한이었다.
“죽어라, 드리무어!”
오른손에 뭉친 마나 덩어리가 거대한 창으로 형상화되었다.
정확히 필두의 미간을 노렸다.
하나 마나의 창끝은 필두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일시 정지해야 했다.
왼손을 들어 마나 창을 그대로 잡아버린 필두가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내 정체를 알고 있군.”
“큭……!”
“네놈들은 누구지? 무슨 원한이 있어 날 공격한 거냐.”
그 일격을 통해 지금까지 필두에게 마법으로 공격을 가했던 원흉이 이들임을 간파했다.
술술 나오는 필두의 질책에도 이들은 입을 다문 채 그를 노렸다.
이번에는 조승천이 측면을 노렸다.
“섀도우 스트라이크!”
주문 영창과 동시에 검은 기운이 필두의 몸을 삼키기 위해 덤벼들었다.
그럼에도 필두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가소롭군.”
콧방귀를 끼더니, 여유가 있는 오른손을 조승천에게 뻗었다.
순간 위기감을 느낀 조승천이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가 물러서자마자 발동되던 섀도우 스트라이크 마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멸했다고 보는 것이 좋았다.
만약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조승천 역시 자신의 마법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지도 몰랐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놈이야.’
김한과 조승천이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차원 이동으로 넘어온 시기는 분명 드리무어와 동일했다. 하나 출발선이 똑같으면 무엇하겠나. 애초에 능력과 재능의 차이가 넘사벽 수준인데.
한편, 조승천이 선보인 마법을 목격한 뒤부터 필두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네 녀석들, 흑마법사냐.”
“…….”
“…….”
“웬만한 흑마법사들 신상정보는 다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데, 너희 정체는 도통 감이 안 잡히는군.”
이 말에 섬뜩함마저 들었다.
이들이 필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이유.
그리고 필두를 노리는 이유.
그 복잡한 사정에 분명 숨겨진 진실이 있을 터.
필두는 본능적으로 이를 눈치챘다.
“어차피 순순히 말해주지도 않을 거 같으니, 강제력을 써볼까.”
말이 끝나자마자 필두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간 당혹감에 빠져든 두 남자.
“어디로 사라졌지?”
“그, 글쎄…….”
알 리가 없었다.
마나를 퍼트려 수색망을 펼치면 되지만, 빈틈을 보이는 즉시 필두가 이들의 뒤통수를 노릴 것이다.
두 남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진수는 드리무어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었다.
‘좋은 먹잇감이었거늘.’
아쉬움을 애써 감췄다.
오랜만에 강자와 맞붙을 수 있다는 설렘도 필두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저들은 필두를 노리고 있었다. 이 문제는 필두에게 맡기는 편이 도의상 옳았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필두의 능력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 훗날 발생할지도 모르는 필두와의 결전에 많은 참고가 될 테니까.
이들의 머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필두가 그대로 빠르게 착지했다.
한 손으로 김한의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 조승천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컥!”
“어느새……!”
필두의 기척을 전혀 감지해내지 못했다.
같은 흑마법사라 하더라도 실력 차이가 너무 났다.
그대로 힘을 가해 두 남자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나중에 다시 보자고, 친구들.”
뚝.
의식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버둥치던 이들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것을 보자마자 진수가 기겁했다.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아직 들을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벌써 죽이면 섭섭하지. 안 그런가.”
“…….”
그 말은 즉, 이야기 다 들을 거 들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뜻과 같은 게 아닐까.
‘역시 이 녀석은 드리무어가 틀림없어.’
오래간만에 느끼는 그의 사악함에 진수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 * *
간첩 신고가 들어온 지 근 1시간가량이 지났을 때.
대대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정말로 행보관님께서 잡으신 겁니까?”
“예.”
“허, 세상에!”
아직도 믿기지 못한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무장공비가 사용한 화학 테러에 강제로 기절해 버린 오대기 소대원들. 이들을 대신해 필두가 무장공비 두 명을, 그것도 산채로 포박해 데려왔다.
“…….”
“…….”
두 남자가 비통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푹 숙였다. 사실 필두에게 얼굴을 잡혔을 때부터 지금까지 본인들이 어떻게 제압당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나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저 녀석은 괴물이야!’
‘괜히 희대의 악인이라 불리던 남자가 아니군.’
그래도 이들 두 명이 힘을 합친다면 드리무어 정도는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나 그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쓰러뜨리기는커녕, 필두의 몸 풀기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하기야. 설령 이들이 드리무어를 몰아붙였다 하더라도 어차피 마일더도 그 자리에 있었기에 애초에 승산은 없었다.
물론 두 남자는 아직까지도 진수의 정체가 마일더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원부대가 오기까지 병사들과 함께 제가 감시하겠습니다.”
“행보관님께서요?”
“예.”
“많이 힘드셨을 텐데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필두를 만류하고 싶었으나, 그의 주장은 강경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잡았으니, 제가 끝까지 책임지고 싶습니다.”
왠지 필두의 말이라면 믿음이 갔다.
실제로 무장공비를 직접 잡은 사람도 필두 본인 아니겠는가.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장공비 둘을 잡았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혹시 다른 무장공비가 더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병사들과 함께 제1포대 CP텐트 쪽으로 무장공비 둘을 데려갔다.
전도혁과 소진언, 그리고 통제관과 하나포 반장이 필두와 함께 무장공비 둘을 감시하기 위해 CP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필두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이들의 눈이 풀리더니,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정지했다.
최면 마법이었다.
“자, 그럼.”
두 무장공비를 내려다보기 시작한 필두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볼까.”
희대의 악인이라 불리던 시절의 그 얼굴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