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83화
제20장. 혹한기(8)
야간 방열을 끝낸 후에 이어지는 저녁 식사는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사실 식단은 평소에 먹던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몸이 힘들어서 그런 걸까. 맛없는 군대 밥조차도 맛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맹맹한 국물마저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소진언도 마찬가지였다.
“X발, 말년에 짬밥이 맛있다고 생각될 줄이야.”
본인이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왔다.
그것이 훈련의 묘미 아니겠는가.
그렇게 저녁 식사까지 마친 이후에 상황조치훈련 몇 가지를 더 실시했다.
이후에 저녁 8시경이 되었을 때, 대대장이 포대장들을 집합시켰다.
“병사들 오늘 피곤할 테니까 이제 그만 취침시키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어제 하루 종일 제설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다음 날 혹한기 훈련까지 진행하려니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건 비단 병사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겉으로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포대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피곤함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위장크림만 아니었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1개 포대를 책임지는 포대장들이다. 병사들 앞에서 지친 내색을 보일 순 없었다.
간부들을 집합시킨 제1포대 포대장이 대대장의 말을 전달했다.
“현 시간부로 각 포반장들이 병력 통제해서 취침준비 들어가도록.”
“예, 알겠습니다!”
“근무자 명단은 행보관님께서 직접 작성해서 CP텐트에 걸어놓을 테니 병사들한테 확인하라고 전파해라.”
“네!”
기다리고 기다리던 취침 시간이었다.
훈련 동안은 개인정비시간 같은 개별적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훈련하거나 밥을 먹거나, 아니면 자거나. 이 세 가지 패턴이 다였다.
그래서 더더욱 취침시간이 반갑게 다가왔다.
텐트 설치 이후 군장을 꺼내 안에다가 넣어뒀다.
씻고 싶었지만, 혹독한 추위 속에 이미 얼음물이 되어버린 물을 접하니 씻어야 한다는 생각도 달아나버렸다.
결국 대다수의 병사들이 선택한 건 물티슈였다.
“이걸로 대충 닦고 자면 돼지. 그 이상은 사치다, 사치.”
“맞습니다.”
진언의 말에 격한 공감을 표하는 성태였다.
그러나 청결을 좋아하는 조항으로선 이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저는 씻고 오겠습니다.”
“진짜로?”
“감기 걸립니다, 김조항 상병님.”
“안 걸려.”
물티슈로 대충 닦고 찝찝한 기분으로 잘 바에야 그냥 잠깐의 고통을 참고 깨끗한 상태에서 잠을 자는 게 훨씬 좋았다.
그것이 조항의 신념이었다.
“신병, 너는?”
“저는 물티슈 선택하겠습니다.”
“자, 여기.”
“감사합니다.”
도혁에게서 물티슈를 건네받은 진수가 얼굴에 묻은 위장크림을 벅벅 닦아냈다.
진수에게 이 정도는 큰 문제도 아니었다. 진흙탕에서 비를 맞으며 잔 적도 있는데 까짓것 이 정도 환경에서 잠을 못 잘까.
모든 병사가 취침 준비를 마쳤을 때, 시간은 이미 저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보통은 1시간 뒤, 그러니까 저녁 10시에 취침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나 훈련 중이었기에 비교적 이른 취침을 취하게 되었다.
병사들도 딱히 큰 불만을 지니진 않았다. 1시간 더 깨어 있어봤자 해야 할 건 훈련밖에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에야 그냥 그 시간에 잠이나 자는 게 더 좋았다.
손전등을 든 채 텐트마다 한 번씩 비치던 필두가 모든 병사가 충분히 들을 수 있게끔 크게 외쳤다.
“내일 6시에 바로 기상할 테니까 다들 잠 푹 자둬라.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병사들 역시 필두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
CP텐트로 돌아오자 부사관들이 라면을 하나씩 들고 몸을 녹이고 있었다.
“늦은 시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행보관님.”
통제관이 부사관들을 대신해 필두의 수고로움에 경의를 표했다.
본인이 잠을 청할 접이식 침대에 걸터앉은 후에 스마트폰을 응시했다.
못 받은 통화가 하나 있었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오마. 라면 다 먹으면 너희도 들어가서 쉬어라.”
“예, 알겠습니다.”
CP텐트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벌린 필두.
부재중 번호로 전화를 걸자,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접니다, 혜정 씨.”
-아, 필두 씨! 훈련 끝나셨나요?
“예. 오늘 훈련은 끝났습니다. 병사들도 이제 막 취침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괜히 전화해서 훈련에 방해된 건 아닐까 싶어서요.
어지간히 필두가 걱정되었던 모양인가 보다.
“괜찮습니다. 다만, 지금처럼 9시 정도 이후에나 통화 가능할 거 같습니다. 통화에 제약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눈치 보이니까요.”
-미안해요, 필두 씨.
“혜정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혜정 씨 목소리 들으니 없던 기운도 생기는 거 같네요.”
-어머, 정말요?
여자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였다.
어찌 이리도 감정이 왔다 갔다 할까.
그래도 방금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땀내나는 남자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혜정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정말로 기운이 나는 거 같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군.’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혜정과의 통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10분 정도 짧은 통화를 마친 뒤에 다시 CP텐트로 돌아왔다.
그사이, 부사관들도 라면 취식을 마치고 각자 담당하는 분과 텐트로 들어가 취침에 들어갔다.
가장 마지막에 남은 통제관이 필두에게 취침을 권했다.
“행보관님, 먼저 주무시기 바랍니다.”
“넌 안 자냐.”
“제가 당직사관 첫 타자입니다.”
“아, 그랬었지.”
잠시 잊고 있었다.
통제관이 오후 9시부터 자정까지 임시 당직사관을 맡을 예정이었다.
훈련이다 보니 당직사관도 한 명이 밤을 새워가며 하지 않고 순서를 정해 번갈아 돌아가기로 했다.
통제관을 시작으로 통신반장, 탄약반장, 마지막으로 필두까지.
이렇게 부사관 4인방이 오늘 하루, 당직사관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럼 먼저 눈 좀 붙이마.”
통제관의 배려를 받아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벌레들의 울음소리. 그것은 마치 레디너스 시절 때 야영하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그때는 몬스터나 산적들의 야습을 걱정하며 새우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훈련이긴 하나, 이곳은 몬스터의 습격도, 적들의 기습도 없었다.
‘아니지, 한 명 있군.’
진수가 있긴 하지만, 그 혼자서 드리무어를 죽이려 들어봤자 의미 없는 짓에 불과했다.
‘레디너스라…….’
잠시나마 고향 생각을 하며 서서히 단잠에 빠져들었다.
* * *
새벽 2시 반.
모두가 단잠에 취해 있을 무렵, 필두가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드르렁거리며 코를 고는 포대장. 이 소음 때문에 잠이 깬 것이 아니었다.
상반신을 일으키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탄약반장이 재빨리 정신 줄을 붙잡았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여과 없이 드러났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깨, 깨셨습니까, 행보관님.”
“어.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그렇군.”
침낭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필두가 전투화를 신었다.
“어디 가십니까?”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오마.”
“아, 네.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기에 행보관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미리 파악해두는 건 좋은 행동이었다.
탄약반장에게 잠시 CP텐트를 맡겨둔 뒤.
“…….”
필두의 시선이 절벽으로 향했다.
그가 눈을 뜬 이유는 이질적인 마나의 흐름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그가 향한 곳은 절벽 쪽이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조심스럽게 하나포 텐트 천막을 걷어 올렸다.
그 순간, 마나 소드의 날카로운 날이 필두의 목을 겨눴다.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 드리무어.”
“…….”
“대답해라.”
위협을 가하는 진수의 말에 살기가 묻어나왔다.
야밤이었기에 두 사람에게 집중된 시선은 없었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진수와 시선을 맞췄다.
“너도 느꼈겠지. 저기 절벽 위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네 녀석이 꾸민 짓 아닌가.”
“난 네놈이 꾸민 짓인 줄 알았는데.”
“…….”
“그래서 일부러 하나포 텐트부터 확인한 거다. 네가 절벽 위에서 무슨 짓을 벌인 건 아닐까 싶어서.”
절벽 위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나의 흐름.
필두는 그것의 원인이 진수라 생각했다.
반대로 진수는 필두 때문이라 여겼다.
하나 듣다 보니 두 사람이 원인은 아닌 듯했다.
하나 진수는 그를 믿을 수 없었다.
드리무어는 레디너스 대륙에서 희대의 악인이라 불리던 남자다.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던 그의 과거 행적을 돌이켜보면 지금 상황도 충분히 날조할 수 있었다.
필두도 그걸 아는 모양인지 타협을 제안했다.
“못 믿겠다면 나와 같이 올라가서 확인하면 되겠군.”
“네 녀석과 같이?”
“내가 저기서 무슨 짓을 벌이려 한다면 네가 막으면 될 일 아닌가.”
“…….”
“물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겠지만.”
필두도 진수를 믿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하기야. 앙숙이라 불렸던 두 남자인데, 이런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결국 마지못해 필두의 절충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법을 사용해 순식간에 공중으로 튀어 오른 두 남자.
절벽 위에 착지하자마자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쩌저적!
“?”
“이건……!”
두 사람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절벽 윗부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쳇!”
짜증 섞인 얼굴로 혀를 찬 필두가 먼저 행동에 임했다.
오른손으로 바닥을 내려치자 금이 간 절벽 부분의 이음새가 다시 맞붙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쩌저저저적!
하나였던 금이 수십 갈래로 뻗어나갔다.
“마일더!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거냐!”
“아, 알았다!”
필두의 닦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수가 마나를 끌어모았다.
조각나 아래로 떨어지려는 돌덩이들을 중력 역전 마법을 통해 억지로 다시 끌어올렸다.
그 순간.
퍼어어어엉!
갑자기 이들의 머리 위에 엄청난 마나 폭발이 형성되었다!
몰아치는 마나 폭풍. 무게 중심조차 잡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 사태를 예고라도 한 모양인지 필두가 먼저 반응했다.
왼손을 뻗자, 손끝에서 얇은 마나 장막이 펼쳐졌다.
몰아치는 마나 폭풍.
그 중심으로 보이는 푸른 마나 구체 덩어리를 보자마자 진수가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흐읍!”
짧은 호흡을 내쉬며 있는 힘을 다해 돌멩이를 투척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마나를 실은 공격이었다.
돌멩이가 정확히 마나 구체를 명중시켰다.
쨍!
유리 조각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마나 폭풍이 흔적을 감췄다.
금가던 절벽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그건 대체…….”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얼굴을 하는 진수였으나 필두는 이미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었다.
‘저번과 같아.’
야간 행군 도중에 발생했던 마나 폭풍.
이번에도 같은 방식이었다.
한때는 진수가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건 오해였음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벌어지려는 건가.’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