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82화
제20장. 혹한기(7)
진수의 대활약으로 하나포는 제1포대 전포 중에서도 가장 빠른 방열 속도를 선보였다.
방열을 끝낸 후에 포 뒤로 모인 하나포 분과.
“고생했다, 진수야.”
“이병 황진수. 아닙니다.”
진수가 이토록 듬직해 보일 수 없었다.
엊그제만 하더라도 노란 견장을 어깨에 달고 삐약삐약 거리던 신병으로밖에 안 보였는데, 지금은 정성태와 전도혁만큼 뛰어난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들보다 더 뛰어날지도 몰랐다.
아직 진수가 활약해야 할 기회는 많았다. 그때마다 그의 능력을 확인해도 늦지 않았다.
한편, 옆으로 나란히 앉은 성태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너, 바깥에 있을 때 운동 같은 거 했냐? 도혁이처럼 말이야.”
“검술하고 마법…… 이 아니라, 운동. 예, 운동했습니다.”
중간에 이질적인 단어가 튀어나왔으나, 순발력 있게 말을 바꿨다.
“무슨 운동 했기에 그렇게 되는 거냐.”
“그냥 근력 운동 위주로 했습니다.”
“웨이트나 이런 거?”
“예.”
“흠, 그러냐.”
성태가 진수의 전신을 쭉 훑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미친 듯이 운동한 몸으로 보이진 않았다.
물론 잔 근육이 여기저기 붙어 있긴 했었으나, 도혁이처럼 우락부락한 타입까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도혁이보다도 더 월등한 근력과 체력을 선보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전도혁도 그 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름대로 운동에 많은 투자를 한 도혁이었지만, 진수 같은 경우는 처음 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이들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개인정비 시간에 헬스 가지?”
“예.”
“나랑 같이 다니자. 네 옆에서 무슨 운동하는지 보고 배워야겠어.”
성태가 노골적으로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네, 알겠습니다.”
“좋았어!”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하나 진수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운동하는 모습 본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텐데.’
진수와 성태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었다.
바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유무였다.
부족한 근력과 반응속도는 마법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진수는 호리호리한 몸에도 괴물 같은 근력을 뽐내는 게 가능했다.
하나 성태나 도혁은 마법이라는 존재를 전혀 모른다. 애초에 사용할 줄도 모르는 이들에게 진수만큼의 성장을 바란다는 건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는 동안, 통신기에서 전포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를 올빼미, 올빼미라 알리고 현 시간부로 상황조치훈련 시작하겠다는 통보.
“하나포 양호.”
통신기 앞에서 대기 중이던 포반장이 곧장 대답했다.
“상황조치훈련 한다니까 각자 위치로 간다. 이번 주 오대기 누구지?”
“일병 정성태.”
“오대기 비상도 걸릴 태니까 임무 숙지해두고.”
“네, 알겠습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도 이들의 훈련은 계속 진행되었다.
* * *
제1포대 CP텐트 작업에 들어간 행정병들.
그러는 동안, 필두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
절벽 끝을 바라보던 필두가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은 없었다.
오른손을 가볍게 휘젓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까마귀 한 마리가 소환되었다.
마치 필두의 생각을 읽고 있는 듯이 최대한 동물의 음성을 내려 하지 않았다.
붉은 눈을 번뜩이는 작은 까마귀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위로 올라가 있어라.”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인 까마귀가 날개를 펼쳤다.
까마귀를 올려보낸 곳은 절벽 위.
아까부터 필두의 신경을 계속해서 거슬리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낙석 방지 시설이 노후화된 이유도 있었지만 뭐랄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각이 필두를 압박했다.
‘뭔지 모르겠군.’
자꾸 절벽이 신경 쓰인다.
뭐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에 정찰용으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붉은 눈의 까마귀를 보내봤지만.
‘아무것도 없나.’
무용지물이었다.
주변을 날아다니며 절벽 근처를 수색한 까마귀로부터 아무런 보고를 듣지 못했다.
낙석이 발생할 가능성도 희박해 보였다. 지반이 워낙 탄탄하게 굳어 있기에 필두가 우려하는 사고가 발생할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고정현의 말대로였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진수의 등장 이후로 필두는 마법을 한 번 사용하는 데에 부쩍 많이 신경을 기울였다.
그게 필두를 예민하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지나친 확대 해석은 좋지 않았다. 괜히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구심을 가지는 버릇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진화야.”
“병장 장진화!”
“CP텐트는 요 앞에다가 칠 거다. 동희랑 같이 CP텐트부터 먼저 설치해라.”
“네!”
행정병들에게 텐트 설치를 지시한 이후에도 필두의 시선은 계속해서 절벽에 머물렀다.
* * *
“대공 사격 준비!”
전포대장의 우렁찬 육성에 병사들이 일제히 총구를 하늘 방향으로 겨눴다.
입으로 탕탕탕 소리를 내며 발포 시뮬레이션까지 마쳤다.
“적 포탄 낙하!”
“적 포탄 낙하!”
두 번째 상황조치훈련이 이어졌다.
사실 상황조치훈련이라고 해봤자 거창한 건 없었다. 그저 몇 가지 전시 상황만 들려주고, 이후에는 교범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에 따른 대응 방식만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포대전술훈련처럼 연대장이 오대기 비상만 안 걸면 비교적 수월한 훈련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상황조치훈련이 이어지는 동안, 해는 점점 모습을 감춰가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물들 무렵.
포대장이 간부와 분대장들을 집합시켰다.
“다 모였나.”
“예!”
“곧장 이동 준비하도록 7691 진지로 가서 포 방열하고, 거기서 저녁 식사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포대 이동 준비!”
“이동 준비!”
실 사격과 다르게 가신 발톱을 땅에 묻거나 하지 않았기에 이동 준비도 금방 끝낼 수 있었다.
포차에 포를 건 뒤 병사들이 하나둘씩 차에 탑승했다.
하나포 반장 역시 선탑자 자리에 탑승해 운전대를 잡은 소중한에게 신신당부했다.
“야간이니까 조심해서 운전해라. 무조건 천천히 가는 거도 잊지 말고.”
“알고 있습니다.”
야간 운전은 시야가 기하급수적으로 좁아진다. 그렇기에 운전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사고가 나면 운전병 한 명만 부상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뒤에 탑승해 있는 병사들의 목숨마저 위험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자신감이 넘치는 소중한이라 하더라도 포반장의 말을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동하는 도중에 사고가 났던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때에는 사상자가 나오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지만, 다수의 병사가 적지 않은 부상을 겪었다.
전례는 늘 현재와 미래에 많은 영향을 주는 법이다.
부르르르릉!
매캐한 연기를 뽐내기 시작하는 거대한 군용 트럭.
레토나를 시작으로 박스카, 뒤이어 하나포 포차가 이동을 개시했다.
덜그럭거리며 안 좋은 승차감을 뽐내는 포차. 이동할 때마다 병사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 와중에 김조항이 후임들에게 경고했다.
“사주경계 잊지 말고. 이동 간에 자거나 하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이동 중에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이는 건 금물이었다. 혹여나 선임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갈굼을 받을지도 몰랐다.
하나 졸음이라는 게 어디 자기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나. 천하장사도 들지 못하는 게 무거운 눈꺼풀이라는 말도 있었다.
“…….”
“…….”
바로 전까지 한겨울에 땀이 흐르도록 뛰어다녔던 병사들. 그 여파가 이들에게 졸음을 선사했다.
‘아, 졸려 뒈지겠네!’
‘자면 안 된다, 자면 안 된다! 정신 차려라, 조연도!’
제각각 졸음을 쫓기 위해 발악을 했다.
A급이라 불리는 정성태조차도 졸음과의 싸움을 피할 순 없었다.
허벅지를 꼬집거나, 혹은 자신의 뺨을 찰싹 때리거나.
나름의 방식으로 졸음을 쫓는 와중에 유독 초롱초롱 눈을 밝히는 병사가 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황진수였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그의 눈빛은 실로 강렬했다.
경계는 생존이 걸린 중요한 임무였다. 레디너스 시절 때에는 몬스터와 암살자들에게 야습을 당하거나 하는 일이 빈번히 있었다.
다년간의 경험 덕분일까 진수는 경계 임무 시 절대로 졸지 않는 체질이 되어버렸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꾸벅꾸벅 조는 이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습격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로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선임을 툭툭 건드리며 ‘조시면 안 됩니다’라고 경고할 수도 없었기에 그냥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기로 했다.
7691 진지에 거의 도착할 때였다.
“어흠!”
진언이 일부러 큰 기침소리를 냈다. 그러자 분대원들이 화들짝 놀라 크게 움찔했다.
이들의 모습을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조항이었으나, 진언이 그를 만류했다.
“어제저녁까지 제설하고, 오늘 일어나자마자 혹한기 훈련 뛰고. 애들이 얼마나 힘들겠냐. 이번에는 그냥 날 봐서 넘어가 줘라.”
“그러다가 애들 안 좋은 버릇 들립니다, 소진언 병장님.”
“그래서 말했잖아. 이번 한 번만 눈감아달라고.”
후우.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후임병들이 진언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괜찮다는 식으로 피식 웃어 보이는 소진언. 그도 이등병, 일병 시절을 다 겪어봤기에 이들이 얼마나 피곤할지 다 알고 있었다.
나름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동안, 포차는 7691 진지에 들어섰다.
정찰병들의 유도에 따라 포차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진언이 필두의 모습을 포착했다.
“저기 행보관님 계시네.”
“CP텐트 위치 보니까 저쪽이 저희가 잘 곳인가 봅니다.”
“그러게. 저번이랑 똑같네.”
절벽 아래. 특이한 위치였기에 진언도, 조항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 혹한기 훈련 때에도 저 절벽 아래에서 취침을 취했다.
낙석의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뒤가 절벽인 탓에 바람을 막아준다는 나름의 장점도 있었다.
칼바람을 막아주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였다.
하나포 포차가 제1포대 텐트 구역 근처를 지나칠 때였다.
필두와 눈이 마주친 진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드리무어. 또 무슨 꿍꿍이라도 꾸미는 건 아니겠지.’
제1포대 본대를 미행하던 까마귀의 흔적은 7691 진지로 들어설 때 사라졌다.
더 이상 이들을 감시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진수와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필두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지만, 남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 봤자 아무런 득이 없기 때문이었다.
포반장들이 하차하자마자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방열부터 해라!”
“야간 훈련이라 생각하고 해! 철주 박을 때도 소리 내지 말고!”
“목소리는 최대한으로 줄여라.”
“박스카, 시동 꺼!”
야간 훈련의 키포인트는 소음과 빛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에 있었다.
적군에게 위치를 들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된다. 그건 병사들에게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어두운 환경에서 훈련하려니 영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