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81화
제20장. 혹한기(6)
위병소를 떠나는 제1포대 차량들.
묵직한 엔진 소리가 오늘따라 비장하게 다가왔다.
“눈길 조심하는 거, 알지?”
“잘 알고 있습니다!”
소중한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위병소 앞 작은 다리를 통과하는 일은 운전병에게 매번 고난이도 운전 스킬을 요한다.
레토나와 박스카는 사실 크게 문제가 안 됐지만, 포차는 달랐다.
덩치도 큰데다가 뒤에 155㎜ 견인곡사포까지 달고 있었기에 더더욱 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중한은 너무나도 부드럽게 그 난관을 헤쳐나갔다.
소중한의 운전 실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하나포 병사들이 일제히 감탄을 토해냈다.
“역시 중한이야! 우리 포대 수송 에이스다워!”
“저번에 그 사건은 완벽하게 극복했나 봅니다.”
소진언과 김조항의 대화가 이어졌다.
마침 이들이 하는 말을 들은 모양인지 진수가 질문을 건넸다.
“그 사건이 뭡니까?”
“아, 너는 모르겠구나. 원래 중한이가 말이다. 너 오기 전에 크게 사고 한 번 낼 뻔했거든. 그래서 훈련 못 받을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행보관님이랑 면담 한번 하더니 다시 기운 차렸더라.”
정성태 일병이 한 마디를 보탰다.
“행보관님이 또 무슨 수를 썼나 봅니다.”
“근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는 거지.”
궁금하지만 그래도 알아낼 방법이 없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러나 진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마법이라도 걸었나.’
마인드컨트롤 계열의 마법을 걸었다면 트라우마도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레디너스 대륙에서는 실제로 이런 식으로 심리 치료를 담당하는 마법사들도 존재했다.
정신계열 마법을 다루는 데에 능통한 드리무어라면 충분히 그런 수법을 사용하고도 남았다.
그래도 이것가지고 필두를 탓할 순 없었다. 생각해 보면 좋은 쪽으로 마법을 사용한 셈 아니겠는가.
‘정말 내가 아는 그 드리무어가 맞나.’
요즘 들어 이런 의심이 생길 정도였다.
물론 대화를 몇 번 주고받으면 틀림없이 드리무어였다. 하나 그간 드리무어가 보여준 행동은 예전의 그를 알고 있는 마일더로선 기행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착한 척 연기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기야. 지금은 드리무어가 아니라 강필두라는 남자를 연기하며 생활해야 했다. 드리무어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며 때를 노리는 중일 수도 있었다.
상대가 드리무어라면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언젠가 네 녀석의 그 가면, 내가 벗겨주지!’
속으로 이를 갈던 도중이었다.
포차들이 도로로 진입할 무렵, 진수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저건.’
펄럭이는 검은 날개.
필두가 소환한 붉은 눈의 까마귀였다.
때마침 성태 역시 진수와 같은 것을 목격했다.
“또 까마귀냐. 요즘 부쩍 많이 보이던데 여기에서도 보네.”
“까마귀가 많이 보입니까?”
“어. 원래 잘 안 보였는데, 최근에 꽤 보이기 시작하더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
진수는 사실 저 까마귀의 정체가 뭔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필두가 만들어낸 소환수였다.
‘감시로 붙여놓은 건가.’
모든 포대가 7691 진지에 합류하기 전까지 필두는 제1포대와 할 수 없었다.
사고가 벌어질까 봐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행보관의 소임을 내팽개치고 이들을 따라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몰라 이렇게 감시자를 붙여놓았다.
‘놔둬도 상관없겠지.’
진수 입장에선 저 까마귀의 시선이 매우 거슬리긴 했었다. 그러나 필두가 까마귀를 투입 시킨 진짜 목적은 본인을 감시하기 위함이 아닌 사건·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소환수의 낌새를 눈치채고도 방치하기로 결심했다.
희대의 악인, 드리무어.
그리고 9090대대 제1포대 행보관, 강필두.
이질감이 느껴지는 두 존재의 언행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 * *
제1포대 본대가 떠난 뒤, 필두는 행정분과 두 명, 그리고 수송분과 한 명과 함께 미리 7691 진지로 도착하게 되었다.
끼릭!
사이드 브레이크가 채워지자마자 곧장 차량에서 하차한 필두가 7691 진지를 눈으로 쭉 훑었다.
저번 3993 진지에 비해선 그나마 나아 보였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저 절벽이 자꾸 눈에 밟히는군.’
가파른 절벽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진지를 만들고자 일부러 산을 깎아내리다 만 듯한 그런 형상을 취했다.
최대한 절벽에서 멀어진 곳으로 텐트 자리를 구축하는 게 좋았다. 괜히 위에서 돌덩이들이라도 떨어지면 큰일이니까.
그러나 자리가 영 석연치 않았다.
진지 자체가 그리 큰 곳도 아니었을뿐더러 이곳에서 대대급이 취침을 취하려고 하니 자리가 부족해 보였다.
“그렇다면 저쪽으로 할까.”
진지 입구 쪽은 절벽이 없었다. 어차피 민간 차량이 자주 들락날락하는 장소도 아니고, 훈련 때나 군용차가 드나드는 것뿐이기에 근처에 자리를 잡아도 병사들의 수면을 방해할 일도 없어 보였다.
하나 필두의 계획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어이, 강필두.”
제2포대 행보관, 고정현 상사가 필두에게 다가왔다.
“설마 알파 텐트, 저쪽에다 치려는 거냐.”
“그렇다만.”
“정해진 자리 다 있는데 알파만 어딜 따로 가려고 그러냐.”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그래. 저기.”
고정현 상사가 가리킨 곳은 필두의 미간을 일그러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필두가 피하고자 했던 곳.
절벽 근처였다.
바로 밑은 아니지만, 그래도 낙석의 위험이 있었다.
“저긴 아무리 봐도 위험한 장소 같은데. 옮길 순 없나.”
“포 위치 생각하면 자리는 저기밖에 없어. 그리고 이곳 진지에 올 때마다 저기서 천막치고 잤었는데, 아직까지 사고 난 적 단 한 번도 없으니까 그냥 군말 없이 저기다가 작업해.”
“…….”
예전부터 느끼던 점이 하나 있었다.
군대는 융통성 없는 곳이다.
그것도 필두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물론 낙석을 고려해 안전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필두가 보기엔 언제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노후화되어 있었다.
저런 걸 믿고 절벽 밑에서 잠을 잔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정현은 그저 예전부터 그렇게 해왔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면서 다시 제2포대 진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본부포대와 제2포대, 제3포대를 놔두고 제1포대 혼자서 입구 쪽에 텐트를 치면 분명 아니꼬운 시선을 집중해서 받게 될 것이다.
오와 열 맞추기. 군대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별 탈이 없어야 할 터인데.’
마지못해 지정된 장소로 향하는 필두였으나 머릿속에는 불안감이 계속해서 엄습했다.
* * *
임시 진지에 도착하자마자 제1포대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신 펼친다!”
“발 조심! 발 조심!”
가신 발톱에 발등을 찍히기라도 한다면 자칫 잘못하다가 절단까지 갈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한 훈련이었다.
포병은 보병처럼 자잘하게 다치지 않는다. 부상을 당할 때에도 크게 다친다. 그래서 훈련 때만 되면 착한 선임들도 입에 욕을 달고 살 만큼 예민해진다.
“야! 강성훈, 이 새끼야! 똑바로 못하냐?”
“누가 여기다가 모의 포탄 가져놓으랬어? 정신 제대로 안 차리냐!”
“야야야! 똑바로 박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다가 대대장님 오셔서 보시기라도 하시면 뭐라고 생각하겠냐! 그딴 식으로 계속할 거라면 너희 나한테 다 뒈질 줄 알아!”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후임병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거친 언어들을 골라 사용했다.
물론 하나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헉…… 헉…….”
선임들의 압박은 후임들에게 커다란 부담감으로 작용한다.
특히나 심신이 약한 조연도에게는 이런 것들이 더더욱 크게 체감되었다.
하나 진수는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제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훈련에 나섰다.
“작키는 제가 혼자서 띄우겠습니다.”
“뭐어?”
작키봉을 들고 움직이던 정성태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냐는 식으로 물었다.
“너 혼자 띄워본 적도 없잖아.”
“그래도 가능합니다.”
“…….”
말에서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때마침 사수 자리에 앉은 채 두 후임의 대화를 듣던 김조항이 진수의 도전장을 받아주기로 했다.
“성태야. 한번 시켜봐라.”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저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때는 우리가 도중에 그만두게끔 하면 되잖아. 그리고 이런 건 한 번 혼쭐 나 봐야지. 그래야 ‘내가 괜히 까불었구나’ 하고 느낄 거 아니야.”
“김조항 상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성태와 함께 둘이서 작키를 띄우기로 했던 진수였지만, 김조항의 지시로 본인이 원하는 무대가 완성되었다.
“자, 네 마음대로 해봐라.”
“감사합니다.”
작키봉을 끼운 채 자세를 잡은 진수.
어떻게 하는지 정도는 평소에 선임들 하는 거 어깨너머로 보고 익혀뒀다.
그냥 작키봉을 잡고 좌, 우로 이동시키기만 하면 된다.
‘좋아, 가볼까.’
좌로 한 번.
중간을 거치고 우로 한 번.
이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사실 그냥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여기에 총까지 메고 단독군장 차림으로 하니까 체력 소모가 더 심했다.
포대전술훈련 때, 부상당한 정성태를 대신해 전도혁이 혼자서 작키를 띄운 전례가 있긴 했다. 그러나 이제 막 전입해 온 신병이 전도혁처럼 풀 작키를 띄울 거란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하나 이들의 예상은 점점 경악으로 바뀌었다.
쑥쑥 위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하는 155㎜ 견인곡사포.
진수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다. 거친 호흡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이윽고 마무리로 몇 번 쓱쓱 하더니, 작키봉을 빼내 정성태에게 다시 돌려줬다.
“풀로 띄웠습니다.”
“그, 그럴 리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때에는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 아니겠는가.
“줘 봐라.”
사수 자리에서 내려온 조항이 성태가 들고 있던 작키봉을 빼앗다시피 했다.
작키봉을 띄우고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
그러나.
‘안 움직이잖아?’
있는 힘을 다해 밀어봤지만, 작키봉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성태까지 나섰다.
두 사람이 있는 힘을 다해 작키봉을 밀었다. 그러나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작키봉을 밀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진짜로…… 혼자서 풀로 띄워버렸네.”
“그, 그러게 말입니다.”
성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혁이 혼자 풀작키를 띄웠다고 들었을 때에는 그러려니 했었다.
왜냐하면 전도혁이 처음에만 좀 뺑끼를 쳤을 뿐이지, 힘이라고 하면 제1포대에서도 알아주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막 전입해 온 신병이, 그것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작키 띄우기인데 이리 완벽하게 해내다니.
열등감마저 들 정도였다.
하나 당사자인 진수는 오히려 이것이 당연했다.
‘낑낑거리길래 얼마나 어려운 건가 했더니만, 이것도 그냥저냥이군.’
레디너스에서 했던 훈련에 비하면 이건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좀 더 어려운 게 있으면 했거늘.’
오히려 아쉬움을 달래듯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