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80화
제20장. 혹한기(5)
아침 해조차 모습을 내비치지 않은 칠흑 같은 새벽.
아침을 알리듯 나팔 소리가 막사에 울려 퍼졌다.
-빠바바바밤 빠바라바바빠바바.
“하아…….”
병사들의 입에서 한없이 무거운 한숨이 반사적으로 새어나왔다.
몸 전체가 피곤하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막사에서 잤다고는 하나, 훈련 도중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활동복이 아닌 군복을 입은 채 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어제는 하루 종일 눈과의 전쟁을 치렀다. 피곤하지 않다면 오히려 그게 비정상이었다.
문제는 그 비정상적인 존재가 1생활관에 있다는 것이었다.
칼같이 기상해 알아서 척척 침구류를 정리하는 한 남자, 황진수.
겨우 상반신을 일으켜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던 조항이 그런 진수를 올려다봤다.
“너, 피곤하지도 않냐.”
“안 피곤합니다.”
“진짜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남들은 피곤하다고 아우성치고 있는데 혼자서 쌩쌩하니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이제 막 대기 기간이 풀린 이등병이 이러고 있으니 더 이상했다.
본래 전입신병은 아무것도 안 해도 내무생활 눈치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감을 느끼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진수는 그런 것 따윈 없었다.
남들보다 월등히 높은 체력을 보유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부러움의 시선이 절로 꽂혔다.
물론 진수의 남은 군 생활 일자마저 부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단독군장 차림으로 사열대 앞에 모여든 이들.
아침 점호를 책임지기 위해 필두가 이들 앞에 마주 섰다.
“간밤에 잠은 잘 잤나.”
“예!”
“전체 뒤로 돌앗!”
지시에 따라 병사들이 일제히 방향을 돌렸다.
“전방에 힘찬 함성, 5초간 발사!”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늘따라 유독 목소리가 높았다.
기운이 넘쳐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평소보다 몸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온전히 악바리에서 나오는 함성이었다.
간단한 점호 식순을 마친 후, 병사들이 긴장 어린 눈으로 필두를 응시했다.
아침구보를 하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점호는 여기서 마치겠다. 세면세족한 이후에 위장크림 바르고 식사 준비한다. 아침 식사는 식당에 내려가서 먹고 바로 올라와서 이동 준비한다. 11시에 이동 준비할 예정이니 최대한 빠르게 하도록.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아침 구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가 바짝 상승했다.
이후 행정반으로 돌아온 필두가 통제관에게 별도로 지시를 내렸다.
“식사 집합은 시키지 말고 준비된 분과부터 차례로 내려보내라.”
“네, 행보관님.”
“그리고 운전병들 컨디션 체크 잘하고. 어제 눈 왔으니까 도로가 많이 미끄러울 거다. 선탑자들한테 주의하면서 운전하게끔 하라고 전해둬.”
“예.”
9090대대 전 병력이 나서서 눈을 치우긴 했으나, 아직 눈이 쌓여 있는 곳이 더러 있었다.
사고에 유의해야 했다.
첫째도 안전주의, 둘째도 안전주의다.
자칫 잘못하다가 대형 사고로 번질 수 있으니까.
* * *
하나포 포상까지 차를 몰아온 소중한 일병이 하차와 동시에 하나포 일원들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충성. 고생했다.”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 아니겠습니까. 아직 포도 안 걸었으니 말입니다.”
“하, 하긴. 그렇지.”
순간 진언이 말을 더듬었다.
포대전술훈련 당시, 중한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물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브레이크 고장 때문에 발생할 뻔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중한에게 트라우마가 될 만한 사고였다.
하나 필두와 상담 시간을 가진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포대전술훈련 때 발생할 뻔했던 사고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잊어버린 건가?’
그런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여하튼 그 사건에 관해서 함구령을 내린 필두였기에 언급 자체가 불가능했다.
설사 필두의 경고가 없었다 하더라도 구태여 중한의 아픈 기억을 콕 찌르는 말을 할 생각은 아무도 없었다. 본인이 다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야 했다.
“포는 언제 겁니까?”
“포반장님 오시면 그때 물어봐야지. 마침 오시네.”
막사 쪽에서 경쾌한 발걸음으로 포상에 도달한 하나포 반장.
“충성!”
“오냐. 포 아직 안 걸었어?”
“예. 지금 바로 겁니까?”
“어. 다른 포반도 준비 되는 대로 바로 포 걸 거니까. 우리도 미리 걸어두자.”
“알겠습니다.”
분대원들에게 그리 말을 전해둔 뒤.
그의 시선이 중한에게로 향했다.
“중한아.”
“일병 소중한!”
“너, 운전 잘할 수 있지?”
“에이. 하나포 반장님. 저 못 믿으십니까? 알파 포대 에이스, 소중한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 그래.”
하나포 반장도 인간인지라 포대전술훈련 때 벌어졌던 아찔한 사건을 안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도 본인이 이렇게 자신감을 강하게 어필하니, 포반장으로선 병사를 믿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나포를 시작으로 전포들이 포차에 포를 거는 작업을 이어가는 와중에 비전포 인원들 역시 이동 준비를 서둘렀다.
BTCS, 기상제원산출표, 교범 등 전포에 비해 자잘하게 옮길 게 많은 FDC 분과 역시 이동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BTCS부터 먼저 설치하고!”
“상원아, 위로 올라가서 위장막하고 안테나 설치해라!”
“예!”
류태만의 지시에 따라 고상원 일병이 상황실 구석에서 위장막을 꺼내 들었다.
FDC는 전포와 다르게 포차로 이동하지 않는다. 박스카라는 특수한 차량을 이용한다.
물론 이들도 마찬가지로 위장막이 존재한다. 박스카 안에는 각종 장비와 병사들이 탑승해야 했기에 위장막과 안테나는 차랑 위쪽에 별도로 설치를 해둬야 한다.
박스카 위쪽으로 올라가는 데에 성공한 고상원 일병.
생각보다 높은 위치였기에 작업하는데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큰 사고를 당할 우려가 있었다.
“위장막 올리겠습니다!”
“오냐!”
밑에서 후임들이 위장막을 올렸다. 한 손으로 위장막을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위장막을 올려놓고 우선은 안테나부터 설치했다.
곤충 더듬이처럼 위로 솟아오른 두 개의 안테나.
이것을 그대로 놔두면 안 되기에 양쪽을 눌러 눕혀둬야 했다.
조심스럽게 한쪽 안테나를 눕힌 뒤, 설치되어 있는 끈으로 안테나 끝을 고정했다.
“좋았어.”
이등병 때부터 줄곧 해왔던 작업이었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침착하게 다른 안테나를 눕히기 위해 이동했다.
그러나 찰나의 방심이 큰 사고를 일으켰다.
“엇?”
박스카 위쪽은 고상원이 생각했던 것보다 미끄러웠다.
한쪽 발이 쭉 미끄러지더니, 이내 무게중심을 잃었다.
떨어질 뻔한 위기의 순간!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우우우우웅!
엄청난 강풍이 갑자기 그를 덮쳤다.
박스카 아래로 떨어지려는 방향과 반대되는 역풍이었다.
쿠웅!
“허억, 헉…….”
고상원의 입에서 거친 호흡이 수차례 이어졌다.
방금 그 바람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밑으로 떨어졌겠지.’
꿀꺽!
절로 침이 삼켜졌다. 동시에 등에 식은땀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지를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동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겠지.”
“추, 충성!”
박스카 아래에서 행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거수경례 구호를 내뱉었다. 잠시 박스카에서 멀어져 위쪽을 살펴보기 시작하던 필두가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준비는 다 끝났나.”
“아, 아직입니다! 안테나 하나하고 위장막만 고정하면 됩니다.”
“조심해서 작업해라. 그러다가 또 떨어진다.”
“예! 감사합니다!”
“흠.”
뒷짐을 진 채 상황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필두였다.
한편.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고상원이 뒤늦게 뭔가가 이상하게 흘러감을 눈치챘다.
‘설마 행보관님께서 방금 날 보고 계셨던 건가?’
그렇다면 그 역풍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든 일투성이였다.
* * *
상황실로 향하던 필두가 살짝 뒤를 돌아봤다.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던 고상원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구슬땀을 흘리며 작업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이놈의 부대는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역풍의 정체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필두가 일으킨 마법이었다.
상황실로 향하던 도중에 때마침 그가 박스카 위에서 사고를 당할 뻔한 장면을 목격했다.
순간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마법을 발동시켜 겨우 그를 구조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필두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었다.
그냥 간단하게 주의시키는 정도로만 마무리를 지은 뒤 상황실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류태만이 한창 정신없이 이동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충성!”
필두를 보자마자 곧장 반응을 보였다.
제아무리 바쁘더라도 병사가 간부의 방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준비는 어느 정도 됐나.”
“이제 거의 마무리 되어갑니다.”
“이동 준비 끝나면 운전병한테 말해서 사열대 앞으로 차 대기시켜놓으라고 해라. 조만간 포대장님이 레토나 타고 오실 거다. 준비 끝나는 대로 바로 출발한다.”
“예, 알겠습니다!”
알파 포대 레토나가 첫 번째로, 그리고 그 뒤를 박스카가, 이어서 하나포부터 여섯포 포차들이 뒤를 따른다.
출발 순서가 비교적 빠른 위치에 있는 박스카였기에 이동 준비 상황 역시 주기적으로 체크해 둘 필요가 있었다.
상황실을 지나 행정반으로 내려올 때, 통제관이 그를 찾았다.
“행보관님. 정찰반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눈길 조심하고. 진지 도착하면 연락해라.”
“예, 알겠습니다!”
첫 번째 이동은 본부포대와 제2포대가 한 부대로, 그리고 제1포대와 제3포대가 각각 다른 진지로 자리를 잡아 방열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각 진지에서 상황조치훈련을 개시한 이후에 오후 4시에 최종 목적지인 7691 진지로 모든 포대가 집합한다. 이곳에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야외에서 취침을 하는 만큼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동상에 걸리는 병상이 없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행보관의 업무 중 하나였으니까.
통제관을 비롯해 정찰병들을 태운 포차가 먼저 위병소를 나섰다.
제1포대가 대대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부대를 떠나고, 뒤이어 본부포대와 제2포대가 함께 진지 이동을 진행하게 된다.
이동 순번이 빠른 축에 속했기에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하나둘씩 모여드는 포차들.
포대장과 전포대장이 사열대 앞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필두가 이들에게 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행보관님, 그럼 저희 먼저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포대장의 말에 필두가 말없이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필두는 이곳에 남아 행정분과 소속 병사 두 명과 함께 뒷정리를 한 뒤에 곧장 7691 진지로 향할 예정이었다.
저녁 식사 추진도 준비해야 했고, 텐트 자리도 선점해야 한다.
후발대이긴 하지만, 해야 할 일은 적지 않았다.
레토나에 오르기 직전, 포대장이 마지막을 한 번 더 필두와 눈빛 교환을 했다.
이다음부터는 7691 진지에서 서로 합류하기 전까지 필두가 뒤를 봐줄 수 없었다.
떠나는 포차들을 응시하던 필두가 오른손을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상징이기도 한 붉은 눈의 검은 까마귀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였다.
“네 역할이 뭔지 알고 있겠지.”
-까아악!
필두의 말에 대답하듯 까마귀가 크게 울부짖었다.
이윽고 저들을 향해 날개를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