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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행보관되다-79화 (79/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79화

제20장. 혹한기(4)

하나포 포상 앞.

경광봉을 든 하나포 반장이 병사들에게 작업 분담을 지시했다.

“어디 보자. 도혁이하고 성태, 너희 둘이 포상하고 막사 이어지는 길 쪽 따라가면서 눈 치워라.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은 포상 주변에 있는 눈부터 치우자.”

“예, 알겠습니다.”

하나포의 든든한 허리 라인인 도혁과 성태가 넉가래를 하나씩 들고 나섰다.

두 개의 넉가래를 나란히 붙인 뒤, 앞을 향해 밀었다.

쌓인 양이 제법 됐기에 몇 걸음만 앞으로 옮겨도 커다란 눈 덩어리가 완성되었다.

“읏차!”

뭉쳐진 눈덩이는 측면으로 따로 뺐다. 이윽고 다시 넉가래를 나란히 세운 뒤에 앞으로 전진. 이 작업을 반복했다.

하나포 포상은 여섯포와 마찬가지로 막사와 포상 간의 거리가 가장 긴 장소로 손꼽혔다. 물론 탄약고 초소와의 거리보다는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할당량이 많다는 건 변함없었다.

두 일병이 눈과의 사투를 벌이는 동안, 다른 분대원들 역시 준비를 서둘렀다.

눈삽을 들고 눈을 치우는 작업을 반복하는 병사들. 묵묵히 작업에 임하던 진수가 슬쩍 자신의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안 보는군.’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음을 재차 확인한 진수가 오른손에 마나 덩어리를 모았다.

푸른색의 마나 구체를 확인한 진수가 눈이 쌓여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사르르.

눈이 그대로 녹아내린 것이다.

단단한 얼음 덩어리조차 순식간에 녹아내려갔다. 마나 구체가 근접하는 곳마다 눈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지면에 흰색 대신 갈색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번에는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걸어갈 때마다 마나 구체의 영향을 받은 덕분인지 도중에도 눈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에게 할당된 구역을 전부 클리어했다.

‘마법을 사용하면 훨씬 쉽거늘.’

그렇다고 이 세계 주민들을 탓할 순 없었다. 이들은 애초에 마법이라는 게 판타지 세계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이조차 없는 곳에서 더 무엇을 바랄까.

순식간에 맡은 바 임무를 완료한 진수가 포상 안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스마트폰을 이용해 제설 작업 현황을 보고하던 하나포 반장이 그를 발견했다.

“응? 무슨 일이냐, 진수야.”

“제설 다 끝냈습니다.”

“뭐?”

곁에서 견인포를 점검하던 조항이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반론을 가했다.

“그 많은 걸 벌써 다?”

“네, 그렇습니다.”

“…….”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었다.

가신에서 내려온 조항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포상 바깥으로 향했다.

잠시 후.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온 조항이 한포 반장에게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표현했다.

“……완전히 깨끗하지 말입니다.”

“진짜로?”

“예. 못 믿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냐.”

제설 작업 힘들다고 대충 짜고 쳐서 넘기려고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하나포 반장이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뗐다.

마찬가지로 그 역시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다시 봐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내에 이 넓은 구역을 혼자서 다 제설했단 말인가!

이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진수가 곧장 다음 행동으로 들어갔다.

“아직 눈 쌓여 있는 곳이 많이 있던 거 같습니다. 그쪽도 제가 가서 치우고 오겠습니다.”

“어? 어…… 그, 그래라.”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충성!”

넉가래 하나를 들고서 자리를 떴다.

사실 넉가래는 그저 장식에 불과했다. 마법만 있으면 이까짓 눈 정도는 금방 없앨 수 있었으니까.

진수의 대활약 덕분에 하나포는 그 어떤 분과보다도 빠르게 제설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고작해야 전초전에 불과했다.

-아아,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도로 제설 작업해야 하니, 분과마다 한 명씩 인원 뽑아서 사열대 앞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더 큰 난관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부대 내부만 제설하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위병소 바깥도 제설해야 한다. 특히나 민간 도로와 부대, 두 곳을 연결해 주는 길도 말끔히 제설을 해둬야 한다.

이들은 포병이다. 언제든지 긴급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지체 없이 이동 준비에 들어갈 수 있게끔 완벽하게 준비를 해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도로 제설 역시 필수였다.

사열대 앞에 모여든 10명의 병사.

때마침 탄약고 초소에서 내려온 필두가 이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뭐냐, 너희들.”

“방송에서 분과당 한 명씩 모이라고 해서 모였습니다만.”

보아하니 필두가 내린 집합 명령은 아닌 듯해 보였다.

“누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병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사열대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 있었다.

통제관이었다.

“충성! 오셨습니까, 행보관님.”

필두를 보자마자 곧장 거수경례로 반응을 보였다.

“병사들 왜 집합시켰냐.”

“도로 제설하려고 모았습니다.”

“도로?”

“예. 위병소 앞 길 쪽도 제설하라고 해서 가야 할 듯합니다.”

“다른 포대보고 가라고 하면 되잖나. 안 그래도 우리 포대도 일손 부족한데.”

“서로 미루다가 저희 1포대한테 결국 떠맡긴 거 같습니다.”

“흐음…….”

대충 사정은 이해됐다.

제1포대 포대장은 짬순으로 따진다면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알파 포대 포대장보다 짬이 낮은 게 본부포대 포대장인데, 본부포대는 대대장이 직접 통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쪽에서 함부로 병력을 빼기도 힘들 터였다.

독립 포대인 찰리 포대를 제외하고 남은 포대인 알파와 브라보, 두 곳에서 도로 제설 작업 인원을 뽑아야 한다.

브라보 포대의 포대장은 9090대대 내에서도 가장 짬이 높은 인물이었다. 알파 포대장이 짬으로 비벼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얼추 알겠군.’

결국 짬으로 밀려서 본의 아니게 추가 제설 작업도 떠맡게 되었다.

그래도 여기서 병사들을 따로 빼는 건 무리가 있었다. 제설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병사들 피로만 가중될 게 뻔했으니까.

‘어쩔 수 없구먼.’

여기서는 필두가 활약을 펼쳐야 했다.

“병사들 다시 돌려보내라.”

“다시 돌려보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사람 손도 부족할 텐데. 도로 쪽 제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애들 그냥 돌려보내.”

“그, 그래도…….”

통제관으로선 당황스럽게 그지없는 명령이었다.

이제 와서 병사를 돌려보내라니.

그럼 도로 쪽 제설 작업은 누가 한단 말인가.

망설이는 통제관을 향해 필두가 재차 강요했다.

“뭐하고 있냐. 해산 안 시키고.”

“아, 알겠습니다!”

결국 마지못해 필두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병사들을 다시 돌려보내는 동안, 필두가 자신의 차량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해결하고 올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라. 30분 후에 다시 돌아오마.”

“알…… 겠습니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한 치 앞도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

* * *

차를 끌고 위병소에 도착하자 위병소 근무자들이 의아한 듯 필두를 응시했다.

그 와중에 위병소 조장 근무자가 빠르게 바깥으로 나와 필두를 맞이했다.

“충성!”

“제설 작업하러 왔다.”

“작업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무리 봐도 병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지원 병력들 도착 안 한 거 같습니다만.”

“나 혼자 할 거다.”

“잘못 들었습니다?”

그 순간, 필두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조장 근무자의 초점이 흐려졌다.

최면술이었다.

“조장실에 들어가 있어라. 근처에 간부가 오면 나에게 바로 보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터벅터벅. 다시 조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위병소 쪽으로 걸어온 뒤, 아까 했던 행동을 반복했다.

딱!

위병소 초소 선임근무자와 후임근무자도 앞서 조장의 눈동자처럼 초점이 흐려졌다.

최면을 걸어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위병소 길목에 수북이 쌓여 있는 눈과 마주하게 된 필두.

그쪽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러자 강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수 때와는 달리 눈치 볼 사람도 없을뿐더러, 제설해야 하는 양의 범위가 꽤 있는 편이었기에 아낌없이 마나를 사용했다.

‘마일더가 눈치챘겠군.’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진수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딱히 뭔가 수작을 부리거나 하려는 용도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진수도 하나포 제설 작업하는 데 마법을 사용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티를 내지 않았다.

순식간에 위병소 앞에 쌓여 있던 눈들을 완벽하게 제거했다. 이 기세를 몰아 도로로 이어지는 길까지 전부 다 녹이고 나서야 다시 위병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쯤 했으면 됐겠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뿌옇던 위병소 근무자들의 눈동자가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제설 다 끝났으니까 이만 가보마.”

“아, 네!”

“고생하셨습니다, 행보관님!”

최면을 검과 동시에 이들의 기억도 조작했다.

설정은 대략 이러했다. 타 부대에서 작업하러 나온 제설차를 필두가 인맥을 이용해 기왕 제설하는 김에 9090대대 쪽도 작업하게끔 했다. 이런 식으로 거짓 기억을 날조해 근무자들의 머릿속에 입력시켜 놨다.

10명이 넘는 병력들을 투입한 것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제설을 마쳤다.

‘이럴 땐 마법이 편하군.’

진수가 느꼈던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 * *

최종적으로 제설 작업이 끝났을 때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늦은 저녁 식사에 돌입한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특별식인 라면이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팔팔 끓는 라면 앞에 침이 꿀꺽 삼켜졌다.

다급한 젓가락질이 이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했다.

오후 8시가 되어서야 한 끼를 해결하게 된 병사들의 얼굴에는 고단함과 피곤함이 묻어나왔다. 제설 작업이 끝나긴 했지만, 이대로 훈련을 재개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었다.

결국, 대대장의 특단의 조치로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

남은 건 막사로 돌아가 샤워하고 잠을 청하는 일뿐이었다.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온수 샤워 가능하니 병력은 지금 바로 샤워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싸! 온수 샤워다!”

“내가 일등이다, 일등!”

다다다다!

병사들이 샤워실을 향해 잽싸게 튀어 나갔다.

위장크림도 말끔히 지우고, 땀의 흔적도 물기로 씻겨냈다.

저녁 11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트리스 위에 누운 병사들에게 필두가 취침 인사 겸 내일 일정을 간략히 전달했다.

“제설 작업하느라 고생 많았다. 내일 날씨 괜찮으면 다시 혹한기 훈련 재개할 거니까 그리 알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취침 소등 이후 다시 행정반으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잠시 발걸음을 돌려 바깥으로 나온 필두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은 오후 5시부터 그쳤다.

‘보아하니 내일은 멀쩡하겠군.’

날씨를 조종할 만큼의 마법 실력을 가지진 못했지만, 가까운 일자 기우 상황을 예측할 정도는 된다.

혹한기 훈련 1일차.

본래는 빠듯한 훈련 일정으로 하루를 보냈어야 했지만, 본의 아니게 그보다 더 빡센 제설 작업으로 하루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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