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69화
제18장. 체육대회(1)
체육대회 우승은 모든 포대가 간절히 원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물론 우승한 경력이 승진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포대원들의 단합력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포대장들로선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겠지?”
“예!”
대대장실에 모인 포대장들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다음 주에 열릴 체육대회를 위해 포대들은 일과 시간을 3시까지만 지정하고, 그 이후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는 종목별로 연습을 할 수 있게끔 독려하고 있었다.
대대장도 허락한 일이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우승은 어디가 했었지?”
대대장의 물음에 제2포대 포대장이 곧장 대답했다.
“저희 브라보 포대입니다!”
“브라보였군.”
“재작년에도, 그전에도 우승했습니다.”
“이번 년도까지 우승하면 3연속인가. 대단하군.”
“3관왕 차지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브라보 포대장의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기야. 세 번이나 연속으로 우승을 했는데, 기가 죽을 리 없지 않겠는가.
반면 제1포대 포대장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알파 포대의 경우에는 브라보 포대와 다르게 3연속 꼴지를 기록하고 있었다.
수치였다. 이런 성과 때문에 알파 포대는 최약체로 분리되었다.
하다못해 본부 포대라도 꺾어야 하지 않겠는가.
몸 쓰는 전포 분과가 여섯 개나 배치된 알파 포대인데 비전포들만 뭉쳐 있는 본부 포대보다 체육대회 성적이 더 안 좋다니. 이건 자존심 구길 만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알파 포대가 힘을 좀 내줬으면 좋겠는데.”
대대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인지 은근슬쩍 제1포대 포대장에게 압박감을 선사했다.
바짝 긴장한 포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는 자신 있습니다!”
“흠, 그래?”
“예, 그렇습니다!”
물론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래도 남자가 자신감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마저도 없다면 큰일이었다.
“아무튼 이번 체육대회도 열심히 준비들 해보게. 자네들한테 이미 말했지만, 우승한 포대에겐 세탁기를 증정할 예정이니까. 아, 그리고 추가적으로 하나 더.”
잊고 있었던 모양인지 대대장이 하나를 덧붙였다.
“사단에서도 이번 체육대회 우승한 포대에게 뭔가 별도로 상을 주고 싶다고 하더군.”
“사단에서 말입니까?”
사단장이 직접 대대장에게 말할 정도였으니, 얼마만큼 9090대대가 좋게 인식되고 있는지 쉽사리 알 수 있는 척도가 되었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듣지 못했지만, 세탁기 이상의 상품이 될 수 있으니 한번 열심히 해보게.”
“예,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생각지 못한 정체불명의 상품.
그 덕분에 포대장들의 의욕이 다시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포대장에게서 오늘 있었던 대대장과의 대화를 전해 들은 필두가 혼잣말을 흘렸다.
“사단에서 주는 상품이라…….”
“그게 뭔지 포대장님도, 대대장님도 모르시는 거 같습니다.”
전포대장이 그의 말을 받아줬다.
알고 있다면 필두에게도 그 정체를 전달했을 것이다. 일급 기밀문서도 아니고 체육대회 상품인데 그 정체를 행보관한테까지 숨겨 무엇하겠는가.
“아무튼 사단에서 선물을 줄 정도라고 하니 열심히 해야겠군요.”
“그래도 좀 걱정입니다.”
전포대장의 시선이 행정반 창문 바깥을 향했다.
포대장과 함께 열심히 축구에 매진하는 포대원들.
하나 그렇게까지 수준 있는 플레이는 아니었다.
“다른 포대가 워낙 강한지라…… 저희 포대가 우승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힘들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해내야지요.”
“행보관님은 자신 있으시군요.”
“자신이 아니라 실제로 우승하게 할 겁니다.”
아직 다른 포대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필두가…… 아니, 드리무어가 이곳 부대의 행보관으로 배치되면서부터 제1포대 병력들은 계속적으로 강제 운동을 당해왔다.
덕분에 이들의 체력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스포츠의 기본은 바로 체력이다. 체력이 뒷받침되면 어떠한 것이라도 잘해낼 자신이 붙는다.
이제 기술을 좀 더 손보면 된다.
종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축구, 농구, 족구, 줄다리기, 마지막으로 이어달리기.
각 종목 당 간부가 두 명씩 참가할 수 있는 독특한 룰을 지니고 있었다.
대신, 병사든 간부든 중복 참가는 안 된다.
“당직. 잠깐 그 표 좀 가져와라.”
“예, 알겠습니다.”
당직으로부터 점수 분배표를 건네받은 필두.
그의 눈이 한 장의 종이 위로 고정되었다.
[축구(1등 100, 2등 70점)]
[농구(1등 70점, 2등 50점)]
[족구(1등 70점, 2등 50점)]
[줄다리기(1등 50점, 2등 30점)]
[이어달리기(1등 100점, 2등 70점)]
‘축구, 이어달리기. 이 두 개가 가장 점수가 많군.’
2등 점수가 농구, 족구 1등 점수와 같을 정도니, 한눈에 봐도 축구와 이어달리기에 주력 멤버를 배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포대장님.”
“예, 행보관님.”
“혹시 포대장님께서 출전 멤버 다 정해두셨습니까?”
“제가 알기론 아직 고민 중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포대장님 본인은 축구 멤버로 나갈 생각이신 거 같습니다.”
‘그건 굳이 안 들어도 알 수 있지.’
속으로 전포대장의 말에 소소한 태클을 걸어보는 필두였다.
어차피 종목당 2명씩 간부가 출전 멤버로 참가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포대장이 가장 배점이 큰 축구 쪽에 욕심을 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음 같아선 포대장을 축구에서 빼고 싶지만, 그렇다고 딱히 포대장을 다른 곳에 배치할 수도 없었다.
룰은 아니지만 포대장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 모양인지 각 포대의 포대장들은 최소 한 종목에 자신의 이름을 넣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제1포대도 포대장을 어느 종목 하나에 넣어야 한다는 뜻인데…….
‘우리 포대장은 축구밖에 모르나 보군.’
그렇다면 그냥 축구 쪽에 가만히 놔두게끔 해도 무리는 없었다.
11명이 싸우는 구기 종목에서 한 명이 못한다고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최소 1. 1인분 이상은 할 수 있는 멤버들도 주전을 고르면 그만이었다.
종이를 바라보며 고민하는 행보관에게 전포대장이 재차 말을 걸었다.
“행보관님께서 직접 명단 짜시겠습니까?”
“그래도 됩니까?”
“예. 포대원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행보관님이시기도 하고 말입니다.”
사실 전포대장은 그저 명단 짜기 업무까지 도맡고 싶지 않아서 필두에게 떠넘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필두에겐 오히려 이것이 기회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짜보겠습니다.”
“포대장님한테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명단을 짤 수 있는 권한을 쥐게 된 필두.
그가 곧장 당직에게 지시를 내렸다.
“분대장들 행정반으로 집합하라고 방송해라.”
* * *
보통 분대장 일일 결산은 저녁 식사 시간 이후 일과 시간에 진행된다.
그러나 오늘의 결산은 상당히 이른 시간에 이뤄지게 되었다.
‘뭐, 오히려 이게 좋지.’
분대장, 혹은 최고선임들의 얼굴에는 그렇게까지 괴로워하는 티가 나지 않았다.
역으로 결산이 일과 시간에 이뤄지는 게 이들에겐 더 좋았다. 왜냐하면, 그만큼 개인정비시간을 아낄 수 있었으니까.
이들을 모은 필두가 하나포부터 행정분과까지 쭉 살폈다.
“다 모였나.”
“예!”
“이거 한 장씩 가져가라.”
“……?”
필두가 내민 다수의 종이.
하나포 분대장, 김조항을 시작으로 각 분과 대표가 필두의 말에 따라 한 장씩 종이를 나눠 가졌다.
종이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삼포 분대장이 입을 열었다.
“혹시 체육대회 출전 명단입니까?”
“정답이다.”
30분 동안 필두는 병사들의 모든 인적 사항을 상기시켜 최적의 명단을 짜는 데에 성공했다.
그가 짠 명단을 쭉 훑어 내리던 김조항이 작게 손을 들었다.
“말해보도록.”
“축구 쪽에 저희 신병 이름 들어가 있습니다만…… 대기기간인데 괜찮습니까?”
황진수. 그의 이름이 축구 주전 멤버에 등록되어 있었다.
“대기기간 신병도 체육대회에 참가 가능하다고 확답 받았으니 문제 될 건 없다.”
“그, 그렇습니까.”
추가적으로 더 듣고 싶은 대답이 있었다.
아직까지 그 누구도 진수의 축구 실력을 본 적 없었다.
물론 그건 필두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필두는 황진수라는 이름 세 글자를 후보 선수도 아닌 주전 멤버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끔 했다.
‘도대체 왜?’
‘그냥 아무렇게나 막 넣으신 거 아니야?’
‘차라리 병진이 넣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들어갔으면 하는 병사 이름은 진수 덕분에 주전이 아닌 예비 선수로 밀려나게 되었다.
“행보관님.”
“왜.”
둘포 분대장이 용기를 내 제안했다.
“진수보다 오병진 일병을 주전에 올리는 게 어떻습니까? 병진이도 나름 한가락 하는 병사입니다.”
“황진수가 더 잘할 거다. 그 녀석이라면 최소 5인분…… 아니, 8인분 이상은 할 터이니 너희가 걱정 안 해도 된다.”
“진수가 축구하는 모습을 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
“그런데 왜…….”
“내 말에 따르기만 하면 무조건 축구에선 무조건 우리 포대가 우승할 터이니 의심하지 마라.”
“…….”
“…….”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확신에 차 있는데 병사들이 어찌 필두에게 선처를 강요할 수 있을까.
이 이상은 무리였다.
‘망했다.’
‘축구는 지겠네.’
쓰디쓴 속내를 삼키며 다음 명단을 훑어보기 시작하는 분대장들.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이어달리기.
출전 멤버는 총 다섯 명이며, 그중 간부가 두 명이 들어가야 룰 덕분에 병사 셋, 간부 둘이 주전 멤버로 나서야 한다.
그중에서 유독 병사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름이 존재했다.
이어달리기 출전 멤버.
강필두.
“행보관님께서 직접 나가시는 겁니까?”
“보면 모르냐.”
“그렇지만…….”
병사들이 알고 있는 과거의 필두는 운동과 거리가 먼 존재였다.
그런 자가 어찌 달리기를?
게다가 포대에서 나이도 가장 많은 남자가 필두인데 과연 이어달리기에 나가도 되는 걸까?
‘행보관님이 달리기라니.’
‘다른 포대에서 엄청 비웃겠네.’
황진수를 비롯해 강필두까지.
이해가 안 되는 것투성이었다.
“포대장님께서도 동의하셨습니까?”
“본인이 축구에만 나갈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했다.”
“하, 하하…….”
과연 포대장다운 발언이었다.
본인 왈. 진정한 축구인이라 불러달라고 주장할 만큼 축구 사랑이 남다른 포대장 아니겠는가.
그래서 필두도 일부러 포대장의 이름을 축구 명단에서 빼지 않았다.
대신, 나머지 멤버들은 필두가 원하는 대로 짠다.
서로 간의 비밀 합의가 오고 간 셈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반감을 가질 자는 없었다.
간부, 병사를 통틀어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포대장과 행보관 아니겠는가.
그나마 비벼볼 상대가 있다면 전포대장이었지만, 이미 그는 행보관의 말이라면 전적으로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필두가 짠 출전 명단에 수정 따윈 없었다.
“그럼 이대로 가는 줄 알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분대장들은 속으로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이번 체육대회는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