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68화
제17장. 호된 신고식(3)
행보관실에 자리 잡은 필두가 벽 근처에 손을 뻗었다.
이윽고 그의 손 주변에 마나가 응집하더니, 벽 위에 작은 마법진을 남겼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방에 마법진들을 새겨 넣은 뒤 목소리를 높였다.
“당직!”
“상병 권병철!”
“신병들 면담할 테니까 한 명씩 불러와라.”
“예, 알겠습니다!”
행보관의 중요 업무 중 하나.
바로 병사 관리였다.
부대 관리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이 먼저다. 혹여나 병영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병사들이 나오지 않게끔 예의주시해야 한다. 그것도 간부로 중요한 책무였다.
가장 먼저 행보관실을 방문한 이는 김전일. 그 뒤를 이어 류성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에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사회에 있을 때에도 평범한 생활을 보내왔고, 가정에 문제가 있다든지 혹은 여자 친구와 최근에 입대 문제 때문에 헤어졌다든지 하는 그런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마지막에 온 남자, 황진수였다.
“……충성.”
못마땅한 표정으로 거수경례를 하는 남자, 황진수.
그를 보자마자 필두가 곧장 입을 열었다.
“문 닫고 소파에 앉도록.”
“…….”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는 건가?”
“……아닙니다.”
마일더가 드리무어의 부하는 아니었지만, 황진수는 필두의 부하다. 그건 변함이 없었다.
이계로 온 이상, 황진수라는 남자를 연기해야 하는 책무까지 부가적으로 떠맡게 된 마일더는 어쩔 수 없이 필두가 하는 말에 따르기로 했다.
문을 닫고 소파에 앉자 필두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벽에 미리 새겨놓은 마법진들이 보라색의 빛을 뽐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진수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드리무어.”
“알고 있다. 설마 내가 천하의 마일더에게 이런 어설픈 함정이 통하리라 생각할 리 없잖나.”
“역시 알고 있었군.”
“물론.”
필두는 이미 황진수의 정체가 마일더라는 점을 간파한 지 오래였다.
하기야. 진수가 너무 티를 많이 낸 책임도 있었다.
드리무어를 처음 봤을 때. 그러니까 이곳 제1포대에 자대 전입을 왔을 때 진수는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숨겼어야 했다.
어차피 보는 눈이 많았던 상황이었기에 대놓고 드리무어를 죽일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리무어를 보자마자 마일더는 자신도 모르게 이성보다 본능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그 행동의 결과가 여기까지 이어졌다.
‘최악이군!’
과거 자신의 행태에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본인이 마일더라는 것을 필두도 알게 되었으니, 당분간 그의 목숨을 노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속으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을 품는 동안 필두가 모든 마법진들을 발동시킨 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내부 소음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걸 방지하는 마법진들이다. 몇 달 전에 새겨두긴 했었는데, 잊고 있었다가 네 녀석 때문에 다시 보수했다.”
“그거 참 영광이로군.”
오히려 마일더에겐 좋은 상황이었다.
외부로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되었으니, 더 이상 드리무어에게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
드리무어로서는 아니꼬운 상황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레디너스 시절 때의 이야기가 병사들에게 들리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었다.
면담이라는 구실로 마일더를 행보관실로 호출하는 데에 성공한 필두. 마일더가 그에게 직설적으로 그 의도를 물었다.
“날 부른 이유가 뭐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확인?”
“네가 오기 전에 인위적인 마나 흐름을 감지한 게 두 번 정도 있었다. 그게 너의 소행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내가 왜 네 질문에 답해야 하지?”
“침묵으로 대신하겠다면 나 역시 말리진 않을 거다. 어차피 개인적인 호기심에 불과한 일들이니까.”
“…….”
매섭게 필두를 노려보던 진수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난 아니다.”
“네가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니란 뜻인가?”
“그때가 언젠지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난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이곳 근처에서 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다. 황진수라는 남자는 입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청주라는 지역에 살고 있었으니까.”
“그렇군.”
9090대대 제1포대는 경기도에 있는 부대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드리무어, 그리고 마일더.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자가 또 한 명 존재한다.
아니면…….
이들이 모르는 이상 현상이 발생할 징조다.
전자 아니면 후자. 둘 중 하나겠지만,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진 게 하나도 없었다.
“고작 그런 거나 물어보려고 날 부른 건가?”
“관심병사 주제에 말이 많군.”
“그러고 보니 내가 왜 관심병사지?”
“자대 전입 첫날에 이등병 따까리가 행보관한테 ‘죽어라’라고 말했는데, 관심병사가 아닌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후 사정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진수의 행동에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이곳은 레디너스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군대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게 당연했다.
“하나 더 질문하지. 이곳에 온 건 너 혼자인가?”
드리무어의 추가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진수의 입장에선 대답하기 안 좋았다.
“대답해 줄 의무가 없군.”
하나 방금의 대답을 통해 드리무어는 나름의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혼자로군.”
“다수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차원 이동이 엄청 발전한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너 한 명도 육체만 이동시키는 형식으로 해서 옮기는 게 고작일 터인데 한꺼번에 추격대 다수를 옮긴다?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야.”
“…….”
“그리고 만약 다른 추격대 멤버가 있었다고 한다면, 내 존재를 확인한 순간부터 습격이 있었어야 했지. 그러나 간밤에 습격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아직까진 너 혼자에 불과하다는 뜻이겠지.”
“글쎄. 네 녀석의 착각일지도 모르지.”
마일더도 지지 않고 심리전을 걸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심리 대결은 드리무어가 한 수 위였다.
마일더는 끝까지 부정했지만, 이미 드리무어는 확신을 내렸다.
추가 추격대원들은 없다. 오로지 마일더 한 명뿐이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마일더 혼자겠지만, 추후에 추격대가 더 올 가능성도 있었다.
차원을 이동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이제 좀 더 보안을 해 추가 인원을 보낼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전에 마일더를 죽여 두는 것도 괜찮은 일일지도 몰랐다. 드리무어의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마일더였기 때문이다.
하나이건 좀 더 고민해 볼 만한 건수였다.
‘마일더가 내 위치를 알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건, 다시 말해서 마법사 녀석들이 내 위치를 아는 데에 성공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마일더를 죽여 봤자 큰 의미는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오히려 마일더를 인질로 삼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리무어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추격대가 그를 습격하면, 여차할 땐 마일더를 방패로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살려두는 쪽으로 해야겠군.’
게다가 정면 대결을 벌여봤자 마일더를 확실히 죽일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가 언제부터 이 세계에 발을 들였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까지 본인의 힘을 회복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일더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건 드리무어에게 극심한 손해다.
그사이 추격대가 온다면 정세는 드리무어에게 급격히 불리하게 작용할 게 뻔했다.
‘복잡하군.’
마일더라는 존재의 출연이 엄청난 변수로 작용했다. 이것만으로도 드리무어에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하나 이럴 때일수록 의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일부터 수련 시간을 좀 더 늘려야겠어.’
* * *
진수와 찝찝한 상담 시간을 마친 후.
“행보관님. 병사들한테 시킬 거 있으십니까?”
포대장이 직접 필두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필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딱히 없습니다만.”
“그럼 병사들한테 축구 좀 시켜도 되겠습니까?”
“축구?”
“예. 조만간 대대 체육대회 있지 않습니까. 방금 대대장님한테 연락 왔는데, 짬날 때마다 체육대회 준비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체육대회도 상당히 중요하다.
포대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그렇지만, 체육대회에는 특별한 상품도 걸려 있다.
1등 한 포대에는 최신식 세탁기가 제공된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안 그래도 세탁기 하나가 고장 나 제1포대.
때마침 세탁기가 하나 더 필요했는데 체육대회 1등 상품으로 세탁기가 나왔으니 어떻게 해서든 이번 대회는 우승을 차지해야 했다.
하나 세탁기를 노리는 건 제1포대뿐만이 아니었다.
본부포대도, 제2포대도, 그리고 전방에 나가 있는 독립 포대, 제3포대도 모두가 다 세탁기를 노리고 있었다.
이들을 누르고 우승하기 위해서라도 연습에 연습이 필요했다.
“축구 인원들은 사열대 앞으로 집합해라!”
“예!”
기운 넘치는 포대장의 외침.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통신반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대장님. 의욕 넘치시는 건 알겠지만, 우승은 좀 힘들 거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냐.”
때마침 통신반장의 혼잣말을 접수한 필두가 그 말을 한 진의를 물었다.
그의 물음에 도리어 통신반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행보관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포대에 비해서 저희 포대가 상대적으로 체육대회 성적이 안 좋다는 거 말입니다.”
“그랬었나?”
“이런……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행보관님 사고당하셨다는 걸 잠시 잊었습니다.”
필두는 사고 이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설정이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상기시킨 통신반장이 거듭 사과의 말을 전달했다.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는 식으로 얼버무린 필두.
그의 시선이 사열대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작은 축구 골대를 놓고 포대장과 병사들이 아울러 축구 연습을 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축구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떤 스포츠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 필두가 봐도 제1포대 축구 수준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몸놀림이 너무 느려. 반사 신경도 그렇고.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포대장이군.’
의욕만 앞서지, 사실 포대장의 활약은 미비했다. 오히려 없는 쪽이 더 도움이 될 거 같았다.
그래도 포대 최고 지위를 지니고 있는 포대장이니 함부로 그에게 ‘포대장님은 좀 빠지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잘못하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가하는 격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왕 하는 거, 내 포대가 우승하는 게 기분 좋겠지.’
안 그래도 당분간은 혹한기 말고 훈련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았다.
그전에 깔끔하게 체육대회 우승 한 번 하고 세탁기까지 타가면 부대 사기를 높이는 데 큰 보탬이 되지 않을까.
마일더 건도 그렇지만, 그래도 부대 관리는 또 별개의 일이었다.
‘목표는 우승이다!’
또다시 필두의 활약이 요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