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66화
제17장. 호된 신고식(1)
신병들의 인적 사항을 하나하나씩 예의주시하며 바라보기 시작하던 강필두.
그의 시선은 진수의 개인 신상명세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와 같은 경우인가 보군.’
마일더도 드리무어처럼 영혼 없는 육체를 통해 이 세계로 차원 이동에 성공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사항이 있었다.
‘내 위치를 알고 일부러 그 근처로 차원 이동한 건가?’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추격대가 드리무어의 위치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게 되었다는 말과도 같았으니까.
‘생각보다 빨리 발각됐어. 곤란하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통제관이 행보관실을 방문했다.
“행보관님. 식사 안 하십니까?”
“생각 없다.”
저녁 식사 시간임에도 필두는 여전히 행보관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부하된 입장으로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슬며시 필두의 책상 위를 바라본 통제관이 질문을 건넸다.
“신병들 정보 보시는 겁니까.”
“그렇다만.”
“아까 들었습니다. 행보관님한테 대든 이등병 하나 있었다고 말입니다.”
“마일더…… 아니, 황진수라는 놈이지.”
무심코 진수의 본명이 튀어나왔다.
“그 녀석, 관심병사로 지정하시면 어떻습니까? 간부한테 대드는 정신 나간 놈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도혁이 녀석 있잖냐.”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지지 않았습니까? 행보관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르던 거 같습니다만. 병사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교육 좀 했으니까.”
협박이란 이름의 교육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하하! 이번에도 행보관님의 참교육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교육이라.”
일반 병사는 그게 통하겠지만, 상대가 마일더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상 그 방식은 안 통한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도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자였으니까.
진수가 보여준 마나 소드. 그것은 곧 그가 필두처럼 마나 활용을 할 줄 알게 되었음을 뜻했다.
제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적응 기간은 필요할 터. 필두조차도 이 세계에 오고 난 뒤 한동안은 마나를 다루는 수련을 계속 해왔었다.
그 말은 곧, 마일더 역시 이곳에 도착한 지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났음을 뜻했다.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마일더에게 직접 캐내면 될 텐데.’
하나 문제는 그가 쉽게 이실직고를 하지 않을 인물이란 점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시도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병력들은 식사하러 내려갔나?”
“예.”
“하나포도?”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황진수란 놈도 내려갔겠군.”
신병은 전입 이후 2주 동안 대기 기간을 가진다.
그 기간 외곽 근무를 비롯해 기타 일반 병사들이 하는 업무에선 당분간 예외 취급을 받게 된다.
물론 대기 기간이 끝난 이후에는 바로 실전으로 투입된다.
마일더도 예외는 없었다.
‘관심병사란 말이지.’
통제관이 제안했던 사항을 넌지시 떠올렸다.
과연 마일더를 관심병사로 지정하는 게 옳은 일일까?
득과 실을 따지는 동안, 통제관이 또 다른 말을 흘렸다.
“혹시 모르니 진수를 관심병사로 지정해 두고 면담을 많이 가지게끔 하는 겁니다. 그때 행보관님께서 참교육을 시켜주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면담, 그렇군.”
관심병사 지정으로 얻는 큰 득이 하나 있었다.
합법적으로 마일더와 일대일 면담 기회를 자주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들의 눈을 피해 둘만의 시간을 확보하게 된다.
“통제관.”
그를 부른 필두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나이스 아이디어.”
* * *
분대장 결산 회의를 마친 이후.
생활관으로 돌아온 김조항이 굳은 얼굴로 진수를 호출했다.
“진수야.”
“이병 황진수.”
“너, 오늘부터 관심병사다.”
“관심병사가 뭡니까?”
훈련소에도 관심병사는 존재했지만, 딱히 크게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마일더와 관심병사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훈련소에서 진수는 최우수 훈련병 표창장까지 받은 인재였다.
그러나 이곳 9090대대 제1포대에선 달랐다.
단 한 번의 실수가 너무 컸다. 병사와 간부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필두에게 한번 대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심병사로 지정되고 만 것이었다.
“도혁아.”
“일병 전도혁.”
“관심병사는 네 전문이잖냐. 네가 친절히 알려줘라.”
“하, 하하…….”
이제는 관심병사에서 탈피한 전도혁이었으나, 한때 그는 제1포대 유명 문제아였다.
그 경험을 살려 관심병사에 대해 설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소진언이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행보관님한테 직접 대들었으니, 관심병사 지정 안 되는 것도 이상하겠지.”
“덕분에 골치만 더 아파졌습니다.”
조항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분과 내에 관심병사가 있다는 건 그만큼 분대장에게도 부담 요소가 된다.
분대장 관찰일지 작성을 비롯해 기타 등등 다른 일반 분대원에 비해 신경 써야 할 요소가 배로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힘내라, 짜샤. 분대장이란 건 원래 힘든 거야.”
위로 아닌 위로를 들려주는 진언이 도리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푸른 견장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은 법. 그건 조항도 나름 각오한 바였다.
그보다 앞으로의 일이 문제였다.
“도혁아, 설명 다 끝났냐.”
“일병 전도혁. 예, 끝났습니다.”
“앞으로 네가 진수 데리고 다니면서 교육해라.”
“저 말씀이십니까?”
“왠지 너랑 죽이 잘 맞을 거 같아서 말이야.”
정성태도 있었지만, 그는 너무 FM이었다.
관심병사 후임병에게 지나친 FM 성향의 선임을 사수로 붙여두는 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도혁을 사수로 지정한 것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수의 사수가 된 전도혁.
뭐랄까. 자대 전입 첫날부터 관심병사가 된 황진수의 모습에 도혁은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 * *
저녁 점호.
오늘 하루, 당직사관을 맡게 된 삼포 반장이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했다.
현재 시간, 저녁 9시 10분.
“당직. 오늘 1생활관 통합 점호 실시할 거니까 그렇게 전파해라.”
“아, 혹시 그거입니까?”
당직 사병이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삼포반장을 응시했다.
그러자 삼포반장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물론 그거지. 신병이 들어왔는데, 곱게 넘어가면 쓰겠냐.”
“역시 삼포반장님이십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한 모양인지 짙은 웃음을 교환했다.
그러나 당직병이 눈치를 보며 초를 쳤다.
“근데 행보관님, 아직 퇴근 안 하시지 않았습니까? 보아하니 저녁 점호까지 보고 갈 생각이신 듯합니다만.”
“그러고 보니…….”
필두는 아직 행보관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의도적으로 저녁 점호까지 보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저 마일더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 새 이렇게 흘러버린 것뿐이었다.
“행보관님께서 아신다면,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
무엇을 하려는 것이기에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
삼포반장과 병사들은 알고 있었다.
신병이 들어올 때마다 벌이는 공식 이벤트 내용을.
그러나 필두는 잘 알지 못했다. 애초에 그런 쪽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으니까.
하나둘씩 1생활관으로 집합하는 병사들. 저녁 점호를 하기 위해 채비를 갖추던 도중에 때마침 필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녁 점호 시간인가?”
“충성! 예, 그렇습니다.”
“시간 참 빠르군. 오늘은 통합 점호인가 보구먼.”
“그게 말입니다…….”
삼포반장이 말끝을 흐렸다.
당직 사병과 당직병도 행보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벌이려 하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뭔데. 말해봐라.”
“신병도 들어왔고 해서 여러 가지 하려고 생각 중입니다만.”
“세족식인가?”
“그것도 있고…….”
“또 뭐가 있지?”
“장기자랑 같은 것도 있지 말입니다.”
“그런 거로군.”
필두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신병이 올 때마다 장기자랑 타임을 가진다는 것을.
사회에 있을 때 조용히 생활하다가 군 입대를 한 장병에겐 장기자랑 타임이 한없이 부끄러운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점도 있었다.
자신의 존재감을 선임들에게 잘 어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외하고도 구미를 당기는 게 하나 있었다.
‘마일더의 장기자랑이라. 재미있겠군!’
레디너스 시절 때에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 이곳에서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필두를 움직이게 했다.
“장기자랑이라. 좋군. 나도 구경하마.”
필두라면 분명 이상한 거 시키지 말라며 장기자랑은 없애 버릴 거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가 적극적으로 허가하자 삼포반장과 당직병들의 얼굴에 의외라는 감정이 어렸다.
이윽고 제정신을 차린 삼포반장이 힘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세족식부터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알았다.”
곧장 퇴근하려 했던 필두에게 이런 호재가 찾아올 줄이야.
‘진귀한 장면을 보겠군. 흐흐흐.’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 * *
세족식.
자대 전입을 처음 한 신병의 발을 각 분과 분대장, 혹은 분과 최고선임이 발을 정성스레 씻겨주는 행위를 뜻한다.
선임과 후임이 서로 상호존중하며 군 생활을 보내겠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보여주기 식을 좋아하는 한국 군대다웠다.
세족식이 끝난 뒤, 삼포반장이 곧장 목청을 높였다.
“신병도 왔는데, 장기자랑 한번 보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냐!”
“예!”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병사들의 환호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반면, 당사자가 된 세 명의 전입 신병들은 난감을 표할 뿐이었다.
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기자랑? 뭐지? 이 세계만의 새로운 군대 문화인가?’
훈련소 때에도 이런 건 없었다. 물론 퇴소식을 하기 이틀 전 밤에는 장병들의 밤이라고 해서 장기자랑을 선보이는 행사 같은 게 있긴 했었다.
그러나 생활관에서 장기자랑을 선보일 만한 일은 없었다.
‘자대란 희한한 곳이군.’
그러는 와중에 삼포반장이 신병들을 독려했다.
“신병들, 일어섯!”
간부가 직접 지시를 내리는데 어찌 배 째라는 식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마지못해 일어서는 전입 신병 세 명.
일어서니 뒤에서 키득키득 웃는 필두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들어왔다.
‘드리무어, 네놈……!’
이가 바득바득 갈리지만, 선임들이 다 모여 있는 곳에서 드리무에에게 또다시 칼을 겨눌 순 없었다. 그랬다가 전출이라도 가는 순간, 기껏 잡은 기회를 날릴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디 보자. 누구부터 해볼래?”
삼포반장이 기대감 넘치는 시선으로 신병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때, 신병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부터 하겠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섯포로 배치받은 신병, 김전일이 첫 번째를 자처했다.
그의 용기에 다른 분과 선임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 여섯포!”
“신병 잘 받았네!”
“패기 있다, 패기 있어!”
덩달아 여섯포 분대원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봤지, 우리 신병이 이 정도라고.”
“가라, 신병! 네 능력을 보여줘!”
잔뜩 상승하는 기대감.
그 와중에 진수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