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65화
제16장. 기구한 우연(2)
1생활관으로 끌려오다시피 한 황진수는 다시금 당직 사병에게 욕지거리를 한 바가지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훈련소에서 교육을 어떻게 쳐 받았기에 오자마자 이 소란을 떠냐! 게다가 간부한테 개겨? 상상도 못할 일을 잘도 저질러대는구먼!”
“아니, 그러니까…….”
진수의 입장에선 한없이 답답했다.
저자는 분명 드리무어다. 외형은 다르지만, 그가 풍기는 특유의 오라를 마일더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십여 년 가까이 그를 상대했던 마일더 아니겠는가. 외형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내면은 드리무어 그 자체였다.
드리무어 역시 황진수라는 이등병이 추격대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 소란을 피웠으니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겠나.
하나 그가 마일더라는 점까지 파악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당장에라도 행정반으로 쳐들어가서 드리무어의 목을 베야 한다! 그것이 마일더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차원 이동을 해온 궁극적인 목적 아니겠는가!
그러나 큰 문제가 있었다.
죽여야 할 대상이 바로 자신보다 한~ 참 상관인 행정보급관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일더가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이곳 군대 계급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훈련소에서 지겹도록 교육 받았으니까.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이 녀석들을 따돌려서라도 드리무어 녀석을 암살해야 하는데.’
하나 불안 요소가 하나 있었다.
마일더 역시 힘이 온전히 돌아온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직까지 드리무어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서 괜히 덤벼들었다간 오히려 역풍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기껏 잡은 기회인데, 까딱 잘못했다가 드리무어를 없애긴커녕 도리어 자신이 당해 버리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게다가 드리무어는 한참 전에 이 세계에 도착했다. 적어도 마일더보다는 본연의 능력을 많이 회복했을 터.
‘정면 승부보다 돌아서 가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어.’
방금까지는 드리무어와 직접 대면했기에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 몸이 움직였지만, 냉정히 되짚어보니 우선은 상황을 보는 게 더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숨을 고를 타이밍이다.
그러나.
“야, 대답 안 하냐?”
“네! 죄송합니다!”
우선은 이등병, 황진수를 연기해야 했다.
이등병 황진수의 자대 생활은 시작부터 삐그덕의 연속이었다.
* * *
행보관실에서 막 나온 필두가 다시 신병들을 일렬로 나란히 세웠다.
그중에는 필두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황진수도 있었다.
‘익숙한 눈빛이야.’
많이 보던 눈이었다.
추격대 중에서도 드리무어를 향해 그렇게나 호기로운 대사를 들려줄 만한 인물은 몇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한 명.
‘마일더인가.’
황진수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아차린 필두.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한편, 필두의 표정 변화를 감지한 황진수는 반대로 인상을 마구 구겼다.
‘이 녀석, 설마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건가?’
마일더는 필두를 보자마자 그가 드리무어란 사실을 바로 간파했다.
필두라고 다를 바 없었다.
원수는 원수를 알아보는 법.
“과연. 그런 거로군.”
“…….”
육성으로 들려오는 필두의 말이 유독 진수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마일더와 재회하게 된 것도 그렇지만, 지금은 앙숙 관계 청산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때였다.
우선은 신병 배치부터 해야 한다.
“통제관. TO 안 되는 분과 어디 어디 있지?”
“하나포, 삼포, 여섯포입니다.”
“그렇군.”
어차피 사격지휘, 통신, 그리고 운전병 주특기를 받고 온 신병은 없었다. 예외가 아닌 이상, 웬만하면 전포 쪽으로 신병이 배치되곤 한다.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 너.”
“이병 김전일!”
“넌 여섯포다. 그리고 너.”
“이병 류성태!”
“넌 삼포. 그리고 너.”
“…….”
마지막으로 지목당한 진수였으나, 그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대답하기 싫어하는 티가 팍팍 났다.
그러나 마일더도 바보는 아니었다. 등 뒤에서 매섭게 노려보는 선임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관등성명을 댔다.
“……이병 황진수.”
“대답이 상당히 늦군.”
“이병 황진수.”
“목소리에 힘이 없어. 군기가 빠졌구먼. 최우수 훈련병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안 건가?”
“이병! 황! 진! 수!”
굴욕감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천하의 마일더가, 그것도 원수지간인 드리무어의 부하가 되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히 없었다.
아니, 마일더에게 있어서 이건 우연이 아닌 악연이었다.
‘하필이면……!’
드리무어를 찾은 것까진 좋았으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어쨌든 지금은 평범한 이등병인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게 옳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넌 하나포로 간다.”
“……알겠습니다.”
“목소리 봐라. 사내 녀석이 힘이 없군.”
“예! 알겠습니다!”
“앞으로 그 톤, 쭉 유지하도록.”
상대가 마일더임을 알아차렸는데 드리무어가 곱게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한국의 군대는 계급이 깡패다. 그런 와중에 이등병 가지고 행보관에게 비빌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두고 보자, 드리무어!’
속으로 이를 갈며 더블백을 들어 올린 마일더.
그의 발걸음은 전포 분과들이 모여 있는 1생활관으로 향했다.
* * *
“신병 왔답니다!”
조연도가 밝은 표정으로 생활관 내에 대기 중이던 하나포 선임들에게 소식을 알려왔다.
신병 3명이 제1포대로 전입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분과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괜찮은 놈이면 좋겠는데.”
김조항이 분대장으로서 작은 소망을 입에 담았다. 하나 그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매트리스 위에 머리를 걸친 채 누워 있던 소진언이 사전에 입수한 정보 하나를 들려줬다.
“아까 행보관님한테 대들었던 그 문제아 있잖냐. 그 신병, 우리 쪽으로 온다던데?”
“헐, 정말입니까?”
“어. 아까 당직한테 들었어.”
3분의 1 확률로 꽝이 걸린 셈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황진수라고 했나?”
“왜 하필이면 그 녀석이랍니까?”
“글쎄. 그거야 행보관님이 정해주신 거니까. 일개 병사인 우리가 어찌 그분의 높은 뜻을 알겠냐.”
“흐음.”
신병 분배는 간부의 재량이다. 물론 각 분과 분대장을 불러 원하는 신병 가져가라는 식으로 분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두는 웬만하면 자신의 일은 자신이 직접 하는 편에 속했다.
신병 배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조항은 생각을 달리 먹기로 했다.
“뭐, 행보관님께서 생각이 있으시니까 저희 쪽에 배치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해는 안 가면서도 행보관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다.
그의 발언에 진언이 의외라는 식으로 바라봤다.
“너, 얼마 전에는 행보관님 하시는 거 이해 안 된다면서 투덜거리지 않았었냐.”
“제가 그랬습니까?”
“어.”
“이제부터는 행보관님 믿기로 했습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그러는 거냐.”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흠, 그래?”
굳이 상세하게 물을 생각까진 없는 모양인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행군 때, 김조항은 필두의 또 다른 일면을 봤다.
진면목이라고 할까.
겉으로는 까칠해 보여도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병사들을 믿어주고 생각하는 간부임을 알아차리게 된 김조항은 그 날 이후부터 필두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방금 그가 들려준 발언은 그 결과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담을 나누는 동안 전도혁과 정성태가 각각 더블백, 군장 하나씩을 각각 짊어진 채 등장했다.
그 뒤를 따라오는 이등병 하나.
황진수였다.
“읏차!”
군장과 더블백을 내려놓은 뒤, 도혁이 연도를 찾았다.
“이 녀석 생필품에 이름 좀 써줘라.”
“예, 알겠습니다.”
보급품 관리 역시 병사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였다.
공동생활체인 군대에서 자기 물품임을 구분 짓고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주기는 반드시 해둬야 했다.
더블백을 까자 아직 뜯지 않은 보급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와, 이 제품. 신형 나왔구나.”
소진언이 금세 관심을 뒀다.
김조항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속옷과 새로운 활동화, 그리고 새로운 활동복 등등.
2년 내내 사용했던 소진언의 보금품들과는 다르게 온전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소진언을 곁눈질로 바라본 김조항이 작게 경고했다.
“소진언 병장님. 탐난다고 신병 물건 마음대로 가져가거나 하면 안 됩니다.”
“알고 있어, 임마. 그리고 나, 조만간 전역한다. 사회 나가는데 보급품이 욕심날 리가 있겠냐.”
오히려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한편 5주 가까이 훈련소에서 군 생활을 보냈던 진수로선 자대라 하더라도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확실히 시설 하나는 좋은 거 같군.’
시설도 시설이었지만, 훈련병과 가장 큰 차이점이 존재했다.
자유가 있고 없고 였다.
훈련병 시절 때에는 PX도, 그리고 전화도 마음껏 사용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자대에 오고 나서는 모든 것이 자유였다.
심지어 TV도 볼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꿈같은 환경이란 말인가.
물론 개인정비시간에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하나 이것들은 진수에겐 딱히 필요 없었다.
TV를 본다 하더라도 그저 ‘신기한 상자로군.’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PX는 아직 제대로 이용해 보지 않았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먹을거리가 많은 곳이란 것밖에 몰랐다.
그래도 욕심이 나진 않았다. 마일더의 목적은 오로지 드리무어를 처리하고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드리무어를 암살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그런 생각만 가득할 무렵, 진언의 눈이 그의 전신을 훑었다.
낌새를 눈치챈 진수가 그를 마주 봤다.
“저한테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딱히 그런 건 없고.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무엇입니까?”
“행보관님 보자마자 대든 이유가 뭐냐?”
“그건…….”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필두와 진수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많은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왜 황진수는 드리무어에게 대든 걸까.
“사람을 착각했습니다.”
“착각?”
“실은 저에겐 사명이 있습니다. 국가를 지키는 것. 그리고 국민들을 지키는 것. 그것을 파괴하는 원수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그자가 행보관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
“…….”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그렇구나.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뭐, 뭐시더냐. 그 원수를 죽이는 것이 너의 사명이라고?”
“예.”
“으, 으음.”
“…….”
담담히 말을 이어가는 진수였으나, 그를 보는 선임병들의 표정은 대략난감했다.
솔직히 말해서 진수의 말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긴 힘들었다.
국가고 국민이고 원수고 나발이고. 그게 다 뭐란 말인가.
하나 이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 녀석…….’
‘……오자마자 관심병사 지정되겠구먼.’
진수의 앞날이 빤히 보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