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64화
제16장. 기구한 우연(1)
드리무어 추격대를 총괄하던 남자, 마일더.
지난 십여 년간 마일더는 드리무어의 숙적으로 불리며 동시에 희대의 악인과 맞서 싸우는 정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눈앞에서 드리무어를 놓치는 대참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차라리 차원의 틈에 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라도 확인되었다면 참으로 좋았을 텐데.
문제는 드리무어의 기척이 이계를 통해 전해졌다는 것이었다.
결국 마일더는 마법사 길드와 오랜 논쟁 끝에 그간 금지되었던 차원 이동 마법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자는 쪽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이후 반년 만에 드디어 차원 이동의 기회가 열렸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
“드리무어 때도 그랬지만, 육체까지 온전히 보전해 이계로 넘어가는 건 아직까진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체는 잠시 이곳에 놔두고, 영혼만 그곳으로 넘기는 수밖에요.”
위험한 일이었다.
마법사 길드의 수장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마일더에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러나 마일더의 의지는 확고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위험합니다.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는데…….”
“드리무어만큼은 직접 제 손으로 죽여야 합니다. 그것이 저의 사명이자 살아가는 목적이니까요.”
“……알겠습니다. 마일더 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군요.”
결국 극단적인 결론을 내린 마일더는 자신이 직접 차원 이동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후 수십 일이 지난 후. 차원 이동 직전에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듣게 되었다.
“차원 이동 이후에 당분간은 서로 교신할 수 없을 겁니다.”
“당분간이라면, 혹시 나중에는 가능합니까?”
“예. 하나 마일더 님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난 뒤에야 교신이 가능할 듯합니다.”
이 넓은 차원에서 마일더라는 존재를 찾아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수십 년도 더 걸릴 작업이 될지도 몰랐다.
다시 말해서, 이계로 넘어가면 마일더 혼자서 드리무어를 상대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뜻했다.
그러나 마일더는 두렵지 않았다.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바라던 바입니다.”
“드리무어의 위치는 알아냈습니다. 최대한 그곳 근처로 차원 이동을 시전할 터이니 그리 알아두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굳은 결심과 함께 천천히 눈을 감는 마일더.
이윽고 눈을 뜬 순간, 그의 시야에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여긴…….”
하얀 천장.
벽도, 그리고 누워 있는 침대도, 이불도 전부 다 흰색이었다.
온몸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심각한 부상을 당했음이 느껴졌다.
‘내가 왜…….’
눈을 뜨는 순간, 놀란 간호사가 의사를 호출했다.
“황진수 씨. 정신이 좀 드십니까?”
‘황진수? 아아…… 이자의 이름인가.’
드리무어와 다르게 마일더는 대충 자신이 어떤 형태로 차원 이동을 하게 될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침착성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황진수. 이미 사망 판정을 받았기에 영혼 없는 육체가 되고 말았다.
그 육체를 대신 사용하게 된 마일더는 황진수로 생활을 하면서 천천히 이 세계에 적응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적응하기도 잠시 뒤.
“부대~ 차렷!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롓!”
“충! 성!”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군입대를 하고 말았다.
* * *
‘여기가 이계의 군대인가.’
신기한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건 총이라는 무기였다.
레디너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화력 무기였다.
게다가 살상력 역시 뛰어났다.
‘이거 몇 개만 있어도 어마어마하겠군!’
대륙을 정복하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육체마저 온전히 보전하기 힘든 차원 이동에 총까지 가져간다는 건 사실상 무의미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것보다 마일더에게 주어진 큰 임무가 있었다.
‘드리무어, 도대체 어딨지?’
입대 첫날.
난생 처음으로 겪게 될 군대 문화에 두려워하는 장병들과 다르게 마일더의 눈에는 의욕이 잔뜩 깃들어져 있었다.
마법사들의 말에 의하면, 드리무어가 있을 거로 확인된 좌표로 차원 이동을 해주겠다고 했었다.
그 말인즉슨.
‘어쩌면 이곳에 드리무어가 있을지도 몰라!’
드리무어도 마일더와 다른 외견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찾기란 쉽지 않을 터.
그러나 그 점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마법이라는 존재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건물 주변을 맴돌기 위해 바깥을 나설 때였다.
“야! 어딜 나가!”
빨간 모자를 쓴 조교가 마일더의 행보를 막아섰다.
“막사로 안 돌아 가냐!”
‘건물 출입도 마음대로 못하는 건가.’
여러모로 불합리한 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이계의 군대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독단적인 행동에 임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우선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자. 그것이 마일더가 내린 판단이었다.
훈련소 생활 2주차에 접어들 무렵.
‘드디어 실탄을 쏠 수 있는 건가!’
내심 기대했던 실 사격 차례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 사격을 하기 위해선 크나큰 난관이 그를…… 아니, 훈련병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PRI 실시한다!”
소위 말해서 피 터지고 알 배기고 이 갈린다는 그 훈련, PRI가 훈련병들을 사정없이 괴롭혔다.
“100사로 봣!”
“250사로 봣!”
“자세 똑바로 안 하냐!”
“25번 훈련병! 총구 흔들리잖아! 한 번만 더 그랬다가 열외로 뺀다!”
훈련병들의 입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마일더는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군인으로 커왔다. 비록 육체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정신력은 마일더의 것 그대로였다.
게다가 입대 전에도 사전에 틈틈이 육체를 강화시키는 운동을 해왔기에 잔 근육도 제법 생겼다.
하나 머릿속에는 이런 의구심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왜 이런 훈련을 시키는 거지?’
그는 사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냥 가서 총 쏘라고 하면 되지 않나. 근데 구태여 불필요한 자세를 마치 얼차려처럼 반복하는 이 행태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웠다.
PRI가 끝나고, 마일더가 그토록 기대하던 실 사격 훈련이 시작되었다.
타아앙!
방아쇠를 당겼을 뿐임에도 멀리 있던 표적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역시 굉장해!’
자신이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아니, 그 이상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그 이후, 더 놀라운 훈련이 마일더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수류탄 투척 훈련이었다.
퍼어어어엉!
엄청난 폭음이 병사들을 강타했다.
‘총과 비교도 안 될 만큼이군!’
그에게 있어서 이계의 군대는 놀라움의 연속 그 자체였다.
하나 다른 병사들은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훈련을 즐겁게 받는 마일더가 미친놈처럼 보일 정도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훈련소를 통과한 마일더. 아니, 황진수.
본의 아니게 우수 훈련병 표창까지 받게 되었다.
“자대에 가서도 훈련소에서 보여줬던 그 자세, 변치 말도록.”
“감사합니다!”
모든 훈련 일정을 마치고 퇴소만을 기다리는 병사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드리무어를 찾기 위해 움직였던 황진수였지만, 결국 훈련소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드리무어는 마일더가 이곳으로 넘어온 목적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찾아낼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와중에 같은 생활관을 사용했던 훈련병이 그에게 다가왔다.
“진수야. 넌 어느 부대냐?”
“부대?”
“자대 말이야, 자대. 아까 퇴소식 끝나고 자대 어디로 갈지 알려줬잖아.”
“그랬었지.”
퇴소식이 끝난 이후에 훈련병들은 본인들이 각자 향할 자대가 적힌 쪽지를 배급받았다.
아까 확인해 보긴 했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쪽지를 펼쳐 들었다.
그곳에는…….
9090 대대라는 명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 * *
‘포병인가.’
9090대대 제1포대로 향하는 길.
도중에 배치된 155㎜ 견인곡사포가 마일더의 시선을 빼앗았다.
‘이계는 참으로 희한한 곳이군.’
총도 그렇고, 수류탄도 그렇고.
강력한 화기가 발전한 곳이었다.
대신, 마법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게 불편한 점이긴 했다.
인사과로부터 연락을 받고 내려온 당직 사병의 뒤를 따라 이동하는 신병들.
그러던 도중에 당직 사병이 으레 겁을 줬다.
“우리 포대는 행보관님이 엄청 무섭다고. 그러니까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신병들이 바짝 군기에 잡힌 채 대답했다.
더블백을 짊어지고서 행정반에 발을 들였을 때였다.
순간, 마일더가 본능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감지했다.
‘이건?’
틀림없다.
드리무어의 오라다!
빠르게 그 오라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순간, 필두가 그의 앞에 마주 섰다.
“이 녀석들이 신병인가?”
“예, 행보관님.”
필두를 보자마자 마일더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찾았다!’
오래된 숙적.
드리무어와 마일더의 재회가 성사되었다.
* * *
“드디어 찾았군, 드리무어.”
드리무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강필두의 눈에 강한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필두의 본명을 아는 이가 존재한다는 건…….
다시 말해서 레디너스에서 넘어온 ‘추격대’임을 뜻했다.
그러나 황진수라는 남자는 처음 봤다.
애초에 자신을 쫓던 추격대들은 동양인보다 서양인의 외형에 가까웠다.
‘추격대 안에 이런 자가 있었나.’
필두도 모든 추격대 인원들의 얼굴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분명 그가 모르는 자들도 존재할 터.
아니면.
‘나 같은 경우일지도 모르겠어.’
드리무어처럼 영혼만 이계로 넘어왔을 확률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볼 만한 것들에 불과했다.
눈앞에 닥친 위기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죽어라!”
마나 소드의 날을 세운 진수가 빠르게 쇄도했다.
필두 역시 반격을 가하기 위해 캐스팅에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빠아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진수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바로 뒤에선 슬리퍼를 든 채 서 있던 당직 사병이 황진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새끼를 다 봤나! 행보관님한테 무슨 막말을 하고 있냐!”
“저 녀석은 희대의 악인인 드리무…….”
“신병 나부랭이 새끼가 쳐 돌았나? 죄송합니다, 행보관님. 신병 교육 똑바로 시키겠습니다!”
“…….”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곳은 레디너스가 아니었다.
군대다.
게다가 운이 좋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추격대원의 신분은 이제 막 제1포대 전입을 명받은 이등병.
그가 죽이려고 하는 대상은 이 부대에서 포대장 다음으로 2인자라 할 수 있는…… 아니, 실질적 1인지라 불리는 행정보급관이었다.
이등병과 행보관. 이 두 존재를 어찌 감히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진수의 무례함에 선임병들의 눈이 뒤집어질 만도 했다.
결국 당직 사병과 당직병에게 잔소리 폭탄을 받게 된 의문의 추격대원.
얼굴에는 억울하다는 감정이 잔뜩 묻어 나왔지만, 필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설마 행보관이라는 계급이 내 목숨을 지켜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기구한 우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