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63화 (63/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63화

제15장. 야간 행군(6)

제2포대 병사 세 명 중 하나의 군장이 군용 물품 대신 종이박스로 채워져 있었다.

소위 말해서 가라 군장이었다.

만약 그 상태에서 사단장에게 군장 검사를 당한다면, 어떤 후폭풍이 불어 닥칠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가라 군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당사자인 제2포대 병장, 오병하와 투시 마법으로 군장 내용물을 살핀 강필두뿐이었다.

점점 굳어지는 오병하의 얼굴. 그러나 밤이라 그런지 다른 간부들은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한편, 먼저 군장 검사를 받은 조연도와 장진화는 사단장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완벽하군. 교본 그대로야!”

“감사합니다!”

조연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장진화는 필두에게 이미 한번 가라 군장 때문에 걸린 전례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이등병보다도 더 FM으로 완벽하게 군장을 꾸렸다.

사단장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 했던가. 이등병뿐만 아니라 병장도 정직한 FM 군장을 꾸렸다는 사실이 사단장에게 감동을 심어줬다.

그러나 그 감동은 시한부에 불과했다.

‘저 군장이 문제로군.’

필두의 시선이 오병화 병장의 발밑에 있는 군장 쪽으로 향했다.

저것만큼은 결코 사단장이 보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는 동안, 사단장의 군장 검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음 차례는 전도혁과 제2포대 소속 일병 권민수.

두 명의 병사가 그다음 바통을 이어받아 군장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이번 콤비도 무사히 통과.

이제 남은 건…….

‘젠장, 망했다, 망했어! 어쩌지?’

오병화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러다 못해 파랗게 질리는 지경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자 브라보 포대장이 경고했다.

“정신 사납다. 가만히 좀 있어라.”

“포, 포대장님!”

“왜.”

“그, 그러니까 그게……!”

차마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조가 군장을 다 꾸리면 이제 사단장의 다음 표적은 오병화의 가라 군장이 될 터였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내야 한다!

이건 한 병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포대가…… 아니, 9090 대대 전체가 박살이 날지도 모르는 차원의 문제였다.

물론 그건 필두도 잘 알고 있었다.

9090 대대가 안 좋은 평가를 듣는다는 건 다시 말해서 필두 역시 좋은 소리 못 듣게 된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도 했다.

“…….”

필두가 슬그머니 제1포대 포대장을 바라봤다.

‘응?’

시선을 눈치챈 포대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필두가 자신을 쳐다보는 걸까?

사단장이 바로 근처에 있어서 직접 말은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사단장님 시선 좀 끌어주시기 바랍니다.’

“엇?”

포대장이 절로 헛숨을 삼켰다.

분명 필두는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머릿속에 선명히 울렸다.

포대장의 반응에 간부들의 이목이 일시적으로 집중되었다.

“자네, 왜 그런가?”

“아, 아닙니다!”

대충 얼버무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필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전음이었다.

‘브라보 포대에 가라 군장이 하나 섞여 있습니다. 어떻게든 해야 합니다.’

‘가, 가라 군장……!’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의 정체는 고사하고, 가라 군장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사단장이 보는 앞에서 가라 군장이 들통 나는 순간, 9090 대대는 끝이라 봐도 무방했다.

‘어떻게 시선을 끌지?’

머리를 굴리는 동안, 필두 역시 행동에 임했다.

앰뷸런스 앞에 놓인 완전 군장 하나를 몰래 끌어왔다.

이제 포대장이 사단장의 시선만 끌어주면 된다.

“…….”

“…….”

필두와 포대장이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그사이, 사단장이 마지막 남은 병사 두 명에게 명했다.

“거기도 군장 까보도록.”

“아, 알겠습니다!”

오병화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켰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오병화의 군장이 가라 군장임을 안 이상, 포대장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때, 발밑에 자그마한 빙판이 있음을 깨달은 포대장.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포대장이 이 한 몸 불사르겠다는 각오를 굳혔다.

“으아악!”

제아무리 사단장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들려오는 포대장의 비명을 무시할 순 없었다.

이후 콰당! 소리와 함께 포대장이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뭔가, 자네.”

“죄, 죄송합니다! 빙판길에 넘어졌습니다!”

“괜찮은가?”

눈앞에서 발생한 부하의 부상에 걱정이 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빙판길이라 하더라도 발바닥 크기밖에 되지 않은 얼음판에 불과했다. 물론 부주의하면 넘어질 가능성도 있지만, 설마 사단장이 군장검사 하는 와중에 이런 사건이 발생할 줄이야.

그러나 사단장 관심 돌리기에는 성공했다!

‘지금인가!’

이 틈을 놓칠세라 필두가 빠르게 완전 군장을 집어 들었다.

이윽고 오병화에게 다가갔다.

“이 군장 써라.”

“구, 군장 말씀이십니…….”

“아가리 다물어라. 가라 군장 들통 나기 싫으면 내 말대로 해.”

“…….”

“이건 필요 없겠지.”

오병화의 가라 군장을 최대한 멀리 발로 뻥 차버렸다.

가벼워서 그런지 멀리, 그리고 잘도 굴러갔다.

한편 제1포대 포대장에게 집중되었던 간부들의 시선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어디 보자. 자네 둘이었나?”

“예, 그렇습니다!”

“군장 풀어보도록.”

“네!”

제2포대 병사 두 명이 빠르게 군장을 풀었다.

이미 가라 군장과 완전 군장을 바꿔치기했다. 적어도 사단장에게 욕먹을 일은 없었다.

필두의 의도대로였다.

모든 군장 검사를 마친 사단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아! 군장도 완벽하군!”

사단장이 뒷짐을 진 채 대대장에게 말했다.

“병사들 표정도 좋아 보이고, 문제도 딱히 없는 거 같군. 확인 다 했으니 이만 슬슬 돌아가도록 하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천만에. 대대장이야말로 행군 무사히 끝나길 기원하네.”

“예! 충성!”

대대장의 얼굴에 감개무량함이 묻어나왔다.

동시에 안도라는 감정도 섞여 있었다.

사단장이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대대장의 마음은 한없이 불편했다. 그런데 드디어 사단장이 알아서 떠나주겠다고 말을 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대대장이 사단장을 배웅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 사이, 제2포대 행보관 고정현 상사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군장 하나를 발견했다.

“뭐냐, 이거.”

“그게 말입니다…….”

오병화 병장이 말끝을 흐렸다.

망설이는 태도에 고정현이 짜증을 냈다.

“알고 있으면 말하면 되잖냐.”

“실은…… 제 군장입니다.”

“네 군장? 저게 네 군장 아니냐?”

그렇게 말하며 군장을 들어 보이는 고정현 상사.

순간,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가볍다. 너무나도 가볍다!

굳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 군장이 종이 박스로 가득 찬 가라 군장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동안 강필두가 그에게 다가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단장님한테 가라 군장이라는 거 들키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서서 바꿔치기했다. 걸리는 것보다야 훨씬 좋지 않나.”

“…….”

“그보다 군장 검사도 제대로 안 했군.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어. 앞으로 좀 주의하도록.”

“뭐, 뭐라고?”

“왜. 더 할 말 있나?”

“…….”

있을 리가 없었다.

고정현은 본의 아니게 필두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

필두의 말마따나 거기서 가라 군장의 정체가 들통 났더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분명한 건 필두 때문에 이 위기를 극복했다는 것이었다.

두 행보관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던 포대장들의 얼굴도 제각각이었다.

“미안하다. 우리 때문에…….”

제2포대 포대장이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제1포대 포대장은 그저 머쓱 웃을 뿐이었다.

* * *

사단장의 방문 이후에도 계속 야간 행군을 이어가는 9090 대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길었던 야간행군도 이제 거의 끝을 앞두고 있었다.

남은 행군 거리는 고작해야 3.8㎞!

“조금만 더 힘내면 된다! 파이팅!”

“파이티이잉!”

포대장의 선창에 따라 병사들도 힘찬 함성을 내질렀다.

조연도 역시 젖 먹던 힘까지 전부 끌어모아 마지막까지 행군 대열에 참가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무거운 걸음을 재촉할 때.

“위병소다!”

저 멀리서 9090 대대 위병소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병사들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고지가 바로 코앞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렇게나 무거웠던 발걸음이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하나둘씩 위병소를 통과하자 병사들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드디어 끝이구나!”

“해냈어, 해냈다고!”

기뻐하는 병사들과 달리 간부들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주의를 기울였다.

“막사 들어가서 취침하기 전까지 훈련이다. 그걸 잊지 마라.”

“예!”

대대 연병장에 나란히 정렬한 병사들.

이들 앞에 마주 선 대대장이 대단히 만족스러운 눈빛을 했다.

“사단장님께서 행군 정말 열심히 한다고 칭찬에 칭찬을 들려주셨다! 오늘 하루, 다들 정말 고생 많았다! 이후에는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 줄 테니 가서 푹 쉬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이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가.

드디어 막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연도의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했다.

그 순간, 그를 부축해 준 인물이 있었다.

행보관 강필두. 그가 조연도의 방탄모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힘들었을 텐데 고생 많았다.”

“행보관님 덕분입니다! 용기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조연도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는 입대 이후 난생처음, 행군을 완주했다.

* * *

무사히 행군을 마친 9090 대대.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가 이어지나 싶더니, 점심 식사 이후 긴급 소식이 전해졌다.

“특종입니다, 특종!”

당직 사병이 행정반 안으로 뛰어들어오며 외쳤다.

한편, 업무를 처리하던 필두가 살짝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뭐가 이리 소란스럽냐.”

“죄,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신병 온다고 합니다!”

“신병? 우리 쪽으로 배정되기로 했었나?”

“인사과에서 갑작스레 결정한 모양인가 봅니다.”

“흠, 그렇군.”

신병이 들어온다는데, 구태여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천만에 가뜩이나 인력난에 허덕이는 155㎜ 견인곡사포 포대다.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소문의 신병이 제1포대 행정반에 도달할 때까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직 사병이 데려온 신병은 도합 세 명.

‘꽤나 힘 좀 쓸 것 같은 덩치들이군.’

이번 신병들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특히나 황진수라 이름 적힌 전투복을 입은 병사의 눈빛은 한없이 날카로웠다.

뭐랄까. 마치…….

‘나를 노리는 건가?’

그 눈빛은 필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왜 진수는 필두를 노려보는 걸까?

그런 의구심이 들 무렵이었다.

후우웅!

갑자기 진수의 오른손에 푸른 광선검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필두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나 덩어리였다.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마나 소드를 필두에게 겨눈 황진수.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찾았군, 드리무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