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59화 (59/175)
  •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59화

    제15장. 야간 행군(2)

    행군의 아침이 밝았다.

    일정 자체가 야간에 진행될 예정이었기에 오전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 점호가 시작되었다.

    “전방에 힘찬 함성, 5초간 발사!”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늘도 변함없이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으로 하루를 맞이했다.

    뒤이어 국군도수체조를 비롯해 아침 구보까지. 점호가 끝난 후에 병사들이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세면세족에 돌입했을 때, 필두의 차량이 제1포대 사열대 앞에 정차했다.

    “충성!”

    “충성.”

    병사들로부터 거수경례를 받으며 행정반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평상시와 같은 아침 일정이라 하더라도 오늘은 좀 달랐다.

    저녁 6시 이후부터 야간행군이 시작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부사관들 다 출근했나.”

    “예, 행보관님.”

    “한 명도 빠짐없이 행보관실로 집합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어제 당직이었던 통제관이 당직들을 시켜 부사관들을 호출했다. 10분 이내에 전원 집합한 부사관들을 한 번씩 훑어본 필두가 행군에 대해 언급했다.

    “오늘 사단장님 오신다는 거, 머릿속에 항상 인지하고 병사들 잘 통제하도록. 특히나 부상 여부에 대해 많은 신경을 써라. 조금이라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병사가 있으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고.”

    “예!”

    행군 전원 완주도 좋지만, 그것을 빌미로 컨디션 난조를 겪는 병사를 억지로 독려해 부상까지 이끌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단장이 보는 앞에서 심각한 부상자가 속출하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부사관들에게 신신당부를 한 이후에 다시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사이, 포대장이 행보관실을 방문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행보관님. 행군 준비는 잘 되어갑니까?”

    “예. 걱정 없을 거 같습니다.”

    어제저녁에도 미리 행군 코스를 돌아봤던 필두였다. 여전히 드문드문 빙판길이 있었지만, 행군에 방해를 줄 만한 정도까진 아니었다.

    야간 산행 시 들짐승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걱정만 빼고는 평탄한 행군이 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행보관실 구석에 놓여 있는 군장을 보자마자 포대장이 곧장 물었다.

    “혹시 행보관님도 군장 매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구태여 그렇게까지 않으셔도 되는데…….”

    포대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대 행보관까지 FM 군장을 매고서 행군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필두는 과거에 큰 사고를 겪기도 하지 않았던가. 포대장 입장에선 후유증 때문이라도 걱정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필두의 의지는 확고했다.

    “병사들도 군장 짊어지고 가는데, 상사인 제가 맨몸으로 행군하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필두의 뜻을 존중하기로 마음을 굳힌 포대장이었다.

    필두라면 본인이 알아서 제 일 정도는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군장 매고 가다가 영 안 되겠다 싶으면 융통성 있게 잘 처신하리란 믿음이 있기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이미 FM 군장은 여러 번 경험해본 강필두였다. 가벼운 무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레디너스 시절 당시 들고 다녔던 배낭에 비해서는 훨씬 가벼운 편이었다.

    물론 마법을 사용해서 무게 감소도 시킬 수 있었지만, 운동을 겸하고 싶었기에 그냥 FM 군장을 매고 가기로 했다.

    행보관인 강필두마저 군장을 들기로 한 덕분에 제1포대는 의도치 않게 병사, 간부 예외 없이 전원이 다 군장을 짊어지고 행군에 임하게 되었다.

    이것이 사단장에게 큰 영향을 줄 거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계급을 떠나 모두가 다 동등한 조건으로 훈련을 받는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5시. 이른 저녁 식사를 끝낸 병사들이 각각 군장을 챙겨 사열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하나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대장인 김조항 상병 뒤에 낑낑거리며 군장을 내려놓은 하나포 소속 이등병, 조연도가 피로에 가득 찬 한숨 소리를 내었다.

    그는 하나포…… 아니, 제1포대를 통틀어 가장 체력이 없는 후임급 병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다음 달에 일병 진급 시험을 앞두고 있지만,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통과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벌써 힘든 거 같습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앓는 소리 하면 안 되지. 기운 차려라.”

    그를 격려해 보지만, 그래도 김조항 역시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선 이 녀석은 안 될 거 같으니까 행군 훈련에서 열외 시키자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족한 체력은 운동을 통해 메워가는 편이 조연도의 남은 군 생활을 위해서라도 옳았다.

    본인 역시 행군 참가에 강한 의욕을 보였기에 구태여 말리진 않았다.

    의욕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과도한 의욕 때문에 얼마 전, 정성태처럼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행군 도중에 영 못하겠다 싶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라.”

    “예, 알겠습니다.”

    조연도에게 그렇게 말을 한 뒤, 김조항이 전도혁에게 손짓했다.

    자기 쪽으로 오라는 신호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김조항 상병님.”

    슬쩍 조연도의 눈치를 본 김조항이 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를 냈다.

    “행군할 때, 네가 연도 뒤에 붙어서 가라. 보고 있다가 녀석이 힘들어하는 기색이 심해지면 바로 나한테 와서 말해주고.”

    조연도는 체력은 부족하지만, 근성 하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은 이등병이었다.

    괜히 의욕을 앞세워 무리라도 하는 순간,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사단장도 온다는데 괜히 자신이 이끄는 분대에서 부상자가 나오기라도 하면 간부들에게 어떤 쓴소리를 들을지 감도 안 잡혔다.

    전도혁도 눈치가 전혀 없진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부탁하마.”

    정성태와 더불어 하나포의 든든한 허리로 군림하게 된 전도혁. 그라면 믿고 맡길 만했다.

    하나포를 비롯해 다른 분과들도 마찬가지로 후임 챙기기에 집중했다.

    특히나 자대 행군을 처음 해보는 이등병들이 있는 분과들은 더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러는 동안, 필두가 사열대에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 주목.”

    “주목!”

    “10분 뒤, 대대 연병장으로 집합할 거다. 그전에 너희에게 다시 한번 확인 차원에서 묻겠다.”

    병사들 앞에 놓인 군장들을 뚫어져라 응시한 필두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가라로 군장 꾸린 놈, 거수해라.”

    “…….”

    “…….”

    “…….”

    병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사단장이 와서 군장 검사를 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꺼내며 병사들에게 겁을 줬던 필두였지만, 그래도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한 놈쯤은 가라 군장을 고집했을 것이라고.

    그러나 병사 중 누구 하나 손을 드는 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 전부 FM 군장이라는 것을 뜻했다.

    “정말로 없나?”

    “없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를 들려주는 병력들.

    그때, 필두가 마나를 모았다.

    이윽고 마나의 기운이 그의 두 눈에 어리더니, 동공색이 푸른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투시 마법이었다.

    군장 안에 든 내용물이 무엇인지 직접 까지 않아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하나씩 면밀히 군장을 살펴보던 필두가 속으로 혀를 찼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두 개의 군장이 좀 수상해 보였다.

    노골적으로 가라 군장이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둘 다 종이 박스로 덩치만 부풀린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대충 보면 감쪽같이 FM 군장 같이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만큼 완성도가 매우 뛰어난 가라 군장이었다.

    하나 투시 마법을 발동시킨 필두 앞에선 그런 건 잔재주에 불과했다.

    가라 군장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했다가 필두에게 제대로 걸린 주인공들은 바로 장진화 병장과 황호영 병장이었다.

    소진언 바로 아래 기수이며, 이제 말년에 접어들기 시작한 병사들이기도 했다.

    말년의 패기랄까. 하지만 상대가 영 좋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마. 가라 군장 싼 녀석, 거수해라.”

    “…….”

    “…….”

    “없나?”

    서로 눈치 보기 시작하던 병사들이 이내 한목소리를 냈다.

    “없습니다!”

    물론 장진화와 황호영도 마찬가지였다.

    두 병장들의 대답을 들은 필두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정신 나갔군.’

    오른손을 들어 장진화와 황호영을 번갈아 가리켰다.

    필두의 지적에 두 병장이 각각 자신의 관등성명을 댔다.

    “병장 장진화!”

    “병장 황호영!”

    “너희 둘, 군장 들고 나와라.”

    “……!”

    순간 두 병장의 얼굴이 파랗게 물들었다. 그러나 필두의 명령은 멈출 줄 몰랐다.

    “뭣하냐. 시간 끌지 말고 얼른 오지 않고.”

    “아, 알겠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군장을 든 채 필두 앞에 도달했다.

    동시에 필두가 오른발을 들어 장진화의 군장을 꾹 눌렀다.

    푸욱! 소리와 함께 힘없이 꺼지는 그의 군장.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황호영의 군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쑥 들어가는 두 군장의 모습에 장진화와 황호영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이게 FM 군장이냐?”

    “죄송합니다!”

    “기회를 줄 때 제대로 활용할 줄도 알아야지. 두 번이나 자수할 기회를 줬건만. 끝까지 시치미를 떼?”

    분위기가 잔뜩 얼어붙었다.

    얼차려라도 주는 건 아닐까? 그보다 더한 형벌이 내려질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강필두 그는 악마 행보관이니까.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한 번쯤은 봐주마. 가서 FM 군장으로 다시 꾸리고 내려와라. 실시.”

    “시, 실시!”

    필두의 입에서 ‘봐준다’라는 말이 나왔다.

    순간 병사들이 귀를 의심했다. 강필두가 봐줄 줄도 아는 남자였나? 그들이 알고 있는 악마 행보관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하나 필두의 생각은 달랐다.

    중요한 훈련을 앞두고 있기에 부정행위를 저지른 두 병사를 처벌까지 끌고 갈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병사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용도로만 겁을 주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의 과한 처벌은 도리어 사기를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던 필두였기에 이들에게 한 번의 선처를 했다.

    악마 행보관이라고 해서 무조건 악랄하게 구는 그런 남자까진 아니었다.

    강필두는 적당한 완급 조절도 할 줄 아는 행보관이었다.

    * * *

    제1포대 병사들과 함께 대대 연병장으로 내려온 강필두.

    그가 등장하자 같은 상사 계급을 단 간부가 필두에게 다가왔다.

    “뭐하느라 이리 늦었냐.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필두를 책망하는 한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필두와 같은 동기이기도 하면서 제2포대 행보관을 맡는 고정현 상사였다.

    “군장검사 하느라 좀 늦었다.”

    “군장검사는 제1포대만 하냐. 대대장님 오신다니까 빨리 병사들 정렬이나 시켜.”

    고정현은 필두를 아니꼽게 보는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1포대는 제2포대, 제3포대, 심지어 본부포대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부대였다.

    그러나 필두가 오고 나서부터 제1포대는 대대장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대대장뿐이랴. 연대장과 사단장에게도 적지 않은 칭찬을 받고 있으니, 필두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고정현으로선 그가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질투심이란…… 어느 세계 인간이든 공통적으로 존재하는군.’

    그것이 인간이란 존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