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58화 (58/175)
  •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58화

    제15장. 야간 행군(1)

    다시 포대로 돌아왔음에도 제1포대 포대장의 머릿속에는 아직 ‘예정대로 진행한다.’라는 그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사단장이 평일에 부대로 방문하는 것도 빡센데, 거기에 행군 훈련 일정까지 겹치다니.

    상상만 해도 소름이 절로 끼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대장의 결단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해보라. 행군 훈련 일정이 이미 상급 부대까지 다 보고되어 있는데, 사단장이 온다는 것 때문에 행군을 뒤로 미룬다는 게 말이 되겠나?

    물론 부대 사정이라든지 이유 같은 걸 만들어 일정을 미루게끔 시도는 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급을 앞둔 대대장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행동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행군이라…….”

    포대장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벌써 걱정이 앞섰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앞이 깜깜해졌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았다.

    그런 그에게 필두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위로했다.

    “문제없이 행군 끝내면 될 일입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심각하게 걱정하는 포대장과 달리 필두는 담담했다.

    하기야. 레디너스에서 목숨을 걸고 실제 전쟁에 참여했던 필두인데, 고작해야 행군 훈련에 사단장이 온다는 걸로 긴장이나 하겠는가?

    오히려 그러려니 하고 가벼이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대대장과 포대장은 달랐다. 필두처럼 치열한 생존의 세계에서 자라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번에도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필두가 다시금 그에게 믿음을 심어줬다.

    이 한 마디면 없던 신뢰감도 생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필두가 그간 보여준 성과들을 생각한다면, 이 말이 빈말이 아님을 잘 알 것이다.

    “행보관님만 믿겠습니다!”

    그의 눈빛에 강한 신뢰감이 생성되었다.

    필두만 믿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이미 그건 제1포대…… 아니, 9090대대에선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 * *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저녁 9시 반.

    당직사관이 아님에도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던 필두가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 화요일. 그때 9090대대 전체가 행군 훈련에 들어간다. 사단장이 오기로 한 시간은 미정. 방심할 수 없겠군.’

    하다못해 구체적인 시간이라도 안다면 어느 정도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사단장도 나름 고단수였다.

    그가 미리 방문 시간을 통보하고 9090대대를 찾으면, 그에 따른 대비는 이미 다 갖춰져 있을 것이다.

    사단장은 불시에 부대를 방문하고 싶어 했다. 그래야 더욱더 해당 부대의 실상을 직접 볼 수 있을 테니까.

    ‘귀찮은 사람이군.’

    필두의 입장에선 꽤 까다로웠다. 그래도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부대가 저평가되는 건 피하고 싶었다.

    소싯적에 나름 엘리트 코스를 걸었던 드리무어였기에 자존심 역시 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단장으로부터 쓴소리를 들으면, 그간 필두가 세웠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었다. 열 번 잘해봤자 뭣하겠나.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군대다.

    “삼포반장.”

    “예, 행보관님.”

    “저녁 점호, 슬슬 시작해라. 1생활관으로 집합하라고 해서 통합점호 실시해. 병력들에게 할 말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당직 완장을 찬 삼포반장이 당직병에게 저녁 점호를 알리는 방송을 지시했다.

    이윽고 10분 후.

    삼포반장과 함께 1생활관으로 진입한 강필두가 병사들을 쭉 훑었다.

    “전체 주목한다. 주목.”

    “주목!”

    이목을 집중시킨 뒤에 병사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려줬다.

    “다음 주에 시행되는 행군 훈련에 사단장님이 방문하시기로 예정되어 있다.”

    “사, 사단장님이……!”

    “이런……!”

    병사들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간부들도 사단장의 방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당시에 이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냥 행군하는 것만으로도 빡센데, 거기에 사단장의 기습 방문까지 잡혀 있다니. 최악에 최악이 겹친 셈이었다.

    “너희도 잘 알겠지만, 이번 행군은 매우 중요하다. 선임병들은 각 분과 후임병들 하나하나 직접 다 챙기면서 행군 준비에 차질이 없게끔 해라. 특이사항 있을 때에는 분대장들이 나에게 와서 직접 보고하고.”

    “예!”

    “그리고 짬 되는 선임급들은 가라 군장 같은 거 꾸릴 생각하지 마라. 포대장님 포함해서 간부들도 FM 군장 가져갈 테니 너희들도 전원 예외 없이 FM 군장이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구태여 필두가 이렇게까지 말 안 해도 병사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사단장의 방문이 얼마나 큰 시련인지에 대해서.

    “사단장님에게 뭐 하나 걸리기라도 하면…… 그때는 나도 책임 못 진다.”

    섬뜩한 필두의 경고. 병사들이 절로 꿀꺽 침을 삼켰다.

    “대신, 이번에도 훈련을 잘 받는다면, 저번과 동일하게 분과별로 포상휴가 하나씩 챙겨주게끔 해주마.”

    “……!”

    필두는 상과 벌을 주는 때가 명확했다.

    벌을 내릴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엄했지만, 챙겨줄 땐 확실하게 챙겨준다.

    실제로 포대전술훈련 당시, 자신이 내건 공약 그대로 각 분과에게 포상휴가를 내린 적이 있었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남자. 그가 바로 제1포대 행보관, 강필두다.

    “삼포반장. 저녁 점호 실시하도록.”

    뒷일을 삼포반장에게 맡기고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집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아직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위병소를 통과한 필두의 차량. 평소 집 가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쪽 도로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건가.”

    차를 끌고 향하는 길. 이곳은 바로 다음 주 화요일에 시행될 행군 코스였다.

    도합 42㎞. 게다가 주간도 아닌 야간행군이다.

    10시간 가까이 되는 행군이었기에 더 신중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짬을 내 행군 코스를 한 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도 때마침 야간행군 시간 때랑 얼추 맞물렸다.

    도로를 따라 차를 몰아가던 필두가 중간에 차를 세워뒀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겠군.”

    산을 넘어가는 코스였기에 차를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야간의 산행은 매우 위험하다. 산짐승이 나올 가능성도 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에 조난을 당할 가능성도 컸다.

    그러나 그건 필두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말들이었다.

    오른손에 마나를 응집시켜 강한 빛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그러자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산길이 금세 밝아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중에 뭔가 기척을 느낀 필두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은 무성한 수풀 안쪽. 그곳을 예의주시하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더더욱 커졌다.

    “꽤애애애액!”

    갑자기 수풀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몸체가 괴성을 지르며 필두를 향해 돌진했다!

    위협적인 공격이었음에도 필두는 그저 가벼이 왼손을 휘두르기만 했다. 그러자 마치 보이지 않는 육중한 무언가가 필두를 습격한 존재를 짓누르듯 공격했다.

    쿠우웅!

    중력 조절 마법을 통해 습격한 존재의 움직임을 봉인해 버렸다.

    라이트를 비춰 적을 확인하는 순간, 필두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저번에 그 녀석이로군.”

    전도혁을 갱생시킬 때 잠깐 이용했던 바로 그 멧돼지였다.

    중력에 짓눌렸던 멧돼지가 짧은 네 발을 바동거리자, 그제야 필두가 마법을 해제했다.

    몸을 짓누르고 있던 중력이 사라짐과 동시에 멧돼지가 부리나케 도망쳤다.

    멧돼지가 복수의 기회를 엿봤지만, 여전히 필두에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이었다.

    나름의 학습 능력이 있는 멧돼지였다.

    ‘죽여 두는 게 좋았으려나.’

    만약을 대비해서 미리 제거해두는 편도 나쁘지 않았다. 혹여나 행군 때 병사들을 습격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하나 귀찮음이 샘솟은 모양인지 뻗었던 손을 거뒀다. 문제가 발생하면 필두가 직접 해결하면 그만이다.

    “어디 보자. 그다음은…….”

    행군 코스를 한 번 직접 돌아보는 김에, 훈련 때 병사들에게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을 만한 것들은 가급적이면 다 제거하고 싶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드문드문 위치한 빙판길이었다.

    날씨가 추운 덕분에 이런 빙판길이 생각보다 빈번하게 있었다.

    야간행군이었기에 빙판길의 존재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발이라도 헛디디게 되면 크나큰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도 컸다.

    오른손을 뻗어 화염계 마법을 발동시키자,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빙판길을 녹였다.

    남아 있는 물기들조차도 수증기로 바꿔 증발시켜뒀다. 짧은 시간 동안 빙판길을 흔적도 없이 제거해 버렸다.

    그렇게 몇 차례 같은 작업을 반복하자, 아스팔트길이 필두를 맞이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 차량이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이윽고 차에 오르지 않고서 다시 한번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이번에는 차와 함께였다.

    산길이 끝나는 부분으로 되돌아온 뒤, 다시 차량에 탑승했다.

    차를 돌려 이곳까지 오는 것보다 순간이동을 통해 오는 것이 훨씬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도로를 타며 남은 행군 코스를 돌아보는 필두.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기에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거의 없었다.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다시 9090대대가 있는 쪽에 도달했다.

    ‘이것으로 끝이군.’

    짧은 시간 내에 모든 행군 코스를 다 돌아봤다.

    중간에 산행이 2번 정도 있었다. 아마 그 2번이 행군 중 가장 큰 난코스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행군 시작되기 전에 한 번 더 둘러봐야겠군.’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게 좋지 않은가.

    철저한 준비는 늘 이로운 결과를 불러오는 법이었다.

    * * *

    행군 하루 전날.

    깊은 한숨을 내쉬던 소진언이 짧은 머리를 박박 긁어댔다.

    “아니, 난 왜 행군 뛰는 거야!”

    “분대장 결산 때 들은 건데, 아마 사단장님 방문 때문에 그런 거 같습니다.”

    개인정비 시간 때 분대장 결산에 참가했던 김조항이 그때 오고갔던 내용을 간추려 언급했다.

    본래 소진언은 말년 휴가를 써서 어떻게든 행군을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대장의 한 마디 덕분에 본의 아니게 그도 행군에 참여하게 되었다.

    열외는 없다.

    이 말에 소진언은 깊은 절망감을 맛봤다.

    “말년에 행군이라니. 말년에 행군이라니!”

    불만을 가득 토로해 보지만, 그렇다고 간부 면전에서 말할 자신은 없었다.

    말년에 간부들한테 미운털 제대로 박히면 고생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여기선 그냥 내 팔자려니 하고 수긍하는 편이 남은 군 생활을 위해서라도 옳았다.

    “가라 군장하고 싶다.”

    “안 됩니다, 소진언 병장님. 그러다가 군장 검사라도 하면, 저희 대대 다 뒤집어집니다.”

    “……쳇.”

    김조항의 말이 옳았다.

    생각을 해보라.

    가라 군장 챙겼다가 행군 훈련 도중에 사단장이 소진언에게 와서 ‘군장 검사해 볼 테니 짐 한번 풀어봐라’라고 말하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들어 있어야 할 군용 물품 대신 빈 박스가 나온다면…… 소진언도 아마 문석도와 같은 처지가 될지도 몰랐다.

    “딱 한 번만 참으시면 됩니다, 소진언 병장님.”

    “하, 내 군 생활 참…….”

    군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다.

    소진언이 거의 2년 가까이 병사 생활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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