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57화
제14장. 마성의 남자(4)
평소에 자주는 아니더라도, 행보관이 병사 면담을 주도할 때 가끔은 오고 가고 했던 곳이 바로 이곳, 행보관실이었다.
그럼에도 최민복은 오늘따라 행보관실이 너무나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최민복도 자신이 내무 부조리를 조장하는 삼대장 중 한 명이라 불리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삼대장 중 두 명이 아웃당했으니, 이제 남은 타깃은 최민복, 단 한 명뿐이었다.
‘X발, 도대체 어떤 새끼가 고자질한 거지?’
최민복이 속으로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낌새를 보아하니, 필두는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 도는 삼대장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을 최근에 알아차리긴 했지만, 최민복의 입장에선 사실 안다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병사들에게 석고대죄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내가 널 부른 이유,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만.”
“…….”
필두의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최민복. 그러더니 이내 모르쇠로 일관하자는 생각이 든 모양인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 잘 모르겠습…….”
“만약 모른다고 한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증명시켜줄 수도 있는데. 어떠냐.”
“…….”
“아직도 모른다고 발뺌할 셈인가?”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의 답답함이 최민복의 전신을 옭아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강필두는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행보관님!”
대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서 연신 잘못을 빌었다.
모르는 입장에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을 상황이었지만, 필두는 침착했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네 입으로 직접 하나하나 상세하게 다 불어봐라.”
“그건…….”
본인으로선 꽤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절대 갑은 강필두였다.
을의 입장에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기에 얌전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취침시간에 들 때마다 후임병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꼬장 부리고, 청소 시간에 괜히 심술 나서 똥 휴지통도 엎은 적 있었고, 액션 영화 보고 필 받아서 그거 재현한답시고 휴일에 후임들 모아서 강제로 연극도 시키고, 또 점호할 때도…….”
“결론은 꼬장이군.”
“죄송합니다!”
역시 꼬장의 왕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그 행태도 각양각색이었다.
어찌 보면 문석도보다도 더한 놈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문석도와 합심해서 일부러 마음에 안 드는 후임도 괴롭히고 그랬다고 하던데.”
“누가 그럽니까?”
“그걸 내가 미쳤다고 말해주나. 익명의 제보가 있었다.”
“그건 제가…….”
“변명인가?”
“아닙니다!”
최민복은 문석도에 비해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여기서 괜히 자기 입장을 대변한답시고 이래라저래라 말을 해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결국, 필두에겐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필두의 심기만 건드리는 일이 될 뿐이었다.
괜히 잔소리로 끝날 거, 영창까지 확대하진 말자는 생각이 든 모양인지 최민복이 다시금 싹싹 빌기 시작했다.
“앞으론 두 번 다시 안 그러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를!”
영창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그 생각이 지금 최민복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필사적인 최민복의 모습을 무표정으로 응시하던 강필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다. 만약 네가 따른다면 선처를 고려해 보마.”
“네!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첫 번째. 전역 때까지 앞으로 쥐 죽은 듯이 살아라. 후임들한테 뭐 시킬 생각도 하지 말고, 명령할 생각도 하지 마라. 두 번째. 네가 피해줬던 후임병들에게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직접 사과해라.”
“사과는 좀…….”
최민복도 자존심이 있는 남자였다. 사회에 있을 때에도 대학교 후배들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있었어도 사과는 결코 하지 않았던 게 바로 그였다.
업신여기는 이들에겐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임에게 진솔하게 사과하라? 이건 최민복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차원의 문제였다.
하나 영창이 걸려 있다면 자존심은 별개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기 싫은가?”
“아닙니다! 하,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더…… 있습니까?”
이미 두 가지로도 충분하지 않나.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최민복의 말이었으나 필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앞으로 있을 모든 훈련에 예외 없이 참가해라. 일부러 훈련 기간에 겹쳐 말년휴가 쓸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고.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마지막 조건을 들은 순간, 최민복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마디.
망했다.
그의 군 생활은 거의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
꼬장의 왕, 최민복까지 격침되자 제1포대는 본의 아니게 평화로운 병영생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갈굼의 왕은 영창 이후 전출행이 확정되었고, 고명전은 인큐버스인 이성준 일편단심이었기에 다른 병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멤버인 최민복은 필두가 말한 그대로 후임들에게 제대로 말조차 건네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최민복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후임급 병사들은 ‘신종 꼬장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문제만 안 일으키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최민복의 달라진 태도가 이들에게 방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윽고 며칠 후.
대대장이 예고했던 대로 9090대대에 인사 검열의 날이 찾아오게 되었다.
검열 대상은 본부포대를 비롯해 3개 포대. 즉, 9090대대 전부였다.
본부포대 검열을 마친 장교들이 뒤이어 제1포대를 찾았다. 동시에 행정반에서 병사들의 소집을 알리는 전파사항이 들려왔다.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지금 전 병력은 즉시 1생활관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병사들이 하던 작업을 중시하고 막사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무 부조리 검사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게 하나 있었다.
마음의 편지였다.
“이등병, 일병급은 1생활관으로. 상병장급은 2생활관으로 가라.”
“예, 알겠습니다.”
통제관의 명에 따라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음의 편지는 이제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자주 있는 마음의 편지지만, 후폭풍은 매우 거대했다. 괜히 ‘군 생활, 너무 힘듭니다’라는 내용이 하나라도 나온다면, 그 부대는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단 검열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간부 입장에서 마음의 편지를 신경 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의 편지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포대장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생활관의 닫힌 문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나 필두는 태평했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포대장님.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이미 필두가 사전 작업을 다 해놓았다. 내무 부조리 문제도 거의 해결했다봐도 무방했다.
그간 선임들에게 고통받아 왔던 후임들도 휴가라는 극단의 조처를 했다.
털릴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략 20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2생활관 감독을 맡은 하나포반장이 수거한 마음의 편지들을 들어 보였다.
“안 낸 사람 없지?”
“예!”
“없습니다!”
“그럼 전투화 신고 사열대 앞으로 집합해 있어라. 삼포반장님이 통제해 주실 거다.”
하나포 반장의 말에 따라 사열대로 향하는 병사들.
이들의 모습을 행정반 안에서 지켜보던 사단 쪽 인사장교가 감탄사를 들려줬다.
“오, 병사들 표정이 꽤 좋네.”
“그러게 말입니다.”
같이 파견 나온 부하 장교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인사 관련 검열을 전문으로 다니다 보니 이제는 병사들 표정만 봐도 이곳 부대에 내무 부조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단계까지 올라왔다. 이미 인사장교의 날카로운 눈썰미 아래에 희생양이 된 부대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9090대대 제1포대는 뭔가 남달랐다.
병사들 표정에 생기가 가득했다. 인사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티가 확연하게 났다.
멀찌감치 떨어져 이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던 필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볼 필요도 없겠군.’
모든 것은 그의 계획대로였다.
* * *
필두가 예상했던 그대로 9090대대 제1포대는 사단이 실시한 인사 검열에서 모든 부대를 통틀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 때문일까. 대대장이 다시 한번 제1포대 포대장과 행보관 강필두를 호출했다.
대대장실에 자리 잡은 두 사람. 대대장이 그런 그들을 만연의 미소로 환영했다.
“참으로 고생 많았네! 행보관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대대장님. 고생은 대대장님이 다 하셨지, 저는 그저 대대장님의 평소 가르침에 따라 부대 관리에 임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역시 행보관님이십니다!”
어쩜 이리도 기분 좋은 말만 골라서 할까. 대대장으로선 강필두가 복덩어리 그 자체였다.
“사단장님께서 직접 우리 부대를 언급하며 칭찬하셨습니다. 9090대대 좀 보고 배우라고 말이죠. 그때 다른 장교들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아무튼 고생 많으셨습니다, 행보관님. 포대장, 자네도 수고 많았어.”
“감사합니다!”
대대장과 제1포대 포대장의 평가는 날이 갈수록 상승해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가면, 진급에도 큰 차질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대대장이 이들을 부른 이유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실은 이야깃거리가 한 가지 더 있다만.”
“무엇입니까?”
포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대대장의 표정이 조금 전까지와 다르게 자못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사단장에게 안 좋은 말이라도 들은 걸까? 아니, 그럴 일은 없었다. 조금 전에도 인사 평가가 매우 좋았다며 칭찬을 받고 돌아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잔소리를 들을 여지가 있기는 할까.
“안 좋은 말이라고 해야 할지…… 사단장님께서 우리 부대에 관심을 가져주는 건 매우 고마운 일이긴 하나, 이게 골치 아픈 일이 되어버려서 말일세.”
대대장이 짧게 혀를 찼다. 이후, 그가 자꾸 말을 빙빙 돌리는 이유를 들려줬다.
“사단장님께서 다음 주 화요일에 우리 부대로 방문하겠다고 말씀하셨네. 달라진 9090대대를 직접 보고 싶다더군.”
“……!”
사단장이 이곳에 온다?
큰일이었다. 포대장은 벌써 부대 관리를 어찌해야 좋을지 걱정이 덜컥 앞섰다.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 주 화요일이라면.”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사단장의 방문도 방문이지만, 혹시 몰라 확인해야 하는 일정이 있었다.
“행군 일정이 잡혀 있지 않습니까?”
필두의 말을 듣는 순간, 포대장이 아차 싶은 표정을 내비쳤다.
그렇다. 다음 주 화요일에는 9090대대 행군 훈련 일정이 잡혀 있었다.
“행군은 어떻게 됩니까?”
포대장이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담아 질문했다. 그는 내심 속으로 행군을 다음으로 미뤘으면 했다.
사단장의 방문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하나 대대장의 얼굴에는 비장감이 감돌았다.
이윽고 포대장이 듣고 싶지 않은 답변을 들려줬다.
“예정대로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