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53화
제13장. 내무 부조리 척결(3)
필두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들었다.
이건 그의 계산 밖에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일이 곤란해지는데.’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 자리에 세우다니. 게다가 이곳은 군대다.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는 특수한 장소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피해자는 결국 상급자니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할 수 있는 게 바로 상급자였다. 특히나 계급과 짬이 서열 기준이 되는 이곳이라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필두는 가급적이면 피해받은 이들을 보호하고자 웬만해선 가해자와 직접 대면을 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대장이 먼저 초를 치고 말았다.
‘성급한 남자로군.’
속으로 혀를 차는 필두였으나, 이미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피해자 입장인 김상철, 오서민, 차성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도혁 일병에 이어 문석도의 관등성명도 불리게 되었다.
차례차례로 호출당한 이들이 행정반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전부 다 썩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전도혁을 비롯한 일병 4인방은 문석도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하기야. 여기 모인 이들 전부 다 어떠한 사건 때문에 호출 당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당당히 고개를 드는 이가 누가 있을까.
아니,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가해자인 문석도였다.
잔뜩 화가 난 포대장이 시뻘건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문석도.”
“상병 문석도.”
“네가 여기 왜 불려왔는지 알겠나.”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문석도였으나 이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쿵!
포대장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충격음이 포대장실을 가득 채우자, 필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포대장이 이렇게까지 성을 내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1포대 포대장이 천사라 불릴 만큼 착한 성격까진 아니었다.
그래도 포대 하나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에 무게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극도의 감정을 외부로 표출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화를 내니, 포대장을 아는 사람들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기 증거가 다 있는데! 아직도 모른 척을 하겠다는 거냐!”
포대장이 필두가 내민 증거물들을 직접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순간, 문석도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스마트폰에 재생되고 있는 건 바로 문석도, 본인이 전도혁에게 각종 폭언과 손찌검을 한 영상이었다.
부정하기 힘든 물증이 나온 셈이었다.
그럼에도 문석도는 그것을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인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하는 시늉만 그런 거지, 실제로 전도혁 일병을 때리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몸에 난 상처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그건 저 녀석들이 일하다가 실수로 다친 것들입니다. 정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대화의 방향을 일병 네 명에게 떠넘기는 문석도였다.
포대장을 비롯해 모두의 시선에 이들에게 고정되었다.
“말해봐라. 석도한테 맞은 적 있냐.”
“…….”
“…….”
“…….”
포대장의 물음에 답할 용기까진 없는 모양인지 일병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제아무리 피해자, 가해자 입장이 명확하다 하더라도 이렇게 대면을 시켜놓고 직접 물으면 누가 바로 응답하겠나.
이런 이유에서 필두는 이 상황이 오지 않게끔 미리 조처했어야 했다. 그러나 포대장의 기행에 미처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인 채 일병 4인방을 응시했다.
여기서 문석도의 잘못을 고하면, 그에게 벌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혹여나 만약에 군대 특유의 보여주기식 일처리로 사건이 마무리된다면, 피해자들은 군 생활이 끝날 때까지 고통받을지도 몰랐다.
내무 부조리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될 위험도 컸다.
섣불리 나지 않는 용기. 그 순간, 이들의 용기에 불을 지핀 인물이 있었다.
“주눅 들지 마라. 남자라면 어깨 펴고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밝혀야 하지 않겠냐.”
행정보급관, 강필두였다.
언성이 높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나긋한 축에 속하는 목소리 톤이었다. 그러나 뭐랄까. 가벼이 흘려들을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문석도와 연관된 내무 부조리 문제를 가장 확실하게 해결할 방법은 피해자인 이들의 고발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 여전히 이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용기를 복돋아 줘도 내무 부조리 같은 오래된 악습을 몰아내기에는 아직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안심해라. 이번 사건은 너희에게 피해 하나 가지 않게끔 해결해 주마. 내가 책임지고 주도할 테니 있는 그대로 모든 사실을 털어놔라.”
“해, 행보관님……!”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말을 했던 간부들은 여럿 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면 병사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
그것이 계속되고 계속된 덕분에 병사들은 더 이상 간부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 때문에 내무 부조리와 같은 악습 역시 깊게 뿌리를 잡았다.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칼을 뽑아야 했다.
선봉은 강필두가 섰다. 이제 그의 뒤를 따를 존재가 필요했다.
무의식적으로 필두와 눈이 마주친 전도혁이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한번 질러보자!’
두 주먹을 불끈 쥔 전도혁이 결심을 굳히고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문석도 상병한테 맞은 적 있습니다. 저 말들은 다 거짓입니다.”
“……!”
문석도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설마 전도혁이 자신을 면전에서 고자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압박을 넣어두면 알아서 입을 다물 거로 예상했다. 그러나 문석도조차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전도혁에게는 문석도보다 훨씬 더 두려운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강필두가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어떻게 전도혁이 가만히 있을까.
그 역시 필두의 뒤를 따라야 했다.
“그게…… 사실이냐?”
포대장이 확인 차원에서 다시 묻자, 전도혁이 재차 힘 있게 대답했다.
“네, 확실합니다!”
전도혁이 먼저 총대를 멘 탓일까. 남은 일병들의 동공도 크게 흔들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결국 남은 인원들도 양심 고백을 선택했다.
“도, 도혁이 말이 맞습니다!”
“저도 문석도 상병에게 얼마 전에 맞았습니다! 여기, 여기 팔 보시기 바랍니다!”
“이등병 때부터 맞고 다녔습니다! 간부들한테 말하면 알아서 하라고 매번 협박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제보들에 포대장의 분노 수치는 계속해서 상승했다.
더 이상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확실한 물증. 그리고 피해자들의 제보가 연달아 이어지는데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천만에.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여태 각종 폭행을 일삼아 오던 문석도 상병.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 * *
병사들을 비롯해 간부들까지 퇴장시킨 포대장이 조심스럽게 홀로 남은 필두에게 의견을 구해왔다.
“행보관님은 어떻게 하면 좋을 거 같습니까?”
문석도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하나 있었다.
“전출 보내면 됩니다.”
“전출이라…….”
“최대 기간으로 영창 보낸 이후에 다른 포대, 혹은 다른 대대로 전출을 보내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아니요. 행보관님 말씀에 따르는 게 가장 좋을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포대장님.”
처음에는 포대장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마무리는 필두가 의도한 그대로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포대장실을 나온 필두. 그의 시선에 사열대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일병 4인망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기서 뭐 하고 있냐.”
“추, 충성!”
일병들이 다급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필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이들의 표정을 낱낱이 살폈다. 문석도 사건이 마무리되었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불안감이라는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 감정은 필두도 십분 이해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남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에게 피해 안 가게 할 테니 그 점은 안심해도 된다.”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행보관님만 믿겠습니다.”
처음에는 필두를 그저 병사들 괴롭히기 좋아하는 악마 행보관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필두는 병사들을 챙겨줄 때엔 확실하게 챙겨주는 화끈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너희 넷, 일병 정기 휴가는 다 갔다 왔냐.”
“정기 휴가…… 말씀이십니까?”
“갔다 왔습니다.”
“일병 진급하자마자 바로 사용했습니다. 본래 그게 규칙이라고 해서…….”
“흠, 그러냐.”
이들의 말을 들은 필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입이 쩍 벌어질 만한 발언을 들려줬다.
“포대장님한테 말해서 짧게나마 포상휴가 갔다 오게끔 조치 취해줄 테니까 조만간 일정 잡아봐라.”
“자, 잘못 들었습니다?”
“포, 포상 휴가 말입니까?”
병사들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아무런 공을 세운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포상휴가라니.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그러나 필두의 생각은 달랐다.
폭언과 폭행은 인간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요소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것들을 상습적으로 당해왔으니, 몸은 그렇다 치더라도 심적으로 얼마나 많이 지쳐 있을까.
게다가 전출 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진 이들을 가급적이면 막사에 머물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혹여나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르니까.
“각 분과 분대장들에게는 내가 직접 설명해 줄 터이니 니들은 휴가 나갈 생각만 해라.”
“그래도…….”
“이건 명령이다.”
딱 잘라 말하는 강필두.
강제 휴가라니. 참으로 특이한 경우였다.
그래도 휴가 보내준다는데 싫다고 거절할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 필두의 명령을 받들기로 한 병사들이 힘 있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이제 슬슬 작업하러 가라.”
“예!”
“충성!”
각자 할당된 작업을 소화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는 이들.
전도혁 역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에, 갑자기 필두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순간 전도혁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 때, 필두의 낮은 목소리가 전도혁의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이 오해임을 밝혔다.
“고생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저 녀석들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을 거다.”
“아닙니다! 저로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기특한 놈이로군.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활약, 기대하고 있으마.”
“예!”
전도혁에게 기대감을 표출하는 강필두의 한 마디.
어째서일까. 평상시에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필두였지만, 오늘 그가 들려준 말들은 전도혁에게 용기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그는 그렇게까지 악독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도혁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