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51화
제13장. 내무 부조리 척결(1)
제1포대가 담당하고 있는 탄약고 초소는 막사 뒤쪽에 있는 언덕에 있었다.
비탈길이 꽤 경사지고, 올라가는 코스가 험난하기에 탄약고 초소 근무 교대를 하러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본의 아니게 체력 단련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탄약고 초소 외곽 근무를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그건 전도혁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오늘만큼은 특히나 더 탄약고 초소 근무가 싫었다.
왜냐하면 그의 앞에 씩씩대며 걷는 집합의 왕, 문석도 때문이었다.
“…….”
말없이 묵묵히 앞장서 걸어가는 문석도 병장. 뒷모습만 봐도 그의 현재 감정 상태가 어떠한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니, 굳이 추론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전도혁은 후임근무자가 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물론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전도혁은 분명 착실히 잘해냈다. 필두한테서 A급 병사가 되라는 명을 받기까지 했는데, 어찌 근무교대 준비에 소홀히 대처할 수 있단 말인가.
탄약고 초소로 가면 문석도의 갈굼이 이어질 게 뻔했다.
하나 전도혁에게는 문석도의 갈굼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게 있었다.
바로 강필두의 존재였다.
‘하, X발! 하필이면 행보관님 당직일 때 그런 실책을 저지르다니!’
A급 병사가 되라고 지시한 건 바로 강필두였다. 그런데 그가 보는 앞에서 크나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으니, 필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필두로부터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문석도의 갈굼은 애교 수준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여하튼 외곽 근무가 끝나면, 전도혁을 기다리는 건 고통의 시간뿐이었다.
문석도와 함께 언덕 능선을 타며 탄약고 초고로 향하던 전도혁의 귓가에 전번초 근무자의 형식적인 발언이 들려왔다.
“정지,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등대.”
마지막의 ‘등대’란 단어는 오늘의 암구호 중 문어였다.
전번초 근무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석도의 시선이 전도혁에게로 향했다.
답어를 들려줘야 하는 건 대다수 후임근무자의 역할이었다.
‘암구호 정도야 껌이지.’
전도혁도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비록 근무 교대 준비 과정에서는 많은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암구호는 외우고 있었다.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는가.
“바위.”
자신만만하게 답어를 읊는 전도혁.
그러나 순간,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등대.”
전번초가 재차 문어를 들려준 것이었다.
이상했다. 보통은 답어를 들려줄 경우, 그 이후에 ‘누구냐.’와 ‘용무는.’이라는 질문이 들려와야 했다.
그런데 문어를 반복해서 말하다니. 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상대가 못 들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며 전도혁이 다시 힘차게 답어를 외쳤다.
“바위!”
“……?”
하나 전번초 근무자들의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등대.”
“바위!”
“등대!”
“바위!”
이상한 말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때, 문석도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야, 전도혁.”
“일병 전도혁.”
“너, 오늘의 암구호 뭔지 모르냐?”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저쪽에서 계속 문어만 반복하는 거냐.”
“그건…….”
도리어 전도혁이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의 답어는 분명 ‘바위’였다. 그런데 왜 저쪽에선 마치 전도혁의 바위가 답어가 아니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걸까?
그런 의구심이 쌓여가는 와중에, 탄약고 초소 문이 활짝 열렸다.
“뭐야, X발. 답어도 모르냐?”
“충성.”
초소 문을 박차고 나온 인물은 제1포대에서도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바로 꼬장의 왕, 최민복 병장이었다.
그는 문석도마저도 벌벌 떨게 만든다는 남자였다.
한때 문석도와 같은 상병 계급을 지녔을 때는 광견이라는 별명을 달기도 했었다.
막 나가는 군 생활. 그것이 최민복 병장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그가 영창 한 번 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후임들을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영창을 한 번이라도 가는 순간, 니들의 군 생활이 어떻게 될지 각오해라.
그것이 최민복만의 선전포고였다.
협박이 아직은 잘 통한 모양인지, 최민복은 여전히 거침없는 군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야, 성훈아.”
“일병 김성훈!”
“오늘의 암구호, 뭐냐.”
최민복의 지시에 그와 같이 근무를 서고 있던 전번초 후임근무자, 김성훈 일병이 바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
“일병 김성훈! 오늘의 암구호, 문어에 등대! 답어에 손전등! 이상입니다!”
“들었냐, 전도혁. 손전등이란다, 손전등.”
최민복의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가 지어졌다.
당장에라도 전도혁에게 강도 높은 갈굼을 퍼붓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야간 외곽근무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가서 달콤한 단잠에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굳이 최민복이 여기서 솔선수범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문석도에게 이 말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
“석도야.”
“상병 문석도.”
“요즘 후임들, 완전 개판 다 됐다?”
“…….”
갈굼을 부르는 마법의 주문이 시전 되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전도혁과 김성훈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꼴깍!
절로 침이 넘어갔다.
이 말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그들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듣는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문석도라면 더더욱!
문석도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
“후임들 교육 똑바로 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라.”
최민복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새겨졌다.
그의 웃음은 마치 전도혁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갈굼 잘 받아라~
최민복은 전도혁에게 더욱더 강도 높은 갈굼을 받게 하려고 일부러 문석도의 화를 돋우게 했다.
후임을 괴롭히는 재미. 그것이 최민복에게 있어서 군 생활의 활력소였다.
물론 그건 문석도도 마찬가지였다.
근무 교대를 마친 이후, 탄약고 초소로 들어오자마자 문석도가 섬뜩한 말을 들려줬다.
“너는 오늘 죽었다.”
* * *
투명화 마법을 유지한 채 막사 바깥을 빠져나온 필두가 탄약고 초소가 있는 언덕 위쪽을 응시했다.
‘그럼 슬슬 가볼까.’
위쪽으로 향하려던 순간, 다수의 발걸음 소리가 그의 귓가를 자극했다.
누군지 안 봐도 뻔했다.
탄약고 초소 전임근무자들과 당직병이었다.
“푸하하! 마지막에 전도혁 녀석, 표정 봤냐? 아주 죽이더라, 죽여!”
최민복이 배꼽을 잡은 채 웃음을 토해냈다.
그러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김성훈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최민복 병장님.”
“왜.”
“답어…… 바위 맞지 말입니다.”
“엉? 그게 뭐 어때서.”
최민복과 김성훈의 대화에 필두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
필두는 일부러 문석도가 전도혁을 갈구게끔 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고자 일시적으로 전도혁에게 최면을 걸었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최민복이 뭔가 수를 쓴 게 있는 걸까.
“전도혁, 그 녀석은 왠지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여자들한테 편지도 많이 받잖나? 까짓것 몇 번 갈궈준다고 죽거나 하진 않겠지. 위로해 줄 여자들도 많이 있을 테니까. 안 그러냐?”
“그, 그건 좀…….”
“아니면 나한테 여자 한 명이라도 소개해 줬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여튼 요즘 후임 녀석들은 눈치가 없어요, 눈치가. 솔로인 선임을 위해서라도 친한 여대생이나 아니면 예쁜 누나, 여동생 있으면 알아서 전화번호 바치거나 해야 할 거 아니냐.”
“…….”
단지 전도혁을 괴롭히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최민복은 일부러 맞는 답어를 틀리게 했다.
덕분에 전도혁만 나쁜 놈이 되고 만 것이었다.
물론 전도혁도 드리무어를 만나기 전까진 지은 죄가 많이 있었다. 그것도 한몫하긴 했지만, 그 이력을 제외하고도 최민복은 노골적으로 후임의 여자 지인들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소개해 주지 않으면 꼬장. 혹여나 소개를 해준다 하더라도 잘되지 않으면 그것도 꼬장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후임을 닦달하거나 일이 잘 안 풀려도 스토커처럼 전화를 걸어 여자를 괴롭혔다.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었다.
병장이라는 계급으로부터 나오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겠다는 최민복의 욕심은 이미 후임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필두의 바로 곁을 지나치는 세 명의 병사들.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필두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별의별 녀석이 다 있군.’
필두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이었다. 레디너스 대륙에서는 인간쓰레기라는 단어가 아까울 만큼 악마 같은 녀석들과 마주했던 적도 있었다.
최민복 정도면 필두가 보기엔 어린아이 장난 수준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괴롭힘을 당하는 당사자들에겐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내무 부조리 뿌리를 뽑아야 했다.
최민복보다는 문석도가 첫 번째 먹잇감이었다. 그 사실을 다시금 인지한 필두가 재차 걸음을 옮겼다.
탄약고 초소가 꽤 높은 언덕에 있음에도 필두의 걸음 속도는 마치 100미터를 전력으로 달리는 육상 선수마냥 빨랐다.
순식간에 탄약고 바로 근처까지 도달하자, 예상대로 문석도의 갈굼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너, 오늘 암구호가 뭔지도 모르냐?”
“분명 등대, 바위 맞습니다만…….”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엎드려 뻗쳐라.”
문석도의 말대로 곧장 자세를 취하는 전도혁.
그로서는 억울했지만, 그래도 문석도의 말을 거절하면 더한 보복을 당할까 봐 두려워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하나 문석도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그가 오른발을 들어 전도혁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퍼억!
“큭!”
문석도의 악질 행동 중 하나.
바로 ‘폭력’이었다.
“어쭈. 똑바로 못하냐!”
두 번째 발길질이 이어졌다.
딱딱한 전투화의 끝이 전도혁의 정강이에 내리꽂혔다.
제아무리 단단한 몸을 지닌 전도혁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의 가혹행위는 견디기 힘들었다.
사실 문석도는 오늘의 암구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전도혁의 말대로 문어에 등대, 답어에 바위였다.
그럼에도 일부러 모른 척을 하며 전도혁을 갈구고 있었다.
맞는 답어임에도 아닌 것처럼 위장해 후임을 갈구기 위한 계기를 마련한다. 이것이 문석도와 최민복, 두 사람의 콤비플레이였다.
문석도는 갈굼과 폭력 같은 가혹행위로 후임들을 괴롭히며 자신의 군 생활 스트레스를 푸는 남자였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후임들의 잘못을 꼬투리 잡고 싶어 했다.
그런 문석도를 위해 최민복이 협력자가 되어 같이 움직여줬다.
최민복이 갈구고 싶은 병사를 지목하면, 문석도와 암구호 속이기 작전을 펼친다. 최민복은 해당 병사를 괴롭힐 수 있어서 좋고, 문석도는 가혹 행위를 가하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서 좋고. 그것이 협력의 이유였다.
안 그래도 전도혁은 오늘, 문석도에게 지적질 당할 것들을 많이 저질렀다.
문석도로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예전부터 네 녀석의 낯짝이 마음에 안 들었다, 짜샤.”
전도혁이 다시 자세를 취할 때마다 발길질을 해 일부러 그를 넘어뜨렸다.
가혹 행위를 당함에도 전도혁은 불굴의 정신력과 오기로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었다.
필두로부터 받은 트레이닝(?) 덕분이었다.
한편.
아무도 없을 거로 생각하며 마음 놓고 전도혁에게 가혹 행위를 펼치는 문석도였으나,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과연,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구먼.’
투명화 마법을 건 채 탄약고 초소 근처에서 이 모든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강필두.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