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47화
제12장. 스파이(1)
내무 부조리.
대한민국 군부대에서 병사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장애 요소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내무 부조리 덕분에 자살이라는 최악의 선택지를 고른 병사들의 숫자도 적지 않다.
군부대 내에서도 이런 내무 부조리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방안을 도입하고 있지만, 사실상 효율은 그리 크지 않다.
형식에만 얽매이는 조직이 바로 군대 아니겠는가. ‘우리는 내무 부조리를 없애기 위해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다’라는 것만 보여줄 뿐, 사실상 실제로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사단에서 나오는 인사 검열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 여기서 만약 터치가 들어올 건수가 하나로 적발된다면, 그 책임은 상당히 무겁게 다가온다.
형식에 얽매이는 군대이기 때문에 처벌 방식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9090대대와 같은 야전 부대들은 최대한 지적거리가 생기게 하지 않기 위해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포대장.
기껏 연대장에게 훈련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는데, 여기서 괜히 실수 하나라도 했다간, 그 공이 전부 산산 조각날 게 틀림없다.
칭찬 뒤에 듣는 잔소리가 더 무서울 때가 있다.
그렇기에 제1포대 포대장은 다른 포대에 비해 훨씬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행보관님, 혹시 저번에 병사들하고 1대1 면담했던 내역 모아놓은 파일, 저한테 잠깐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바로 드리겠습니다.”
곧장 포대장실을 나선 필두가 행보관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동시에 빠른 속도로 머리를 회전시켰다.
“내무 부조리라…….”
필두도 내무 부조리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정도는 익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경각심이 들었다.
간부들이 모르는 병사들의 세계.
그곳에서 무슨 일이, 그리고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직 제대로 아는 간부들은 없다.
‘가만 있어보자…… 여섯포 반장이 병사 출신이었던 걸로 아는데.’
간부 중에서 유일하게 병사 출신인 여섯포 반장, 박호섭 하사.
그에게 의견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 * *
똑똑.
가벼운 손놀림으로 노크를 하는 여섯포 반장. 그가 조심스럽게 행보관실 안을 향해 자신의 방문 소식을 알렸다.
“행보관님, 하사 박호섭입니다.”
“들어오도록.”
“예.”
문을 열고 들어온 여섯포 반장이 거수경례를 선보였다.
“충성!”
“충성. 일단 앉아라.”
“네, 알겠습니다.”
여섯포 반장이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제1포대 부사관들 사이에서 가장 막내에 속하는 남자다. 간부가 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이다.
본래는 제1포대 하나포 병장이었던 박호섭. 하나 도중에 갑자기 마음을 달리 먹고 간부 지원을 신청하게 되었다.
병영생활도 나름 잘하는 편이었고, 은근히 군대 체질이었기에 간부로 승격되는 건 그에게 있어서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의자에서 일어선 필두가 그에게 캔 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한 잔 마셔라.”
“감사합니다!”
긴장한 얼굴로 손을 내밀어 필두가 건넨 캔 커피를 얌전히 받아드는 여섯포 반장.
평소에도 자주 행보관과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지만, 오늘따라 그가 이토록 긴장하는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왜 행보관이 여섯포 반장, 그만 따로 행보관실로 호출했는지 제대로 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아서였다.
혹여나 여섯포 반장이 필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법한 실수라도 저지른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나 필두가 꺼낸 말은 의외였다.
“아직 부사관들한테는 말 안 한 거지만…… 조만간 사단에서 내무 부조리 검열 조사 나온다고 하더라.”
“사, 사단에서 말입니까?”
“그래.”
담담한 얼굴로 말하는 필두였으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사항은 꽤 무게감이 있는 내용이었다.
연대급에서 누군가 나온다고 해도 바들바들 떠는 야전부대인데, 사단급에서 나온다고 하니 어찌 가벼이 흘려들을 수 있겠는가.
“근데 왜 저를…….”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여섯포 반장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한 필두가 딱 잘라 말했다.
“뻔하잖냐. 너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하는 거지.”
“무엇을 말입니까?”
“너,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병사였다며.”
“앗, 네! 그렇습니다.”
“그럼 병사들이 어떤 내무생활을 하고 있는지 잘 알겠네.”
“그거야…….”
필두가 노리는 게 바로 이것이다.
간부 중에서 그나마 병사들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여섯포 반장, 박호섭 하사다. 그런 그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뜯어낸다면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 그런 필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여섯포 반장의 태도에는 확신이 묻어나오지 않았다.
“제가 병사 출신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지난 일입니다. 요즘 병사들이 어떤 생활을 보내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만…….”
말끝을 흐리던 여섯포 반장이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아, 차라리 병사들에게 직접 부탁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직접?”
“예. 다른 간부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병사 시절 때 일병, 이등병이던 애들이 지금 병장 달고 생활하고 있으니까 녀석들에게 잘 말해서 어떤 내무 부조리가 있는지 실토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에 내무 부조리가 있다고 하면, 병장들한테 주의 좀 해달라고 말한다면…….”
“뭘 모르는구먼, 여섯포 반장.”
“자, 잘못 들었습니다?”
도중에 말을 끊은 필두가 혀를 찼다.
그러고서 날카로운 일침을 날렸다.
“병사들이 네 말에 곧이곧대로 협력해 줄 거로 생각하느냐.”
“그래도 한때는 같이 한솥밥을 먹…….”
“그건 네가 병사였을 때 이야기고. 이제는 간부와 병사 관계가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너를 같은 병사 신세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냐. 그리고 걔들이 바보냐. 스스로 ‘우리는 이런 내무 부조리가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게. 바보가 아닌 이상, 본인들 스스로 목 죄는 일은 안 할 거다.”
“생각해 보니…… 행보관님 말씀이 맞는 거 같습니다.”
게다가 부사관이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을 밟기 위해 여섯포 반장은 장기간 부대를 떠나 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그동안 여섯포 반장의 후임이었던 이들도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선임’이라 생각하지 않고 ‘간부’라 여기고 있었다.
간부라는 직함을 단 순간부터 병사들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셈이다.
“일단은…… 알았다. 네가 병사였던 시절 때 기억나는 것들 있으면 적어서 나한테 줘라.”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정보를 모을 수 있으면 모아야 한다.
처음부터 여섯포 반장한테 큰 기대는 가지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많은 정보를 모은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었기에 일부러 여섯포 반장을 호출한 것에 지나지 않다.
병사들 사이에서 내무 부조리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알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필두에게 충성하는 그런 병사가 필요하다.
‘한 명 있긴 하지.’
필두의 말에 절대복종하는 병사 한 명.
그가 한 마디 하면 목숨 걸고 이행하려고 드는 충신이 있다.
바로 전도혁이다.
* * *
전도혁. 그가 군부대 내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장소를 손꼽으라고 한다면 당당하게 ‘행보관실’을 선택할 것이다.
가고 싶지 않은 장소.
아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 남자.
강필두.
“잘 왔다.”
“…….”
환대하는 필두였지만, 전도혁은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며 마수의 손길에서 잘 도망 다녔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그래 봤자 필두의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
“무슨 일로 저를…….”
잔뜩 긴장한 채 묻는 전도혁.
그도 여섯포 반장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이유에서 이곳 행보관실까지 불려 오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듣지 못했다.
“그냥 시킬 일이 있어서.”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필두.
그의 모습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는 전도혁이었으나, 대화를 주도하는 건 그가 아닌 필두다.
오로지 수동적으로 그의 말을 받아줘야 하는 전도혁이었기에 반항보다 경청하는 태도로 일관해야 했다.
“혹시 말이다.”
필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무 부조리라는 거, 알고 있나.”
“내무 부조리…… 알고는 있습니다만…….”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그런 게 아닐 텐데.”
“…….”
“말해 봐라. 내무 부조리가 있나?”
점점 전도혁의 숨통을 조여 오는 필두의 압박감.
진퇴양난이었다.
하나 여기서 필두의 말을 못 들은 척해도 후환이 두렵다. 그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다.
“…… 있습니다.”
“역시 그랬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언제나 그렇듯 항상 트러블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정된 공간에서 머물러야 하는 군인들인데, 문제가 안 생긴다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된다.
사소한 다툼이라도 크게 반응하고, 크게 번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군대라는 조직의 특징 중 하나다.
“구체적으로 뭐가 있지?”
“그건…….”
“너무 포괄적인 질문이었나? 그럼 말을 바꾸도록 하지. 누가 내무 부조리를 조장하고 있나?”
“…….”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의 원인은 사람이다.
군대라는 조직은 더더욱.
“말로 하기 힘들다면, 내가 직접 말하게 해줄 수도 있다만.”
“아,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학을 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수평 방향으로 격렬하게 흔드는 전도혁이었다.
이미 필두에게 당할 만큼 당했기에 어떠한 공포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전도혁의 입에서 내무 부조리를 조장하는 이들의 명단이 들려왔다.
“……아마 이 정도 될 거 같습니다.”
“그렇군.”
잠시 침묵을 유지한 채 전도혁이 들려주는 이들의 명단을 머릿속에 저장하던 필두가 결론을 들려줬다.
“다시 말하자면, 그 새끼들만 족치면 된다 그거지?”
“저는 잘…….”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제거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레디너스 대륙이었더라면 숙청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여기는 불행하게도 인권이 기가 막히게 잘 보장된 세계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흠…….”
필두가 잠시 팔짱을 낀 채 사색에 잠겼다.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언가를 떠올린 모양인지 대뜸 바깥에서 대기 중인 당직들을 찾았다.
“당직!”
필두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퍼져 나갔다.
때마침 지루한 업무에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당직사병이 놀라서 허겁지겁 행보관실 안으로 들어왔다.
“충성!”
“병력들 집합시켜라. 시킬 게 있다.”
“어떤 겁니까?”
반사적으로 질문하는 당직사병.
혹여나 또 필두의 마수가 펼쳐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물음에 필두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의 편지 받을 거다.”